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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18. 2016

단 하루, 한순간을 위하여

바베트의 만찬을 읽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갇힌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 그 깊은 곳에 침전된 사람은 고지식함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말초적인 쾌락을 등지고 사는 삶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금욕적인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일지 인생의 가치는 각자가 처한 현실에 따라 다르지만, 현재의 내가 가장 빛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만족하며, 세속적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견디며 살아간다.



종교는 어떠한가? 우리가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믿는 신은 삶의 진정한 위안을... '도덕적으로 바른 가르침을 안겨주었는가?' 우리는 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배운 사상을 '삶에 적용하며, 잘 따르고 있는가?' 깊은 밤 무렵, 하루를 반성하며 잠들기 전, 나는 신 가끔 일방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하루 동안 저지른 허물, 과오들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결과와 상관없이 내가 확신하는 것에 집착하는 믿음이 기도의 시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내가 믿는 신념, 가치 이러한 것들은 학교, 사회생활, 종교활동 등을 통하여 얻은 터득, 깨달음일 것이라 믿는다. 이것들은 개인에게 오롯이 주어진 과제다. 내가 믿고 살아가는 가치는 삶의 기초가 되는 믿음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지 않는 이상, 절대 변하지 않은 불가지 영역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 함몰된다. 끝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회고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뜻을 역행하고 거스른다는 것은 안정적인 기반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금까지 배웠던 가치를 부정해야 하는 응축된 에너지가 필요하다. 북카페에서 이번 달 선정한 도서 <바베트의 만찬>에서 몇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최고라 여기며, 그것을 죽을 때까지 믿고 사는 금욕적인 두 자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후, 자신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예술적인 혼을 잃지 않은 채, 마지막 그것을 불사른 바베트...  두 자매와 바베트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삶이 최고다'라는 사고방식에 빠진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간접적이나마 관조할 수 있었다.




바베트의 만찬


<바베트의 만찬>은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작품이다. 그녀는 두 번의 노벨문학상 작품 후보에 올랐었지만, 헤르만 헤세와 알베르 카뮈에 밀려 수상의 기회를 놓쳤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이 열연했던 주인공은 실제 '이자크 디네센'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바베트의 만찬>은 짧은 단편으로 100페이지가 넘지 않는 분량이다.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선 몇 배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이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 떠올랐다. 이 단편 역시 종교적인 색채를 다분히 나타내고 있다. 나는 현재 뚜렷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잠시나마 교회에 다닌 적은 있다.), 고유의 종교마다 설파하는 장점은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금욕적인 삶, 바르게 사는 삶, 인간답게 살기 위한 삶을 인생에 적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스포 유의)


소설의 이야기는 노르웨이의 높은 산자락과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베를레보그'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다. 노란색 집에서 살고 있는 두 자매는 엄격한 기독교 집안의 규율 밑에서 자랐다. 두 자매가 살고 있는 노란색 집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는 태양과 같이 밝은 것, 즉 자비의 '예수'를 상징한다. 나는 노란색 집을 통하여 두 자매가 자라난 가정환경, 성장 배경 등을 유추할 수 있었다. 두 자매는 독실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금욕적인 생활 - 매일 성경 공부, 찬양 - 을 하며 평생 동안 회색이나 검은색 옷을 입고 살아가는 단정하면서도 무미건조한 사람들이었다.





두 자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지극히 단조롭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가치 외에 특별한 목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외부의 쾌락마저 거부한 채, 그들만의 세상에서 폐쇄적이며 독자적인 문화를 누리며 바르게 살았다.


교파(청교도)의 신도들은 이 세상도, 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들도 모두 환상에 불과하며, 진정한 현실은 그들이 기다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에 있다고 믿으면서 세속의 쾌락을 거부했다. - P.8




두 자매는 바르고 선한 삶을 살았고, 청춘의 시절에 찾아오는 유혹의 본능까지 억눌러가며 살았다. 그들을 찾아온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떠한 선행을 베풀었는지는 아래의 문장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슬픔과 괴로움을 안고 자매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 헛걸음하고 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0



두 자매인 마르티네필리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와 자태를 뽐냈다. 그들을 만나게 된 젊은 남자들은 한눈에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잘 생기고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들은 두 자매가 내뿜는 아름다움 앞에서 넋을 잃을 뿐, 아무런 고백조차 하지 못했다. 아름다움은 그 순결함 자체로 남겨두는 것이 그것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인 것일까? 아니면 금욕적인 두 자매의 기풍에 압도당한 자신의 보잘것없는 욕망 때문이었을까? 젊은 장교는 마르티네를 말없이 떠났고, 프랑스 남자는 최고의 디바의 가능성을 보인 필리파를 떠났다.




