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1분 이내 요약이라. 내가 인공지능 회사에서 새로 출시된 최신 번역기도 아닌데, 1분 이내로 그간 벌어진 일을 모두 요약하라니,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무성 영화의 친절한 성우처럼 차근차근 하지만 최대한 핵심만 간추려서, 그간 내가 직장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건, 그리고 Y대학교에서부터 김대리의 집을 침범하기까지의 과정과 성수대교를 야밤에 건너가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일,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된 내 집을 거쳐서 여기 남해까지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니 아쉽게도 당초 계획한 1분 이내 주파엔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5분 내 끝낸 것에 가치를 두고 싶었다.
연희는 굉장히 집중한 나머지, 재미있는 이야기 연못에 빠져버린 요정처럼 넋을 잃고 있다가, 내가 손뼉을 짝 하고 치자, 깜짝 놀라며 현실로 겨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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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재미없는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들어요?”라고 내가 의뭉스럽다는 반응을 보이자, 연희는 두 손으로 턱을 감싸고 아주 슬픈 동화를 들은 공주처럼, 당장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듯한 동그란 눈으로 내 눈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곤 “그렇군요. 그래서 그 집에서 도망치듯 튀어나와 여기까지 오게 된 거군요. 근데 갈 곳은 정해놨어요? 결국 오늘 여행도 즉흥적으로 선택한 거잖아요.”라고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 같은 자세로 말했다.
“솔직히 정해놓은 건 없어요. 키오스크 앞에서 충동적으로 남해를 선택하긴 했지만, 일단 거기까지 가보자, 가보고 나서 그 후의 일은 나중에 선택하자고 생각했죠. 어쩌면 바닷가 백사장 앞에 앉아서 모닥불이나 피워놓고 바다멍쯤에 시간을 소비하다 아무데서나 누워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죠.”라고 말하자 연희는 “그러다 입 돌아가면 어쩌려고 해요? 아무리 봄이 지나서 이제 5월을 넘어선다고 하지만 밤에 바닷가 옆이 얼마나 기온이 떨어지는지 몰라요? 이분 겁 없네 아주 겁이란 걸 상실한 남자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연희는 아주 큰 동작으로 주변에 돌아다니는 공기를 모두 끌어모은 다음, 그것들을 한꺼번에 배출이라도 하는 듯이 커다랗고 길게,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 노련한 수영선수처럼 숨을 아주 기다랗게 내뿜었다. “휴…”
“근데 제안서는 왜 안 쓴 거예요? 개발자는 글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뭔 사람이 그리 싸움을 할 줄 몰라요?” 연희가 베테랑 형사처럼 취조하듯 말했다. “아뇨 제가 원래 김대리와 싸워보려고 플라자 호텔에 찾아가서 BMW 컨버터블 앞에 드러눕기까지 했다니까요? 그리고 녀석의 안방에까지 침투에 성공한 사람인데…”라고 나의 반항 연대기를 순서대로 나열했다. “아니 그런 물리적 싸움 말고요, 상대방이 싸움을 걸어오면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죠. 왜 도망쳐요? 도망치면 문제가 해결돼요? 김대리가 사과라도 걸어와요? 제안서 쓰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걸 안 했어요.” 연희는 답답한 마음이라서 그런 건지 마치 속으로 “야이 한심한 인간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제가 현직 기자 아닙니까.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게 제안서, 보고서, 기획 기사 이런 것들이에요. 민석씨 개발자라고 했죠? 우리 회사 개발자들 보면 그렇게 존경스럽더구먼, 사실 코딩에 비하면 제안서 작업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까 언급한 기계적인 매뉴얼 작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요. 옆집 사는 5세 훈이도 하는…”
“글쓰기에 기-승-전-결, 서론-본론-결론 이런 구조가 있다는 건 잘 알죠? 그다음에 제안서에는 주제가 있죠? 주제와 딸린 소주제가 있고요. 그런 것들을 정리해놓고 그다음엔 목차를 작성하겠죠. 목차는 이미 제안요청서에 나와있어요. 사업 배경부터 시작해서 기획의도, 목적, 내용, 사업성, 뭐 이런 내용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죠. 이런 구체적인 내용은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고요.”
