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환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우린 잠시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다시 어색한 침묵 속으로 융해됐다. 여자는 여자의 노트북으로 나는 앞자리에 앉은 남자의 뒤통수로 서로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몇십 분을 흘려보내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곳에는 여자가 그토록 좋아한다던 드라마가 한철 여름 매미처럼 우렁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여자가 즐겨하는 드라마에 잠시 빠져 보려고 노력했으나, 드라마보다 나는 내 인생의 보잘것없음과 서울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다며 도피행각을 벌인 나 자신의 비겁함을 비판하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버스는 남해 시외버스 터미널에 진입하는 중이었고 여자는 노트북을 내 의자 앞 받침대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곤 내릴 채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머뭇거리던 나의 의식을 흔들어댔다.


“안 내려요? 터미널에 도착했어요”

“내려야죠. 네.”


나는 선반 위에서 백팩을 느릿느릿 꺼내고 노트북과 케이블을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그리곤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아무런 계획조차 마련된 게 없지만, 미리 일정을 완벽하게 짜 놓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한편으론 여자의 눈치를 슬슬 살폈지만.


여자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민석씨 잘 있어요. 넷플릭스 잘 봤어요.”라고 말하며 앞문으로 향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서 한쪽 어깨에 백팩을 짊어진 채, 여자의 뒤꽁무니를 슬금슬금 따라갔다. 나는 마치 여자를 미행이라도 하는 듯이 뒤쫓아갔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분명 나에게 '잘 있어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에 다른 클리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암호화된 상징 같은 것이 숨어 있고 나는 그것을 반드시 내 힘으로 번역해 내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쭈뼛하게 그 여자 뒤에 서서 “저기요? 연희씨”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날렵한 청새치처럼 “제가 신세도 졌으니 차라도 한 잔 살까요?” 라고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마치 떡밥이라도 던지듯이… 하지만 그 말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인사치레로 건네는 그런 흔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약간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그랬더니 연희는 “뭘 그렇게 놀래요? 여자하고 차 한 잔 마시는 게 100만 년 만에 경험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도 되는 거예요? 뭔 초등학교 여자아이한테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받는 아이처럼 감격스럽게 쳐다봐요? 사람 무안스럽게” 그러더니 여자는 내 팔을 툭 치고 재킷 한쪽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끌고 나갔다.


우리는 터미널을 통과해서 카페를 찾으려고 했지만 바깥에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횅한 도로뿐이었다. 커피를 마실 만한 곳이라고는 터미널 내에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뿐이었다. 연희는 당당하게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딸기 치즈 아이스크림 작은 컵을 하나 주문하곤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래 카드를 꺼내라는 얘기다. 이런 눈치는 내가 원래 빠르다. 아니, 아까는 신세 졌다고 차 한 잔 산다더니 이건 또 뭔가. 그러자 연희가 마치 내 눈치를 읽었다는 듯이, “내가 차 한 잔 산다고 했지 아이스크림 산다고는 말 안 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내고 거의 한도에 다다를 거라고 짐작되는 카드 한 장을 건넸다. 다행히 결제 승인이 나고 성인 두 명이 와서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문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것 같은 아르바이트생의 눈초리를 피하여 횅댕그렁한 카페 정가운데 좌석을 잡았다.


“우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연희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우연이라면 이 거대한 천체라는 세계와 그 천체가 속한 거 거대하고 육중한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의 수학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거의 0에 가까운 생명을 얻은 인간의 우연을 얘기하는 건가요?” 내가 심오한 철학자처럼 말했다.


“그렇게 매번 과학적으로 수치적으로 뭔가 아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배부른 돼지처럼 생긴 철학자처럼 말해요? 뭘 자꾸 공대생처럼 계산만 하려고 들어요? 특히 예쁜 여자와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그래요? 여자와 별로 사귀어 본 적 없죠? 모태 솔로죠? 민석씨.”