"영원한 작별이오!" 장교는 절규하듯 말했다.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할 것이오! 난 이곳에서 운명은 도저히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는 것을 배웠소!" - P. 15

아실 파팽은 필리파가 고금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디바로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황제와 황후, 왕자, 귀부인, 파리의 예술가들이 모두 그녀의 노래에 눈물을 흘릴 거라고, 평민들도 그녀를 추앙하고, 억울하게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에서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거라고... - P.19



어느 날 프랑스 부인 바베트가 두 자매를 찾아온다. 바베트는 '아실 파팽'의 간청이 섞인 편지와 함께 프랑스에서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바베트 부인은 프랑스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에게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더 이상 없었으며, 삶을 지탱할 의미까지도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부인은 내가 그대들의 멋진 고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게 와서 노르웨이에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간청했소. - P.25




바베트 부인에게 두 자매는 반드시 좋은 사람들이어야만 했다. 삶이 쓰러질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작은 구원의 빛이어야만 했다. 나는 두 자매가 바베트 부인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헐벗은 미카엘 천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가난한 농부의 연민을 보았다. 톨스토이의 짧은 단편을 관통하는 굵은 메시지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다. 나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살뜰히 보살피려는 마음은 단지 종교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예의에 해당하며, 사람의 지위와 계급, 잘나고 못난 것을 초월하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바베트는 두 자매에게 사랑의 구원을 받고 나서, 자신이 노란 집에서 해야 할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두 자매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어도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엄숙하게 진행했고, 집을 맡은 이후로 살림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오히려 아픈 이웃들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더 커졌다. 마치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룬 것 같은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는 만 프랑의 복권에 담청 된다. 그리고 바베트는 두 자매에게 뜬금없는 만찬을 제안한다. 두 자매는 커피 이상의 대접을 손님에게 베푼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베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만 프랑의 돈으로 직접 만찬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마님들! 지난 십이 년 동안 제가 한 번이라도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왠지 아세요? 마님들은 매일같이 기도하시죠. 기도할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상상할 수 있으세요? 바베트가 뭘 위해 기도 하겠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오늘 밤 저는 진정으로 기도할 것이 있어요. 그러니 선하신 하느님께서 마님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듯, 마님들께서 오늘 밤 바베트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바베트는 프랑스에서 가족들이 몰살당하고 노르웨이로 쫓겨왔다. 자신들을 거두어준 두 자매를 향해, 그리고 더 이상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기도할 이유조차 찾지 못하고 살아왔다. 삶을 붙들게 해주었던 두 자매에게 요청한 만찬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찬을 수락한 자매는 바베트에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바베트는 자신을 받아들인 두 자매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행복의 감정을 보답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만찬은 그녀 자신을 위한 성대한 파티였다. 최고의 프랑스 식당인 '카페 앙글레'에서 천재 요리사였던, 과거의 경험을 통하여 그녀의 존재를 한껏 빛낼 수 있는 행복한 한 순간이었다. 비록 프랑스에서 쫓겨나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지만, 한순간의 영광을 위해서 만 프랑의 돈쯤은 쏟아부을 수 있는 예술가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바베트였다.





만찬에 참석하는 '로벤니엘름'을 비롯한 12명의 사람들은 최고의 음식을 경험하며 무아의 상태에 빠진다. 음식에 취하여 종교적인 거부감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단지 최고의 음식을 향한 경외감, 요리사를 향한 존경심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만찬에 성심을 다하는 것, 음식에 깊이 매료되는 것만이 요리사를 향한 최고의 찬사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혀란 신체에서 작은 부분이지만, 큰 자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누구도 혀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요. 그 악함이 제멋대로이며,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것도 혀 에요. 우리 스승님의 생신날, 우리 혀에서 모든 맛을 씻어내고 모든 쾌감과 불쾌감을 없앱시다. 오로지 고결한 찬양과 간사만 올릴 수 있도록 혀를 지킵시다." - P.45



