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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관심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단편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 소설입니다.


나는 소규모 IT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보통 IT 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PC 따위는 눈을 감고도 조립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넌 조립의 대가야'처럼 영광스러운 전문가의 칭호를 나에게 붙여주며 슬금슬금 청탁질을 해오는 것이다. 쓸만한 PC 한 대 저렴하게 조립해 주면 안 되겠냐고, 사양이며 가격이며 이것저것 조율을 해가다가 나중엔 그것도 무려 공짜로.


나는 그런 말을 들어도 내공이 쌓여서 이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대화에 휘말려봤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본전도 없는 장사, 마진이 절대 나지 않을 장사라면 그런 판에는 아예 뛰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리라.


그래, 나는 IT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한 회사에만 거의 10년 가까이 다녔으니 업무에는 도사가 되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짐작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IT 회사에서 프로그램 좀 짤 줄 안다고 피씨 조립 따위는 바닥에 붙은 껌 조각을 떼어내는 일과 비슷하다는 착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바닥에서 껌을 떼어내는 일과 껌 공장을 운영하는 일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서 껌을 떼어내는 일과 비슷한 그런 하찮은 일이나 하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껌 공장을 운영하라고? 맙소사!


아무튼 이런 어이없는 비유나 양산해 내는 나는, 개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을 납품하는 세일즈도 아니며 바닥에 붙은 껌을 예리하게 도려내는 싱가포르의 전문 청소부도 아니다. 그저 IT 회사에서 지루한 관리 직책을 하나 맡고 생산된 제품 따위의 재고를 파악하고 검수하는 게 내 업무의 전부다. 재고 관리를 한다고 해서 대형 물류창고 같은 게 있어서, 그런 창고를 누비고 다니면서 수량을 세어가며 볼펜에 침을 묻혀가며 누런 노트에 수량을 기록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우리 회사엔 유통창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첨단 회사에 창고가 존재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저 IDC 혹은 아마존과 같은 클라우드 호스팅 사이트에 설치 프로그램과 패치 버전을 유지하면 그만이다. 제때에 서버에 파일을 업로드해두면 그만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우려도, 해커의 침입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런 건 대기업에서 완벽하게 관리해 주니까.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업무는 자동화되어서 개발자가 릴리스를 실시한 즉시 QA의 검증 작업이 시작되고 검증 작업을 통과하면 고객이 사용할 소프트웨어는 자동으로 제작되어서 서버에 업로드되니까. 이런 업무는 똑똑한 어시스턴트 팀이 만들어놨기 때문에 나는 그 과정을 중간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공장에서 감독관이 상품의 제작 과정을 관찰하는 것처럼.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알고리즘이 실수할 일은 거의 0%에 수렴하니까.


나는 이런 재미라고는 그러니까 불확실성 같은 것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회사에서 10년을 넘게 일했다. 관성적으로 일어나서 출근한 후, 무표정하고 무감각적인 자세로 일을 하다 시루떡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일이라고는 모니터를 얼간이처럼 쳐다보며 제발 에러 하나라도 터져라,라고 주문을 외치는 일이 전부다. 물론 그런 상상을 아무리 해봤자. 이 세계에는 에러가 비집고 들어올 구석이 없다. 그런 일이 터질 가능성은 아까 말했듯이 0퍼센트다.


하루 종일 의미 없이, 아니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일을 해도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는 편이다. 그것도 꽤 많이, 내가 전국적인 평균 월급 상승에 꽤 일조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만족할 이유는 없다. 그 돈을 받아놓고 어딘가에 요긴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삶은 노잼의 연속이다. 직장 생활도 노잼뿐이다. 열정 따위의 의식들은 모두 바닥에 먼지처럼 깔려있다. 진공청소기를 들이대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제거가 된다. 그렇게 의식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나는 동료도, 친구도, 심지어는 가족도 없다.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나는 그것조차 기억할 수 없다. 오직 서류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 혼자였으니까. 사람들은 나를 천애 고아라고 부른다.


그런 고아 따위의 명찰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완벽하게 혼자다.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없다. 그렇다고 내 아내가 어느 날 가출해버렸다는 것도 아니다. 원래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고 늘 혼자였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혼자일 것이다. 나는 고립이 때로 사랑스럽다.


직장 생활 역시 삶에 속한 여러 노잼 중 하나다. 노잼이라는 말은 사실 오늘 우리 팀의 막내에게 처음 들었다. '유 차장님은 한마디로 노잼이에요!'라고 막내가 말했다. 수백 명이 앉아 있는 구내식당 자리에서... 하지만 나는 노잼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형체를 걸러내지 못했다. 노잼이란 무엇인가. 나중에 들은 바로는 재미가 없다. 뭐 이런 뜻이란다.


아무튼 나는 노잼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 수 없었으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막내를 한동안 바라봤다. 10초 동안 침묵이 찾아왔지만 대중들의 음식 삼키는 소리에 금세 잦아들고 말았다.


나는 자리에 돌아와 앉아, '노잼, 재미가 없다, 재미없어, 그래 재미없어.' 기묘한 말들을 혼잣말로 계속 되뇌었다. 그런 말을 내뱉을 때마다 지나온 내 인생이 모두 재미없는 것으로 변색되는 것 같았다. 아니, 원래 재미없던 일들이 하나씩 고개를 쳐들고 '뭐 재미없으면 어쩔 건데?'라고 하며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재미있음과 재미없음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무엇이 존재한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세상이 돌아가는 일들에, 그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나에게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어찌 세상이 흘러가는 일에 관심을 둘 수 있을까. 그러니 이렇게 100인치 모니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상황실에 앉아 잘 알지도 모르는 데이터의 움직임을 가만히 살피는 것이 아닌가. 제발 대형 사고라도 한 번 터지길 기대하면서.


아무튼 나는 관심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다. 노잼을 잠시 동안 생각했지만 노잼 역시 관심 밖의 대상이다. 사람들도 세상도 모두 나의 관심과 상관없는 영역에 산다. 삶은 역시 노잼이다. 기대할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기대할 것은 없는데, 왜 나는 삶을 유지하는 걸까. 그렇다고 삶을 그만둘 만한 이유 따위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도 않다. 나는 지금처럼 목적 없이, 방향 없이, 처음에 출발했던 그 고립의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게 내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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