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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이지만 기획 일도 꽤 잘합니다.

프롤로그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대수롭지 않은 얘기라고 한 건 말이지. 그러니까, 이따금씩 그게 정말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뜻이야. 그건 아주 이상한 느낌이야. 마치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꾼 듯한 느낌이랄까. 정말로 일어난 일일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현실의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거야. 어떻게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꿈을 꾸었다. 뭔가 석연찮은, 난해하면서도 해석하기 힘든 기묘한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딘가로 분주하게 이동 중이었다. 왜 이동해야 하는지 이유는 없었지만, 내 인생에서 늘 그래왔듯이 나는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며 분명하지도 않은 도착지를 향해서 뛰는 것도 아닌 걷는 것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자세에서 분주한 모양새만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버스 안에 위태롭게 서 있었고 어느 순간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붙들고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몇몇 장면을 길거리에 동전 흘리듯 떨궈버리기도 했고, 길거리 위에서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장면엔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저 나는 숨 쉬는 것만이 전부인 양, 아니 어떤 장면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마치 그것은 정규화된 수학 공식처럼 정숙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마치,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하는 환자처럼.


그러다 내가 도착한 곳은 아니 그냥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곳은 이전 직장의 회의실이었다. 맙소사! 하필이면 도착한 곳이 지옥 같던 전 직장의 회의실이라니,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냥 수긍해야 했다. 세상에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도사리고 있고 우린 늘 그 가운데를 무심히 통과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세계는 꿈속이 아닌가, 꿈속은 나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다. 내가 만든 세상을 과연 나 자신이 부정할 수 있을까. 그저 인식하고 고개를 밑으로 수그리기만 할 뿐.


회의실 주변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었다. 그들은 마치 장난감 병정처럼 보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납덩어리가 잔뜩 들어 있는 것 같은 묵직한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학창 시절 늘 지니고 다닌 준비물도 아닌 이상하게 생긴 물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발표를 위한 출력물, 노트북, 복잡한 케이블들이 담긴 파우치 따위들이 가방 속의 주인공들이었다. 그것들은 가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전쟁을 열띠게 펼치는 중이었는데, 그 속에서 화를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탈출이라도 할 듯이 원망을 표현하는 중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좌우에는 낯이 익은 사람들이 몇몇 앉아있었다. 그들은 과거 내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적어도 꿈속에서는 현실처럼 적대적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무엇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두리번두리번하며 가방 속을 뒤지는 행태를 보고 당장이라도 도와줄 태세를 취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취하다, 결국 이 자리가 어떤 형국으로 흘러갈 것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종무식 때문이었다. 종무식이란 한 해를 정리하는 행사가 아닌가. 그 회사에서 내가 5년 넘게 지루하게 펼치던 의례적인 행사가 아닌가.


회의실 바깥, 그러니까 투명한 벽 건너편에 대표의 자리가 보였다. 대표는 비교적 온화하고 편안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검토 중이었다. 그가 검토하는 것은 회사의 실적 자료이거나, 차년도 영업팀의 예상 매출 자료이었으리라. 아무튼 그 대표는 그 자료를 꽤 심각한 표정으로 검토하는 중이었는데, 양쪽 입가가 위로 치켜 올라간 것으로 판단했을 때, 회사가 비교적 안정적인 재정 상태를 취할 것으로 보였다. 현실에서는 쉽게 관측하기 힘든 그런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그러다, 그는 자리를 옮겨 회의실 안쪽으로 이동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리에서 부드럽고 침착하게 일어서서, 노트북 덮개를 천천히 덮고, 다시 오른손으로 의자를 뒤로 슬며시 밀어두곤 책상 위의 문서 꾸러미를 소중하게 착착 정리하곤 회의실 쪽으로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회의실 안으로 진입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마치 중세 시대 성기사단들이 아서왕을 영접하는 광경과 꽤 흡사했다. 그 순간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꿈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조각난 단편들이 여기저기 얽히고설켜있다가, 레고 블록 조립하듯이 통일성을 갖게 되지만, 그것은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 그러니까 꿈의 당사자의 해석 능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쓰기 능력에 달려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지금 이 순간 꿈을 재조합한다. 그 꿈이 사실일지 아닐지, 아니 어차피 꿈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창조해낸, 가상의 영역을 들춰내는 일에 불과하다.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꿈을 기록하는 사람의 일이다.


