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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31. 2022

눈을 뜨지 않아도 보이는 세계

달의 뒷면

알다시피 '닐 암스트롱'은 달에 착륙한 첫 번째 인간이다. 그는 태초의 아담처럼 기원의 자격을 지구에서는 가지지 못했지만, 달에 있어서 만큼은 첫 번째라는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두 번째였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을까? 


2019년, 중국의 달 탐사선 '창어 4호'는 달 뒷면에 최초로 도달했다. 앞은 불가능해도 뒤는 가능했다. 비록 인간이 탑승하진 않았지만, 영상으로 착륙하는 장면을 모두가 지켜봤으니 우리는 최초로 달 뒷면에 착륙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곳을 탐구하려는 습성을 갖는다. 그것은 호기심이라는 단어를 발생시켰고 먼 우주를 탐사하려는 보이저호 탐사 계획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달의 뒷면은 지구의 자전 주기와 달의 공전 주기가 달라 관찰이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의심을 생산하고 음모론까지 확대된다. 달의 뒷면에 외계인의 기지가 숨어 있다, 우주 탐험을 위한 미국의 전초 기지가 숨어 있다, 는 온갖 소문을 만들고 그 소문은 날개 돋친 듯이 돈으로 팔려 나간다.


발견된 달의 뒷면은 예상보다 더 싱거웠다. 앞면과 마찬가지로 곰보빵 같은 분화구들만 펼쳐졌을 뿐 기대했던 외계인의 비밀 격납고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착륙하는 달 탐사선의 실황 중계도 더 이상 신기함을 주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에 구경한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본다는 것은 사물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빛의 장난으로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인지한다고 보면 된다. 달 뒷면으로 날아간 탐사선의 움직임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달의 뒷면에 어떻게 날아갔고 지구와 교신에 어떻게 성공했는지, 자세한 과학적 기술은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불가능할 거라고 믿은 영역까지 인간의 지평이 넓혀졌다는 것,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게 아닌가. 무의미할지라도 최초라는 설정이 더 중요할 테니까.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김광섭 『저녁에』 중에서


우리는 밤마다 달의 앞면뿐만 아니라 다른 행성과, 샛별, 블랙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은하의 세계까지 흡수한다. 공해 때문에 우리가 사는 대도시에서는 별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별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우리의 시선을 달의 뒷면을 향해 직접 날아 보냄으로써 보이지 않던 달의 뒷면이 살아 숨 쉴 거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비시각적인 능력, 그러니까 추상적인 상상력으로 달의 신비를 몸과 마음에 완벽하게 각인시키는 셈이다. 


다만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왜곡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보이는 것조차 왜곡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직도 달 뒷면에 외계인이 살고 있다거나 옥토끼가 산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의사의 진단이 필요할지도.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어린 왕자의 말처럼 달의 뒷면은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겨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달의 뒷면은 생각보다 훨씬 밋밋하고 최초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 정도로 어영부영한 세계일 테니까.


인간은 집요한 구석을 가졌다. 자신의 뒷모습은 평생토록 보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달의 뒷면은 뭐가 그렇게 신비롭게 여겨지는지 그것을 발굴하려 천문학적인 돈까지 투자하는지 모르겠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앞면 말고도 사람에게는 가려진 옆면과 숨기고 싶은 뒷면, 또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아랫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는 김윤나 작가의 말처럼 우리에겐 평생토록 못 보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초라한 뒷모습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뒷모습을 감출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매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산다는 사실을 우린 알아야 한다.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똑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사람의 관점은 제각각이다.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특징을 먼저 찾아내는 나 같은 편집증적인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일부러 정보를 왜곡하려는 사람도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있는 그대로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다. 


나는 어떤 면을 보려고 하는 유형의 인간일까? 내가 볼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눈을 떠야만 볼 수 있고 감으면 그렇지 않은가. 눈에 의지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깨달을 수는 없을까? 먼 외계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으려고 노력만 할 것이 아니라, 내 뒷모습부터 먼저 챙기는 게 좋겠다.


밤마다 달을 보며 그 뒷면 끝의 먼 우주를 동경해 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흘러가는 시간에 무심히 빠져들곤 했다. 시간은 구름과 햇살 너머에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어서 나를 기다려 줬다. 태양은 우리의 사랑스러운 지구 반대편에서 다양한 색상을 뽐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 흐름을 볼 수 없었다.


밤하늘에 숨은 달빛의 환영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머릿속에선 아무런 감정도 의식도 찾아오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의 세계는 서로 다르게 생겼다.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멍하게 빛의 장난질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지평선 아래로 추락하는 햇살과 그것이 연출하는 몰락의 마지막 칼춤에 젖어들었던 나는 단순한 빛의 산란 현상을 본 것일까. 아니면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실 너머의 이데아를 본 것일까.


본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과정보다는 세포 하나하나에 사물과 처음 대면했던 감정을 각인시키려는 의도 말이다. 그래서 눈으로는 부족하거나, 담기 힘든 사물의 이면까지 볼 수 있는 다른 초감각을 깨우는 것이다. 그 세포에 새겨진 장면은 우리가 삶을 다하기 전까지는 끝내 살아남아서 필요할 때마다 길잡이가 되어줄지도. 그래서 인생을 살아갈 때마다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장면까지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키워주는 건 아닐까.



보인다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멈춘 것이다

내 눈이 혹은 당신의 동작이


당신은 나에게 눈물을 감춘다

나는 당신에게서 허무를 대신 본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어설픈 문장으로 말하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고 말하는

당신의 예리한 뒷모습을 본다


세상은 먼지처럼 뿌옇다

무엇도 새롭지 않고

신기한 것은 꺼낼 수조차 없다


잡히는 것은 가볍고

내 손은 날이 갈수록 더 무거워진다

지겹다, 지친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이물감

아침을 열 때마다 고개를 드는

기묘한 기시감旣視感


눈을 감고 먼 은하수로 건너 가본다

눈을 뜨지 않아도 되는

감아도 충분한 날을 위해


공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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