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초단편 소설

까만 밤이었어. 온통 시커먼 암흑뿐이었지. 침대 위에 누우니까 등짝으로 땀이 번들번들 흐르더라. 선풍기 펜이 안 돌아간지 오래전이지만 귀찮아서 고치지 않았고 지독한 습기 덕분에 내 몸뿐만 아니라 주위에 떠 있는 공기에서도 물이 지저분하게 흘렀어. 흐르는 물이 보일 정도였다니까. 한 여름밤 더러운 것들과의 지겨운 싸움이라고 해두자. 아무튼 더워서 죽을 뻔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게. 다만, 잘 듣고 안 듣고는 네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도 돼.


내가 침대에 누웠다고 했잖아? 그건 분명 자려고 했다는 거지. 그거 밖에 더 있겠어? 내가 설마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내가 그런 지독한 책벌레 따위는 아니잖아. 책과 담을 쌓아온 지 몇 년째인데, 아무튼 책 따위에는 관심이 1도 없다고.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거야. 이건 더워서 흘리는 더러운 땀과는 종류가 달라. 완벽하게 다른 차원이라고. 식은땀이 흐르면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목뒤에서부터 등으로 차가운 기운이 순간 스며들어, 끔찍한 소름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건 전조가 분명했어. 기분 나쁘고 엄혹스러운, 뭔가 불길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시그널임이 분명했다고. 간담이 서늘해진다고 하잖아. 딱 그랬다니까. 왜 그랬을까. 뭔가 기분 나쁜 영혼이 내 방에 깃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는데, 딱히 내가 그런 걸 공포스럽게 여기는 스타일도 아니고, 따라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괴기스러운 것들은 아니었다고 장담할 수 있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어. 이대로 그냥 잠이나 계속 청해보자. 뭐, 다 무시해버리고 누워버리면 언젠가 잠들 건 아니냐고. 그랬어, 분명, 그런데 또 석연찮은 거야. 이대로 자면, 내일 아침에 나는 나 자신을 소환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기묘한 생각. 어떤 페이지 하나가 있는데, 페이지는 어떤 책을 구성하는 일부분이고 그런데 그 페이지에서 내 이름이 찍힌 글자들이 하나씩 지워져버리는 거야. 난 순간 그런 걸 느꼈다고.


가만히 분석해 보니까, 내가 또 분석하는 걸 좋아하잖아. 시시콜콜하게 여러 상황들을 상정해놓고 도마 위에서 칼로 난도질하듯이 물건에 칼자국을 내는 게 내 취미 아니겠어? 그다음에 다음 반응이 오더라, 이번에는 허기가 찾아온 거야. 허기 알지? 배고픈 거 말이야. 그래 너무 배가 고파진 거야. 물론 나는 그날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어. 그건 너도 잘 알잖아. 우리 둘이 같이 치킨 3마리를 해치웠으니까,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2차로 족발집에 가서 족발과 보쌈까지 아귀처럼 먹어치웠잖아. 그러니 배고플 이유는 없어야 했다고.


하지만, 배가 고팠어. 난 바보가 아니라고 진짜 배가 고팠다니까. 아랫배를 만져보니 거의 허리 뒤쪽으로 닿을 지경이더라,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 내 배와 등이 닿으려고 했다고, 맙소사, 끔찍한 일 아니야. 그래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던 건, 너무나 배가 고파서 당이 떨어진 탓이었던 거야. 원인이 분석되니까 행동을 해야겠더라. 행동이 뭐겠어? 배고픔을 잊는 체조라도 달밤에 춰야 되겠어? 그런 짓은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어도 하지 않아. 그건 미친놈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냉장고로 달려갔지. 일단 허기를, 당 떨어진 몸에 위로를 안겨야 했어. 아 불쌍한 내 몸이여. 너는 지금 배가 고프다고 나에게 발악을 하고 있구나.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이렇게 몸의 대화를 나누며 문을 열었어. 일단 당이 다량으로 함유된 오렌지 주스를 원샷하고 통밀이 담긴 쿠키 3개를 흡입하고, 이때 나는 거의 실신 지경이었어. 먹는다는 것보다는 털어 넣는다는 개념이 더 어울릴 거야. 거의 본능에 입각한 행동이야. 만약 네가 옆에서 봤으면 아마 놀래서 거의 입이 찢어졌을 거야. 어쩌면 나는 이제 막 산에서 내려온 배고픈 차라투스트라라고 보는 게 딱 맞겠더라. 미친 철학자, 정신이 완벽히 나가버린 인간처럼, 아니 짐승처럼 먹었지. 그다음 타깃은 컵라면이었어. 내가 바보야? 물을 데워놓고 그게 100도씨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겠어? 그런 경솔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우습게도 나는 컵라면을 아주 야수같이 뜯어버렸어. 말 그대로 양손으로 컵라면을 그냥 잡아당겨버린 거야. 말하자면 폭발시켜 버는 거지. 빅뱅이 시작된 것처럼 펑 하고 컵라면이 갈라진 걸 본 적 있어? 내가 그걸 해낸 거야. 모세의 기적처럼 컵라면 용기와 라면이 동시에 쩍 하고 둘로 갈라지는 광경을! 오 신이여 저에게 은총을.


