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당근이시죠?”
“네. 당근 맞습니다.”
“공원 앞으로 오셨나요?"
“네. 지금 공원 앞에 서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나요?"
“내가 어디에 있는 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물건은 이상 없겠죠?”
“네 이상 없어요. 오셔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알겠어요. 그럼, 공원 앞에 푯말 하나 보이시죠? 등산 입구 쪽 빛바랜 푯말요. 푯말 뒤쪽에 보시면 작고 낡은 우편함 같은 게 하나 보일 거예요. 두 개도 아니고 딱 한 개 말입니다. 그 함 속에다가 물건 넣어놓고 가시면 됩니다.”
“아니, 여기다가 물건을 놓고 가란 말인가요? 그러다가 누가 보고 꺼내가면 어떡해요?”
“그건 제가 걱정할 문제고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그냥 안에다 넣고 가세요. 돈은 방금 송금했어요. 확인해 보시고요. 어차피 님은 돈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거래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 안에다가 물건 꽁꽁 숨겨두고 가겠습니다.”
마치 첩보원과 아주 비밀스러운 메시지를 주고받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주변을 한 번 살피고 태연하게 우편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물건을 할아버지가 아끼던 캐비닛처럼 생긴 낡은 우편함 속에 퉁명스럽게 밀어 넣으려 했다. 물건을 던져 넣으면서도 대체 공원 앞에 누간 이런 우편함이 설치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엔 세월의 흔적이 가미된 잿빛의 먼지과 온갖 종류의 거미들이 만들어 놓은 거미줄이 한꺼번에 얼키설키 서려 있어서 물건을 집어넣을 때, 그것들을 비켜가느라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기묘한 감각을 선물했다. 혹시 그와 내가 주고받은 메시지에 어떤 함축적인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 싶어, 나도 모르게 채팅 문자를 뒤적거려봤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그 메시지의 표면엔 추상적이거나 은유성 따위는 묻어있지 않은 그러니까 무미건조한 느낌만 잔뜩 함유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로서는 뒷맛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거래도 무사히 종료되었고 돈도 재깍 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기이한 기억은 봄날에 잠깐 찾아온 튤립 꽃처럼 금세 시들어졌다.
친구 A로부터 연락이 찾아온 것은 당근 거래가 종료된 후, 약 일주일이 경과된 시점이었다. 녀석의 용무는 비교적 간단했다. 소개팅 자리에 대타로 나서라는 것, 임자가 있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취소가 되었으니 나더러 잠시 자리에 나가 커피라도 한 잔 걸치고 오라는 통보였던 것이다.
나는 소개팅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색한 느낌이 싫을뿐더러, 공기 중에 떠다니는 낯선 기류의 흐름은 더 싫어하는 편이다. 마지못해서 몇 번 소개팅 자리에 나선 적은 있지만, 보통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상대방도 나도, 말없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서로의 핸드폰을 이유 없이 뒤적거리다가 서로의 갈 길로 돌아가는 형국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늘 그러한 형태로 소개팅이 마치 호텔 고급 커피숍에서 가진 억지 맞선처럼 시간만 축내는 결과를 빚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비상적인 형태로 소개팅이 파국을 맞는 결과가 나 때문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소개팅이라는 것은 너무나 비생산적인 시스템이 아닌가? 억지스럽고 과장스럽고 본질은 감추고 상대방에게 거짓된 정보만을 전달하는 소개팅이라니, 나도 모르게 내가 아닌 타인의 장점을 내 것처럼 포장할 뿐인 소개팅은 이 지구 상에서 사라지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소개팅에 소환되었고 그녀를 만나야 했다.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꽤 우주적이었다. 우주적이라는 말에 담긴 메시지는 그녀가 내게 꽤 확장된 존재처럼 비쳤다는 것이다. 확장이란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아무튼 그녀는 점점 팽창하는 우주처럼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얘기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첫 만남에서 강조한 그녀의 어떤 중대한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첫 만남 자리에서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그녀가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사실이었다. 왜? 어째서?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안 것일까? 그녀는 스토커라도 된단 말인가. 요즘은 스토커가 별다른 가치도 없는 인간을 대상으로 추적 놀이라도 한단 말인가. 왜 나란 말인가. 하필이면.