나는 여자의 당돌한 질문에 대해 다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런 사소한 한 마디에 감정을 발산하는 행위가 나의 품위와 격조를 떨어뜨리는 짓이라 생각이 들어 겨우겨우 화를 달랬다. 감정은 감당하기도 힘들고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답변하려 들어요. 민석씨는 질문에 대해 늘 잘 들어맞는 답변을 찾으려는 사람 같아요. 지금 사각형 큐브를 하나 들고 그것에 딱 들어맞는 큐브를 찾아 그것에 정확하게 끼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같아요. 꼭 정확하게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곳에 끼워 넣어야 성미에 맞아요? 조금 비어 있으면 어때요. 조금 크면 어떠냐고요. 다른 큐브를 그 빈자리에 채워 넣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왜 자꾸 똑같이 생긴 녀석만 찾으려고 해요? 민석씨는 그렇게 경직된 사람이에요?”


“음.. 아.. 흐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딱 들어맞는 큐브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큐브를 들고도 과연 거기에 놓아도 되는지 계산이 제대로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심각병에 걸렸네요 민석씨.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요. 우연이라는 게 별거인가요? 터미널에서 민석씨가 저를 따라서 티켓을 발권한 것처럼, 또 저를 따라서 여기 남해까지 오게 된 것처럼 또 이렇게 우리가 오손도손 앉아서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나눠먹게 된 것처럼, 그저 모두가 우연의 결과라고요. 작은 사건이 큰 사건을 낳게 될 순간을 우린 함께 겪고 있는 거라고요. 무슨 우주고 생명이고 유전자를 찾아요. 그냥 남녀가 만나서 커피 마시는 것뿐인데요”


“우리가 마시는 건 커피가 아닌데요… 그리고 전 유전자를 언급한 적이 없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연희는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남녀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조용한 카페와 달콤한 커피가 떠오르는 건 거의 기본이잖아요. 우린 그냥 남녀가 어느 순간에 만나서 그 시간을 함께 헤쳐나가는 경험을 공유 중인 것뿐이라고요. 앞이 보이지 않는 아마존 숲을 무딘 칼로 개척하며 길을 만들어가는 가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군요. 우린 아마존 밀림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셈이로군요.”


“민석씨 얘기가 듣고 싶어요. 민석씨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민석씨 안에서 시작된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민석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라고 연희가 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왜 이곳 먼 남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한반도의 남쪽까지 다다르게 된 걸까. 여기 아이스크림 가게에 앉아 있는 나와, 그동안 내 삶속에 존재했던 모든 나는 전혀 별개의 나일까. 내 영혼이 어딘가를 통과해왔으나 그것들은 모두 붕괴되고 현재는 그저 가죽같은 것들만 남은 것에 불과할까. 어쩌면 나는 방향을 잃거나 제대로된 방향을 찾아가야할 감각마저 모두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는 이전에 내가 알던 나로, 내가 원하는 나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저는 말이죠. 흐음. 뭐라고 저를 표현해야 할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저는 존재감을 잃은 사람같아요. 말하자면 갈곳을 잃은, 그리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완전히 망각해버린 그런 무의 상태라고 봐야겠어요”


“말이 좀 어렵네요. 하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민석씨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요. 우린 이미 많은 걸 어딘가에 놓아두고 떠나는 편이지만, 그 자리를 좀체 찾아가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그 문제는 민석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인류적으로 고통 받는 공통분모에 해당되는 문제라는 거죠”


“민석씨, 저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매로 물었다. “글쎄요. 버스 안에서 말씀하기로는 잡지사에서 글을 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글쎄요. 기자라는 직업,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게 제 정체성을 설명해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서 저를 설명할 때, 쉽게 저는 제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 편이죠. 이 명함에 각인된 몇 글자들처럼요.”


연희는 나에게 하얀 명함을 건넸다. “김연희” 라는 이름이 정가운데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 정보외에는 연희라는 사람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해석하는 게 불가능했다. 나는 그 명함 하나만으로는 연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할 뿐이다. 마치 옛 선인들이 가진 여백의 운치같은 건 느껴졌지만…


“이상하네요. 어떻게 명함에 이름만 찍혀있는 거죠? 이렇게는 제가 연희씨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겠는데요?” “왜요? 저에게 연락하고 싶어졌어요?”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연희에게 아무런 호기심조차 없었다. 그저 신기했고 요란스러우면서도 말랑말랑한 그녀의 태도에 잠시 물들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그게 전부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어도, 내 색채를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함께 묻어갈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에 잠시 기분이 고양되고 만 것이다.