“Top-Down, 폭포수 구조. 개발자니까 이런 용어에 익숙하시죠? 제가 어떻게 이런 걸 아냐고요? 제가 IT 잡지가 기자인데 이 정도 용어도 모르겠어요? 사람 무시하지 말 것!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 우리 이야기했죠? 아 맞다 폭포수 이야기했죠? 폭포수 이야기하는데 왜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또 옆길로 새 버렸네요. 미안, 그냥 그 장면이 떠올라서요. 하여튼 제가 엉뚱한 이야기를 자꾸 던지고 있는데요. 제가 말하면서 정리하는 타입이라 이해 요망. 그러니까 폭포수 모델의 핵심은 먼저 핵심 주제를 하나 정해놓고 점차 세부적으로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개념이잖아요. 제안서 작성도 똑같아요. 처음에는 추상적이지만 어쨌든 커다란 주제를 정해놓으면 사람의 머리란 것이 자동적으로 세분화, 정리 작업을 하게 되어있다 라는 거예요. 그냥 정리하며 쓰기만 하는 건데. 민석씨는 주제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GG를 친 셈이네요”
“아니 그런 건 어떻게든 정하겠죠. 그런데 쓰는 건 어떻게 해요. 저는 코드만 작성해봤지 글쓰기는 영... 전 집에서 다림질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인데요”라고 내가 말했다. “어렵죠. 알아요. 제안서 쓰기, 글쓰기가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니까요 민석씨 정말 힘드셨을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죠.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어렵다고 해본 적 없다고 손 들었단 말이에요? 그냥 냅다 수건 던져놓고 상대방이 네가 졌다,라고 손 내려주길 기다렸다는 거잖아요.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서점에 가서 혹시 잡지 같은 거 뒤적거려봤어요. 이달의 기획기사, 특집 이런 거 들춰봤냐고요. 기자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전문가들의 글쓰기를 공부해봤어요? 안된다는 생각만 하니까 머리도 이미 결정해버린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절대 글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바보다, 이렇게 정의해버린 겁니다. 그런 사람을 민석씨 같으면 신이 도와줄 것 같아요? 아효 답답해 정말.”
그녀는 폭주하는 열차처럼 끊임없이 발언이라는 것을 토해냈다. 나는 연희의 이야기를 듣다, 도저히 소화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정보의 홍수를 손으로 막고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말은 연희씨처럼 쉽죠 연희씨는 그 일을 오랫동안 해왔으니 쉬운 거예요. 제가 노트북 한 대 주고 파이썬으로 자동화 프로그램 만들라고 하면 당장 짤 수 있겠어요?라고 과제를 냅다 던져주는 것과 뭐가 달라요.”라고 내가 나름 멋진 비유를 해낸 것 같은 우쭐함에 사로잡혀 말했다.
연희는 한심한 눈초리로 논리 싸움에서 승리해서 참 좋겠네, 라는 곱지 못한 시선으로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속에서 불타오르는 울화를 다스리기 위해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잠시 후, 폭탄선언을 했다.
“우리 집으로 일단 갑시다. 저 남해 독일마을에서 혼자 살아요. 외로운 여우랄까요 일단 남자를 재워놓고 간을 몰래 빼먹는 호호호”라고 침착하지만 비교적 하이톤의 말투로 정적을 무너뜨렸다. “헉, 외로운 여우라니 그럼 저는 늑대여야 하나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쌩판 모르는 남자를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끌어들이겠다는 얘기잖아요? 제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요?”라고 내가 말했다.