그다음은 먹성 좋은 거인처럼 와그작 씹어댔지. 소화는 필요 없어. 일단 입속에 처넣는 게 중요한 거야. 씹지도 않았어. 눅눅하게 딱딱해진 말라깽이 라면 덩어리들을 입에 넣고. 간단하게 씹다가 삼키고, 다시 그 동작을 연속적으로 연출했지, 주도 면밀하게 말이야. 그렇게 덩어리를 넘기다 물이 막히면 또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속이 좀 내려간 거 같으면, 다시 달콤한 쿠키를 먹어치우고. 대충 그런 동작을 한 30분 가까이 반복한 거야.


그렇게 하니까 뭔가 충족이 되더라. 안심이 되더라고. 이제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욕실에 가서 물로 입을 헹구고 뱉어버렸어. 깔끔한 심야의 식사, 아니 심야의 난잡한 파티였다고 해두자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안정을 되찾게 되어서 침대에 누웠어. 그리고 눈을 감았지.


눈을 감으니 어떤 숫자가 아른아른하는 거야. 313X, 123Y898 이런 불규칙한 숫자 따위들이었어. 그런데 눈을 다시 뜨면 숫자가 사라져. 다시 눈을 감았지 눈을 감으니까 아까 떠오른 숫자가 다시 반복되는 거야. 같은 숫자가 튀어나오는데, 그다음에 이제 새로운 숫자가 다시 생겨. 눈을 뜨면 또 사라지고. 눈을 감으면 그 일련의 숫자들이 다시 차례대로 나와. 뭔가 싶었어. 나는 공책을 펼쳐 넣고 녀석들을 적기 시작했어.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눈을 감았다가 숫자가 나타나면 다시 눈을 뜨고 그걸 적는 거야.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서 대충 4만 가지 정도의 숫자를 모두 발굴해냈어.


그 숫자의 의미는 뭘까. 어떤 메시지라도 포함된 걸까. 뭐지? 알 수 없다. 기묘한 수수께끼일까, 어떤 상징일까? 의심과 반목, 체념이 왔다 갔다 했어. 그러다가 문득 짚이는 게 한 가지 있는 거야. 이건 좌표다, 좌표 체계야. 플레밍의 왼손 법칙에 따라, 아니 데카르트의 평면이다, 이런 결론이 나온 거야. 나는 재빠르게 컴퓨터를 켜고 그 연속적인 숫자들을 코드에 기입했어.


컴퓨터 화면에는 픽셀이라는 게 존재해. 1픽셀은 모니터에서 한 점을 의미해. 가로 세로로 그것들은 나눠지지, 나는 그 숫자들을 좌표의 점에 대입했어. 순서대로 숫자를 모두 프로그래밍하고 시뮬레이션 결과를 기다렸어. 숨이 막혔지. 긴장이 됐지. 어떤 메시지가 출력될까 너무 궁금했지만 한편으론 겁도 났어. 외계인이 나를 납치해 가는 건 아니겠지, 그런 두려움이 느껴져서 말이야. 조금 기다리니까 그림 한 장이 그려지더라, 난 입을 틀어먹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의자 위에 앉아있다가 뒤로 자빠질 뻔했어. 물론 그렇게 놀랐다는 걸 비유할 뿐이야.


모니터엔 아귀 한 마리가 있었어. 목은 바늘처럼 얇고 입은 하마처럼 커다란. 그런 아귀가 내가 찔러 준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하지만 단 0.1%도 소화시키지 못해. 그게 가능성을 잃은, 저주의 축복을 받은 아귀의 운명이니까. 나는 미친 듯이 먹고 아니 내가 미친 듯이 먹고 아귀는 태풍 같은 아우성을 질러 대. 세상의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는 광폭한 울음을 소용돌이치듯 메아리쳐.


음식은 들어가려다가 결국 다시 편도 앞쪽으로 튀어나와. 입에서 그 음식들이 회오리처럼 계속 맴돌아. 맷돌처럼 부서지는 거야. 그리고 혀와 이빨 사이에서 영원히 썩어가는 거야. 아귀는 제 입에서 음식을 영접하고 그걸 썩은 제물로 만드는 거지. 그게 아귀의 운명이니까. 모니터엔 게걸스럽게 음식을 집어삼키지만 나노미터 정도 크기조차 소화시키지 못하는 억울하고 슬픈 아귀의 환영이 가득 떠 있었어. 그날 그 그림이 벌어졌던 게 다야. 그 이후에 어떻게 됐냐고? 단 한 번으로 끝나버렸으면 해프닝으로 치부됐겠지. 하지만 저주스럽게도 그런 일은 매일 밤마다 반복됐어. 지금? 이제 오려고 한다. 아귀가, 아니 미칠듯한 식욕이 올라오려고 해. 나 좀 불 들어줘, 저 기둥에 나 좀 묶어줄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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