베를레보그 마을 사람들은 식사할 때, 말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특별할 것 없는, 반복적인 하루와 음식은 서로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만찬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세는 확연히 달랐다. 음식을 통해서 굳었던 혀가 풀렸다. 사람 간의 쌓였던 상처를 매듭짓기 위한 말문이 트였다. 그들은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며 곪은 상처를 보듬기 위한 따뜻한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베를레보그 사람들은 잘 차린 음식을 먹을 때면 분위기가 진지했다. 그런데 오늘 밤은 달랐다. 먹고 마실수록 몸과 마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들이 했던 약속을 일부러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음식에 대해 잊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마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면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62



로벤히엘름은 저녁 만찬을 마친 후, 감격에 젖은 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는 환희에 젖어있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사랑을 얻은 듯했다. 억제했던 육체적인 사랑을 음식이 풍기는 맛을 통해서 정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켰고, 요리사의 진심을 행복한 감정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할 때 떨고, 선택을 하고 나서도 잘못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 다시 한번 떱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은총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은총은 우리가 그것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을 원합니다. 형제 여러분, 은총은 조건을 달거나 어느 누구를 특별히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은총은 우리 모두를 품에 안으며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을 얻었고, 우리가 거부한 것까지도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거부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풍요롭게 쏟아졌습니다. 자비와 진리는 하나가 되었고, 정의와 축복이 입맞춤했기 때문입니다." - P.66





그리고 그는 음식에 취했다. 음식은 그에게 특별했으며 자신만을 위한 축복이었다. 로벤히엘름은 젊은 날의 그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다시 정의한다. 마르티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함께 저녁을 먹겠고. 육신으로 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 P.68



마지막에 작은 반전을 독자에게 전한다. 바베트가 사실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였음을... 그녀가 하룻밤에 대접한 만찬 준비에 1만 프랑의 거금이 소요되었음을... 나는 1만 프랑의 가치가 어느 정도 일지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프랑스 시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값어치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평생 당첨될지도 모를, 크나큰 액수의 복권, 그 일류의 만찬을 단순히 자신의 예술적인 만족을 위하여 제공했다고 두 자매에게 밝힌다.


"가난하다고요?" 바베트는 혼자만 아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전 절대로 가난하지 않아요. 저는 위대한 예술가라니까요.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 마님. 예술가들에겐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 P.74

"마님, 그들은 제 손 안에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제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마님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돈을 써가며 제가 얼마나 훌륭한 예술가인지를 몸소 배우고 훈련받았어요. 제겐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죠. 제가 최선을 다할 땐 그들에게 완벽한 기쁨을 줄 수 있었어요." - P.76



소설을 읽고 난 후, 나의 주관적인 시선


이 소설을 깊이 관통하는 주제는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 것은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두 자매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품성이 가슴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자매의 마음속엔 신의 사랑이 자라나고 있었고, 그 사랑을 힘없는 사람에게 베풀었다.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사악한 마음이 내면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베트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유럽의 끝자락, 구석진 마을, 그리고 노란색 집에서 꺼져가던 그녀의 삶을 다시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굳은 신념이었다. 그녀의 예술적인 혼이 사멸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아실 파팽'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녀가 마지막 만찬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정열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삶에 지탱했던 끈끈한 열정 때문이었다.



바베트가 만찬을 상상하면서 준비한 고급 식재료, 와인 등을 단순히 돈으로 환산한다면 그 무게를 일반인이 계산할 수 있을까? 만찬은 금욕적이며 절제의 삶을 살고 있는, 지친 두 자매를 위한 선물이었으며 음식이라는 본능적인 욕구를 통하여 다른 세계의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바베트의 배려였으며, 바베트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그녀만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목적에 돈의 액수는 상관없었다. 자신의 예술가적인 삶,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버팀목이자 구원이었던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던 바베트만의 삶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약간 삐뚤어진 시선도 존재한다. 작가는 기독교의 일방적인 복음 전파를 꼬집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허점을 만찬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활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자신의 신념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기독교의 독선만찬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흥미 있게 접근하려 한 것은 아닌지. 절대적인 선이라는 논리로 다른 종교(신념)를 부정하고 교리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려는 논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들이댄 것은 아닌지.



짧은 소설은 나에게 큰 울림을 선물했다. 다양한 사고의 시간을 허락하는 책을 좋아한다. <바베트의 만찬>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주었고, 삶의 신념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제공했다. 바베트의 만찬은 책을 읽는 이에게 풍성한 만족을 선물했다. 이 책은 어른들에게도 따뜻한 마음과 잠시의 여유 있는 저녁을 선물함으로써 동화의 매력을 다시 느끼게 했다. 역겹고 괴로움뿐인 삶에 지쳐가는 나는, 누구에게 만찬을 제공할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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