연희는 나를 더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며 “저도 그 정도 견적은 낼 줄 알아요. 저 바보 아니라고요. 자 빨리 갑시다. 가서 민석씨가 겪은 사건사고를 회고해보고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해 봅시다. 하, 오늘 오지랖 좀 오래간만에 부려야겠네.”라고 자기 사정을 챙기는 데 주력하는 것보다, 남의 사정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인류적인 태도로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남해 던전, 아니 남해 시외 터미널에서 문을 열고 나오니 연희가 또 어깨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걸었다. “뭐해요? 택시 안 부르고? 빨리 불러요.”, “택시요? 저기 택시비는 누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아니 우리 집에서 공짜로 재워준다는 데 지금 택시비가 문제예요? 남자가 말이야, 쩨쩨하게 말이야. 빨리 불러요. 여기 택시 잡기 쉽지 않아요.”
나는 소심하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택시를 불렀다. 나는 맵 서비스에서 제안한 예상 금액을 확인하곤 크게 놀랐다. “이거 20분 걸리는데 택시비가 뭔 2만 5천 원씩이나 나와요?”라고 따져 묻자, 연희는 연속으로 어이를 상실했다는 표정으로 그러려면 당신은 걸어가고 자신은 버스를 타겠다고 어깃장을 부리려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방금 했던 말을 금방 취소해버렸다.
다행히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도 택시는 쉽게 잡히나 보다. 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택시 한 대가 비교적 침착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연희는 눈으로 내가 먼저 탑승하라고 눈치를 준다. 음, 이런 건 레이디 퍼스트가 국룰 아닌가.
세상에 25분이면 올 거리를… 내 피 같은 돈 2만 5천 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말았다. 연희는 우쭐한 표정으로 택시에서 내린 후,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로 마을 입구에 서서 언덕배기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더니 “올라가요”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하더니 아침에 조깅을 하는 사람처럼 날렵하게 몸을 옮겼다.
영락없이 연희의 집일 것 같은 아담한 단독주택 앞에서 연희가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곤 뭔가 잠시 궁리라도 하는 듯했다. 여자만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인다는 게 보통 문제는 아닐 터,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자라니. 나는 이상한 기대감에 심취한 바람에,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이 언제 나올까 기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영혼을 어딘가에 팔아버린 기분도 들었다. 연희가 문을 따자마자, 나는 그녀를 뒤따라 안쪽으로 진입하려 했는데,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예요?”라고 연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멀뚱 그녀의 분위기를 살폈다. “민석씨가 머물 집은 여기가 아니에요. 그러더니 연희는 또다시 그 가늘고 기다랗고 흰 손가락 끝으로 다른 집을 가리켰다. 그 집은 흰 벽돌로 담을 두르고 지붕은 피라미드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벽은 비교적 최근에 하얀 페인트로 도배를 했으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건지,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 있고 색깔은 회색으로 바래져 있었다.
“설마 민석씨와 제가 한 집에서 지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여기서 라면 얻어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요. 가만히 있어 보자, 예약 시스템 확인 좀 해볼게요. 마침 저 A동은 오늘 예약이 없네요. 성수기도 아니니까 제가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해 드릴 테니.(아까 공짜라더니...) 계시는 동안 편하게 쓰시다 가시면 됩니다. 결제는 선불로 할까요? 후불로 할까요? 카드 주세요.”