“저는 회사에서 기자로서 일하고 있어요. 기자는 물론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죠. 다만 내가 아닌 타인, 즉 회사라는, 어떤 구체성을 띠지는 않지만 목적을 가진 추상적인 대상을 위해 글을 쓰죠. 그렇다고 저를 대표하는 본질이 회사라는 건 아니에요.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업이라는 의식이 저를 대표하지는 못하죠.”


“뭐랄까, 저는 저 자신을 대표하는 수단을 이렇게 가정해봐요.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는 무작위성이라는 법칙이 지배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가능성은 어쩌면 0%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계획된 게 없으니까, 어쩌면 0은 100이 될 수도 있어요. 제가 설정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저는 그래서 그런 무작위성과 변칙성, 불규칙적인 걸 아주 좋아해요. 흐름에 따라가며 정처없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또한 흐름에 편승해서 같이 무의미하게 굴러가는 게 아니라, 옆길로 새고 또 옆길에서 다른 옆길로 연달아 새는 걸 반긴다는 거예요. 다만, 그 옆길은 제가 주도합니다. 변칙성이라는 변주에 묘한 규칙성을 함유시키는 거죠.”


“아, 명함, 왜 이름만 새겨져 있냐고 물으셨죠? 정해진 틀은 식상하고 재미없잖아요. 그런 건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요. 정해진 틀 같은 것,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러니까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자갈돌 같이 생겨먹은 명함은 그냥 재미없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매뉴얼 같은 거예요. 민석씨 개발자라고 했죠? 매뉴얼 자주 다루시겠네요. 매뉴얼 볼 때, 막 호기심 같은 게 생기던가요? 그거 작성할 때 막 창의력이 발동되나요? 읽을 때는, 어떤 순수한 이미지가 마음에 착상되어서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하고 그래요? 민석씨 그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고 그것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라고 연희가 약간 따져묻는 듯했다. “저 매뉴얼이라면 딱 질색인 인간입니다. 매뉴얼 따위는 만들지도 않고 읽지도 않습니다. 저는 개발자거든요. 오직 코딩으로 승부합니다.”


나는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연희씨의 명함을 받았다고 치죠. 지금 받았으니까 질문할 자격은 있죠? 만약 연락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요? 직접 물어보고 요기 흰여백 어딘가 예쁘게 적기라도 해야 하나요? 그럼 높은 점수를 받는 거예요?” “맞아요. 그거죠. 지금 저에게 연락처 물어보셨죠? 그럼 그거 머릿속에 한 번 기입하고 다시 직접 손으로 기록하는 겁니다. 형식적으로 인쇄된 연락처가 가진 의미보다는 덜 구조적이고 다소 수고스럽긴 하지만, 직접 손으로 기록하는 게 더 기억에 오래남지 않겠어요? 저 김연희라는 사람이 더 오래 민석씨 머릿속에 각인될 거 아니냐고요. 저는 그걸 노린 거예요. 장면의 특성을 이용한 거라고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자 연락처를 불러 주세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실 그녀의 의견이 말장난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설득되는 면이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명함이란 것은 사무적으로 주고받고 서랍한구석에 방치되었다가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그녀의 방식처럼 진정으로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연락처는 이메일이든 물어보겠지. 기회를 만약 놓친다면 다시 연락할 방법은 없다. 나중에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저 민석씨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어요. 민석씨처럼 투덜거리는 사람의 속마음이 전 늘 궁금했거든요. 특히 제가 업무적으로 자주 부딛히는 사람들은 죄다 문과생 출신들이라 이과생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요. 그런 제가 속하지 않은 세계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연희가 말했다.


“게다가 말이죠. 지금 이 휴가 시즌도 아닌 시기에 남자 혼자서 남해로 여행을 선택했다? 분명 말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평범하지 않은 케이스 잖아요. 그 이유를 1분 이내로 요약해서 한 번 말해봐요. 민석씨 저 바쁜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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