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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17. 2022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에 불과할까?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어제의 나, 지난 시간 속에 흘려보낸 나는 이곳에 없다. 그럼에도 사라진 나는 이 공간에 남아서 과거에 사라진 나를 떠올린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나는 어디에서 배회 중일까. 지금의 나는 어떤 나로 변해가는 중일까? 쇠락 중일까? 다시 회복되는 중일까.


점진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시간은 흐르겠지만, 나는 그 사실을 특정 시점에만 협소하게 느낄 것이다. 오직 나라는 존재를 지각할 때, 나라는 양감은 다시 현실에서 부피 없음이라는 헐값으로 매겨진다. 거기에 속한 나는 가끔 빈 껍질 같기도, 100도씨의 커피 물로 채워진 머그컵의 공허한 여백 같기도 하다.


삶은 늘 도입부에 불과하다는 브뤼크네르의 정의에 따르면 아무리 내가 걷고 또 열심히 뛰어간다 한들 나는 거의 제자리에 머무는 것과 같다. 상대적인 거리를 인식하는 순간, 분명 내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 것은 맞지만, 우주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환산한다면 나는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한 상태다. 


그것이 가능성을 만드는 원리라면, 나는 그 위안을 벗 삼아서 오늘에 의미 없음, 이라는 의미를 대입하는 걸까. 없어서, 무의 범위를 손바닥으로 인식하는 행위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느끼려는 걸까. 어쩌면 소진된 과거의 세포 조각들을 다시 살려내려는 행위로 나의 의식을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 나를 실패자의 길로 인도한다. 나는 영원한 실패자, 집을 되찾지 못하는 노숙자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공평한 것은 이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똑같은 원리에 지배받는다는 얘기다. 그 이론은 나에게 완벽한 위안이 되어준다.


이 무대의 3막이 내리면, 내가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주연인 나와 나의 여정에서 주변인 나의 수많은 분신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들과 내가 누린 삶들은 점진적인 형태였을까. 급진적인 그 무엇의 몰락이었을까. 


그들에게 안부를 묻고, 언젠가 우리 함께 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면 그 사소한 바람은 이뤄질 수 있는 걸까.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조급해지고 더 분주해지고 더 바빠지게 되는 걸까. 점진적이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굴리면서도 한 손으로는 바쁘지만, 아니 바쁘더라도 차라도 한 잔 해요.라고 남몰래 속삭이고 싶은 걸까. 나, 나라는 존재 안에 은거 중인 나, 나의 경계를 둘러싼 나, 그 모든 나에게 어떤 개념적 정의를 내려주는 게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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