나는 뭔가 이상한 사기단에 걸려든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내 주변엔 믿을 만한 구석을 가진 인간이 하나도 없다. 어이없었지만, 여기서 딱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 나는 거의 울면서 한도가 얼마 남지 않은 카드를 연희에게 내밀었다. 그랬더니 연희가 쾌활하게 웃으며 “호호, 아니 제가 진담으로 그러는 줄 아셨어요? 돈을 받긴 왜 받아요. 저 그렇게 장삿속으로 사는 인간 아니에요. 장난 좀 쳐봤는데, 민석씨 진짜 순진하시다. 카드 빨리 넣어 두세요. 마음 변하기 전에요 호호. 싫증 날 때까지 계셔도 되니까요. 실컷 지내셔도 됩니다. 그리고 짐 정리하고 좀 씻는 게 어때요? 아까 옆에 앉아 있을 때, 뭔 홀아비 같은 냄새가 올라와 가지고…”
나는 흠흠 하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후 윗도리를 들추곤 냄새를 맡아봤다. “또 속네 또 속았어, 냄새가 나긴 무슨 냄새가 나요. 이 분 진짜 안 되겠네. 아니 남자가 무슨 말 한마디에 그렇게 허망하게 말려들어요. 이분 멘털이 거의 초절정 크리스털 급이네. 아니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30년 가까운 인생을 혼자 살아온 거예요?”
“죄송합니다.”라고 나는 부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하곤 그녀가 가리키는 오른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연희가 뭐라고 뭐라고 몇 마디 더 추가했지만, 피곤했는지 거의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연희가 뒤늦게 달려오더니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포스트잇에 비밀번호를 적어줬다.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는 연희가 열어준 현관문을 반 정도 열고 안쪽을 살펴봤다. 인테리어는 비교적 무난했다. 2인용 소파와 작은 티브이, 그리고 두 칸짜리 싱크대, 깔끔한 화장실과 욕조, 볕이 잘 드는 테라스, 그것이 그 오래된 흰 집의 소박한 장점이었다. 나는 백팩을 소파 위에 대충 던져놓고 씻는 것은 일단 단념하고 안방 침대 위에 몸을 던저버렸다. 그리고 혹시 이 집도 김대리가 찾아와 박살 내버리는 것은 아닌지 짐짓 걱정하다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잠이 든 나는 또다시 3일을 내리 자고 말았다. 영원히 잠드는 마법에 걸린 숲 속의 공주처럼…
눈을 떴을 때, 연희가 침대 맞은편에 앉아서 측은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거라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 위에 쓰러진 모양, 마치 붕어빵 틀에서 막 구워낸 그것처럼 그대로 누워있다 일어났을 뿐, 기대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간 것일까. 시간을 겨우 인지했을 때, 지난번 회사에서 퇴사한 이후와 마찬가지로 3일이 경과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난 혹시 지독한 잠병에 걸린 건 아닐까. 이러다 3일이 30일이 되고 30일이 다시 300일이 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은 가벼웠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 이방저방 가볍게 날아다닐 기분이었달까. 침대에서 사뿐하게 일어나 꽃을 찾아 나서는 나비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달라진 건 3일 전과 비교해도 딱히 없었다. 이곳은 연희가 최초로 안내해준 펜션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집을 구축하고 있는 구조적인 질서도 외관의 형식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다. 다행히도 김대리의 영향권에서는 거의 벗어난 듯했지만.
이런 상상을 해봤다. 나는 세기말, 좀비들이 득세하는 도시의 폐허 속에 홀로 버려졌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 보니, 나 혼자 병원에 누워있던 것이다, 그래, 미드 '워킹 데드' 각본 그대로다. 난 이 세상에 살아남은 고독한 생존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독한 갈증이 몰려왔다. 공중엔 외로움의 불순물만 둥둥 떠다니는데, 심지어 그 분자들도 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느낌.
그런 지독한 외로움에 집착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는 침대 옆, 벽 모서리에 얌전히 놓인 야구 방망이를 발견했다. 저것은 왜 저기에 놓여 있는 걸까. 저 방망이는 꽤 하루키적으로 생겼다.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그 방망이가 아닌가. 무심결에 방망이를 들고 손잡이 위에 칭칭 감아놓은 검은색 테이프 부근을 꽉 잡았다. 누구든지 걸려봐라, 이제는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 이렇게 분노 게이지를 최대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저예요. 연희예요.” 나는 그제야 방망이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짧은 탄식을 풀어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대충 보기 좋게 정리해놓고 현관문을 반쯤 열었다. 연희를 집안으로 들이는 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만 전하면 된다. “저 괜찮아요. 잠을 오래 잤나 보네요. 제 요즘 특기가 오래 자는 건데요. 3일 동안 자는 게 어느새 리추얼이 되고 말았네요. 좀 씻고 나서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말하곤 문이 만든 틈을 없앴다.