그녀는 나를 안다고 말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기억을 되감아봤지만 도통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서 우리가 만났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놀이공원 롤러코스터가 360도로 회전할 때 옆자리에 앉아서 비명을 같이 질러댄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게 그녀와 나의 어떤 교집합일지도 모른다. 대체 그런 정보가 얼마나 중요하단 말인가.
“저는 당신을 알아요. 우린 당근에서 거래를 한 적이 있었죠. 물론 당신은 저를 못 봤죠. 저는 먼발치 제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서 쌍안경으로 당신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 쌍안경이 성능이 아주 좋아서 저는 당신의 콧수염까지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죠. 그날 우편함에 두고 가신 물건은 잘 가지고 갔어요.”
아뿔싸, 오늘 소개팅 자리에 나온 그녀가 그때 당근의 그녀였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사건이란 말인가. 하지만, 인생에서는 여러 우연이 겹치고 겹쳐 필연처럼 나타나지 않는가. 그녀와 내가 오늘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건 어떤 핵심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우주의 획기적인 사건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그녀와 몇 번 정도는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근의 거래도 어쨌든 인연은 인연이 된 셈이니까.
그녀는 꽤 당돌하게 나에게 먼저 안을 제시했다. 한 번 사귀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꽤 저돌적이었다. 당근 거래처럼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몇 가지 조건을 테이블 위에 펼쳐놨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다시는 사람처럼. 몇 번 만남을 가지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중요할 테고 그렇게 만남을 가지는 것도 환영하겠지만, 단 명심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고 말이다.
“사실, 제가 특이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어서요. 그 알레르기란 게 좀 독특해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에겐 저마다의 취약성이란 게 존재하잖아요. 취약성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이 잘 인지하고 있고요. 그 사실을 외부에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 진실한 만남을 준비하고 싶으니까, 그 사실을 미리 전달해 드리고 싶어요. 서로 오해하는 일이 빚어지면 곤란하니까요.”
“좋습니다. 그 취약성이라는 것, 당신에게 내포된 취약성이란 게 무엇인지 어디 한 번 들어나 봐요. 내가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그때 당근 거래처럼 일방적인 게 되어서는 곤란하니까요.”
“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제 취약성, 즉 알레르기는 일종의 거리감이에요.”
“거리감요? 거리라는 게... 잠시만요 이럴 땐 사전을 잠시 찾아봅시다. 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간격을 뜻하는군요. 피상적으로 거리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는데, 오늘 제대로 의미를 다시 새겨 보네요. 단어의 뜻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당신이 말하는 거리감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하네요.”
“제가 정의하는 거리감이란 알다시피 물리적 거리예요. 저와 당신에게 주어진 거리죠.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있잖아요? 여기 테이블이 꽤 크죠? 일부러 이 공간을 선택했어요. 좌우 3미터 너비의 테이블을 갖춘 소개팅 장소는 찾기 쉽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맞아요. 지금에야 말하지만 중세 시대에 존재할 법한 성안의 큼지막한 테이블을 연상했다니까요.”
“다 이유가 있어요. 모든 상황엔 저마다의 고유한 의미가 담겨있죠. 저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감 유지니 까요. 그러니까 당신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한 거리예요. 공교롭게도 그 거리란 것이 잘못 건드리면 저에겐 취약성, 알레르기가 되는 거고요.”
“뭔가 독특하네요. 거리감이 취약성이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그런데 말이죠. 연인 관계라는 것이 일정한 스킨십을 필요로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도화된 형태로 스킨십이 성숙하게 마련인데, 그럴 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연인이라고 해서 꼭 스킨십을 수반되어야 하나요? 어떤 정신적인 형태로 물리적인 제약 사항들을 초과하여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군요. 제가 생각하는 연애관과는 거리가 다소 있는 셈이군요. 음, 여기에도 거리라는 단어가 들어가는군요.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드는 걸요?”
그녀는 나에게 연애 조건으로 거리를 계속 들먹거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서로 떨어진 채,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골자였다. 과연 그런 형태가 연애에 속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여자와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교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제안을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뭔가 기묘하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존재할 것도 같아서.
우리는 그날부터 만남을 이어나갔다. 단, 한 가지 중요한 사항, 그녀의 거리감이라는 알레르기는 잊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나더러 반드시 1미터 이상 떨어지라고 했다. 거리에서 거닐든, 공원에서 산책을 하든, 극장에서 영화를 보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든 그녀와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1미터 이상을 떨어져야 했다.
