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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06. 2022

도대체 글은 왜 쓰는 거야

도대체 글은 왜 쓰는 거야. 왜냐고 어떤 목적을 갖고 쓰는 거냐고. 분명한 목적을 대봐.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혼자 생각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남자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뛰어날 거라고 믿고, 애를 쓰고, 질문에 집착하고, 이보다 더 합당한 대답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신뢰하지만, 내가 내놓은 대답은 오직 나의 믿음에만 근거할 뿐, 객관적인 설득의 체계를 갖추진 못한다.


나는 어느 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왜 글을 썼는지 생각해 보면 특별한 계기가 과연 존재했었나, 의문만 들뿐이다. 왜지? 나 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지? 나도 하루키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이라도 존재했나? 아냐, 하루키도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래, 근데 하필이면 왜 하루키를 갖다 대는 거야. 너와 하루키가 무슨 이해관계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냥 하루키를 붙여 보고 싶었거든. 그래, 결국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변명 따위들만 늘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내 글은 길어진다. 내 글은 모두 자기기만 행위에 해당된다.


나와 하루키 사이에는 무한한 수평선만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한 선위에는 내가, 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선 위에는 하루키가 서 있다. 나는 허술하고 하루키는 탄탄한 길 위를 자신만만하게 걷고 있다. 나는 흔들린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굳은 표정으로 그리고 떨리는 내 손으로 오른손에 든 가위로 그것을 끊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내 손으로 울면서 선을 직접 잘라내는 행위, 언젠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행위.


이 글은 소설일까? 에세이일까? 특별하게 영역을 구분 짓는 게 무슨 의미냐.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기도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특별히 나를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 말이 하루키의 소설과 내 글이 가져야 할 방향성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또 하루키와 결부시키려고 발악을 하는 군. 그렇다. 이것은 내 발악일 뿐이다. 열렬한 마지막 몸짓일 뿐이다.


어떤 글이 나에게 어울릴까. 그래 왜 글을 썼는지 이유를 찾는 것보다 나와 잘 어울리는 글이 무엇일지 더듬어보는 게 더 이로울 수도 있다. 다시 말해보자. 자, 어떤 글이 나와 어울리는 거야? 소설이야 에세이야? 어느 쪽이야. 진보야? 보수야? 엄마야 아빠야? 이렇게 어리석게 묻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렇다면 시와 논문은 어떨까, 정보성 글과 사업계획서는 어떨까. 모두가 글이잖아, 그것들도 글이라고 네가 그렇게 무시하던 다른 글도 저마다의 모양으로 지금 울고 있다고. 그것들도 모두 네가 태어나게 만들었다고, 설마 그것들을 사생아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아냐, 지금 쓰는 글은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야, 어쩌면 시로 비칠지도 모르잖아. 참 다행이군 그래. 나는 이 글이 다소 길지만 시의 성격을 갖춘, 그러니까 비유와 은유로 떡칠되어 있다고 변론을 구사하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모든 건 믿음의 영역이니까, 그 믿음이라는 건 때로 자기 자신조차 속여버리는 일이니까.


그러니 나는 오늘 내 글의 경계를 굳이 설정하지 않는다. 이 글이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내가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사람, 독자라는 대상에게 주어진 과제니까. 그래, 내 글이 대체 어떤 곳에 속하는 걸까. 나도 모르는 내 글의 정체성을 누가 결정해주면 얼마나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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