바깥쪽에서 “알았어요”라고 다소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여운처럼 들려왔다.
연희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욕실로 몸을 이동시켰다. 3일 동안 내리 잠만 잤으므로 내 몸에 굳어버린 몹쓸 패배의식 따위들부터 깨끗하게 씻겨야 할 것 같았다. 내 피부에선 녹슨 기름 찌꺼기 같은 것들이 끝없이 바스러져서 하수구로 쓸려 들어갔다. 내가 마치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 번의 샤워로 나를 차츰 이전의 정상적인 나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샤워 따위는 천만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건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했다.
샤워를 끝내고 대충 집안을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소파에 앉으니 연희가 어떻게 알고 타이밍에 딱 맞게 찾아왔다.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똑똑 문을 두드리고 내가 반응하기를 기다린 후, 자신감 있게 문을 박차고 안쪽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배 안고파요?” 연희는 이렇게 말하더니 등 뒤에 감춰둔 커다란 바구니를 마치 깜짝 생일 파티처럼 공개했다. 그 안에는 복숭아, 자두, 사과, 옥수수, 감자 이런 류의 작물들이 가득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 허기를 달래줄만한 음식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실망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서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라고 연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 원래는 죽을 드셔야 정상이죠 하지만 제가 민석씨 여자 친구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준비하는 건 좀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그냥 제철 과일과 텃밭에서 열매를 조금 챙겨 왔을 뿐이에요. 일단 찐 감자부터 조금씩 드셔 보는 게 좋겠어요. 탈 나면 또 번거로워지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3일 동안 잠만 잤으므로 사실 가마솥을 누룽지처럼 씹어먹을 정도로 배고픈 게 정상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3일 동안 몸만 잠을 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 몸을 구성하는 모든 기관들도 일순간에 정지되었다가 정신이 깨어났을 때, 동시에 작동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추측될 정도였다.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여기 두시면 제가 나중에 챙겨 먹을게요”라고 말했다. 연희는 정색하며 뭔가 할 말을 가슴에 잔뜩 품은 사람처럼 토해내려 했다가 이내 포기하는 눈치였다. “알았어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저한테 연락하려면 이 번호를 이용해 주세요. 집으로 불쑥 찾아오지는 마시고요.”라고 하며 쪽지를 한 장 건넸다. 나는 알았다고 말하며 연희가 건넨 쪽지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연희는 눈인사를 가볍게 전하고 들어온 동작과 반대로 문을 열고 돌아갔다.
나는 그 이후 며칠을 연희의 집에서 묵으면서도 연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의도적인 행위였다. 연락하는 것과 연락하지 않는 것 모두 내 선택이다. 다만 어쩌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될지도 모를 그런 긴장된 감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어쩌면 나는 연희와 힘 싸움을, 주도권 싸움이란 걸 모색하려고 시도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연희의 집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침대를 정리하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오전을 보낸 다음, 점심으로 고구마 한 개와 복숭아 한 개를 먹고 다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연희는 귀신 같이 내 집으로 찾아와 고구마와 감자를 같이 먹었고 때로는 옥수수도 나눠 먹었다. 마지막으로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오면 우린 노트북으로 좀비나 하수구에 사는 끔찍한 괴물이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를 같이 보며 비명을 질러댔고, 10시가 되면 나는 잠을 자야 했으므로 아쉬워 하는 그녀를 억지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녀가 돌아가면 나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고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3일 동안, 어쩌면 거의 한 달을 그렇게 살아가며 거의 비슷한 패턴을 매일 반복했지만 지루함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 패턴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