처음에는 그런 거리가 다소 재밌게 느껴졌다. 딱히 불편한 사항도 없을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기엔 다소 역부족이라 말소리의 볼륨을 올려야 하니, 주변에 소음을 일으키게 될 공산이 컸다. 그래서 옆에 같이 다니면서도 나는 채팅 메시지를 이용했다. 그녀와 당근 거래를 했던 것처럼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걸어가면서도 핸드폰을 보며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오늘은 돈가스 어때? 광화문에 괜찮은 맛집이 있대.”
“그래? 오늘 점심은 거기서 해결하자”
이렇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더 웃긴 상황은 이동 수단이었다. 그녀는 지하철과 버스를 절대 이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택시만 이용한다. 그것도 사이즈가 무지 큰 밴 같은 것만 이용하는 것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녀가 밴을 독차지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결벽증에 걸린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밴에 혼자 올라탔다. 나는 그녀를 미행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다른 택시에 올라타 그녀를 조용히 쫓아가야 했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할 때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요한 공간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분위기만 잠시 연출해 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 주변을 동서남북으로 모두 예약해 놓는다. 자신의 옆자리와 앞뒤 자리에 책을 우르르 쌓아 놓는다. 아무도 자신의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마치 견고한 성을 쌓는 장인처럼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두꺼운 책 몇 권을 빌려와 던져놓는 것이다. 물론 그 책을 쌓는 일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새벽에 일찍 나와서.
사람들은 그녀의 행위를 보고 처음엔 경악을 금할 수 없었으나, 그녀가 가진 취약성의 의미를 나에게 듣고 나서는 알아서 그녀를 피하게 됐다. 사람들은 나더라 용케 그녀의 애인이 되었다고 고개를 도리질 치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날은 이벤트 삼아서 내가 꽃다발을 몰래 전달하려 한 적이 있다. 나름 그녀를 놀래 주기 위해서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가 꽃다발을 주려는 이벤트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굴렀다. 마치 뇌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눈알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하얀 거품을 쏟으며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나뒹굴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그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그녀의 지독한 알레르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므로 발을 동동거리며 앰뷸런스가 어서 빨리 나타나길 학수고대할 뿐이었다. 그러나 앰뷸런스가 도착하면 그녀는 귀신같이 아무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는 태도로 먼지 묻은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털고 일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이벤트는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운을 귀신같이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을 전달하며.
그녀와의 연애가 짙어지고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점점 더 그녀와 유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 그것이 나와 그녀의 관계였다. 도무지 우린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첩보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뿐.
어느 날, 그녀가 AR 장비를 들고 왔다. 그 AR 장비를 보며 나는 이제 관계를 청산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녀가 들고 온 것은 구글에서 새로 나온 인공지능이 탑재된 AR 장비로서 그걸 연인끼리 쓰고 앉아있으면 상대방의 모든 신체 감각을 인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그 장비를 올려두었다. 서로의 집에 도착하면 편안하게 그것을 쓰고 앉아서 그동안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스킨십이란 것 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자신이 한 번 사용해 봤는데 느낌이 탁월했다고, 마치 실제로 누군가와 손잡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고.
대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미리 체험해 본 그녀의 발언이 의심스러웠다. 나는 덩치가 제법 큰 그 AR 장비란 것을 두 손에 들고 고맙다고 한 마디 하고, 대체 무엇이 고마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 밤에 시연을 해보자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긴급 뉴스가 타전되고 있었다. 제임스 웹 망원경이 프록시마 센타우리 천체를 탐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생각보다 더 멀리멀리 확장되는 추세라고. 우주가 서로 팽창되고 거리가 점점 떨어진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AR 장비를 만지작 거리다, 이 물건은 저 프록시마 센타우리에 존재할지도 모를, 그러니까 점점 멀어질 어떤 존재와의 교감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 생각을 하다, 이 장비를 켜는 대신에 장문의 메시지를 그녀에게 전송하기 했다.
그동안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그렇게 쓰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터졌다. 멀리 떨어진 프록시마 센타우리에서 발생한 적색거성의 플레어 때문에 인터넷 통신에 교란이 발생했다는 것. 당분간 통신에 장애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보낸 이별 통보 메시지는 팽창되는 우주에 속한 어떤 행성과 다른 행성 간의 물리적인 거리만큼 계속해서 연착될 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