상황이 웃긴 것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녀석 때문이었다. 그 녀석은 나와 과거에 같이 일하던 시절에 내 공을 가로챈 바로 그 문제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전 직장에서 일하던 나는 늘 겸손하려 애썼다. 겸손한 것이야말로 직장 생활에서 오래도록 내가 지켜오고자 했던 핵심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낸 일도 주변 사람의 덕으로 돌렸다.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물심양면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지만 실제 일을 해낸 것은 나였다. 아이디어를 만든 것도 기획을 한 것도, 제안서를 쓴 것도 발표를 한 것도 나였다. 그런데 나는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빛내주면 나 역시 빛날 거라 기대한 것이었다.


현실은 냉혹할 정도로 내 기대를 배신했다. 주변 사람을 빛내주면 그 빛은 그 사람들에게만 조명됐다. 어느 순간 나는 까맣게 지워졌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 인물 3 정도 취급을 받았다. 그러고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겸손하게 굴어도 언젠가 나의 실력을 알아줄 거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다려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게 직장이란 곳이 가진 속성임을 내가 주변인이 되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그런 얌체 같던 녀석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옆자리로 접근한 것이었다. 나는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또 무엇을 뺏어갈 것인지, 이제는 절대로 당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꿈속에서도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 의식이 점차 흐릿해져 간다는 걸 직감했다. 꿈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 번 균열이 시작된 꿈은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한 번 뚫긴 구멍은 급격하게 자신의 규모를 확장한다. 마멸되어가는 세계가 지니는 속성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자리를 떠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기회는 찾아왔을 때 포착해야 한다. 놓치면 절대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꿈속에서도 비겁한 선택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회피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구나, 오랫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패턴대로 나는 꿈속에서도 같은 짓을 반복하는구나,라는 생각.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굴레였다. 그 직장에서 내가 톱니바퀴 구성원의 하나였던 것처럼 의식 없이 일했던 것처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행동하는구나,라고. 그래서 나는 마음을 돌렸다. 경주 카가 급격하게 좌회전을 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마음을 돌렸다. 급격한, 그러니까 예측하지 못한 일종의 돌발행동이었다. 나도 내 옆자리에 슬쩍 다가온 녀석도 모두가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가방을 움켜쥐고 열린 지퍼 사이로 튀어나오려 하는 온갖 물건들의 원성을 잠재워버렸다. 그냥 틀어막아 버렸다.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던 것처럼 나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뒤집어쓴, 나의 거짓 욕망을 갑옷으로 착각하고 가방 속에 들어찬 그 울분들과 원망을 잠재워버렸다.


그 이후 세계는 비교적 온화해졌다. 불순물도 탁한 공기도 없었다. 생각과 달리 꿈속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정리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음 하나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꿈속이라도 한들, 그렇게 단 한순간만에 기류가 드라마틱하게 변경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꿈속의 세계를 그대로 적어 내려가고 있다. 지금 내가 쓰는 방식은 억지로 다시 장면을 재현하려는 것도 아니며, 없는 이야기를 사실처럼 꾸며대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사실적으로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왜 꿈속에서 나는 지독하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들과 가장 혐오했던 공간에서 함께 해야 했을까. 그 시간이 1시간인지, 1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꿈속이라고 해서 그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은 아니다. 꿈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지금도 어떤 장면은 너무나 생생할 정도로.


나는 그 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특정 장면들이 더 흐릿해지기 전에, 장면들이 회복 불능한 필름 같은 것으로 변하기 전에, 그것들을 살려놔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내 과거가 의미를 찾고, 그 의미들에서 더 나은 의미와 통찰력을 얻어낼 것이며, 그것이 앞으로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지배할 것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꿈이 던진, 말하자면 무의식의 세계를 내 방식대로 해석한다. 아마도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될지도, 어떤 에피소드는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어쩌면 어떤 이야기는 요긴한 정보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생산성 정리 컨설팅이라는 나머지 내 인생의 방향을 정립했다. 그 방향에 맞게 나는 과거 인생을 재해석하고 나에게 왔던 사건들에게 다른 의미를 전달하련다. 할 이야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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