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산책과 복귀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예정에 없던 산책에 나섰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독일마을 주변을 간단하게 관광이라도 시켜주겠다는 연희의 결연한 의지 때문이었다. 뭐, 굳이 마을 관광까지 시켜줄 필요까지 있겠나 싶어서 나는 “동네가 다 비슷비슷하지 않나요? 대충 살펴보니 흰 페인트를 발라놓은 곳이 대부분이더만요. 그렇다고 여기가 크레타섬이 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조르바처럼 단정적으로 말하자, 연희는 눈을 흘기며 여긴 크레타도 아니고 나폴리도 아니라며 그런 소리 하려면 당장 그동안 탕감해준 집세를 모두 지불하라고 따질듯한 기세였다. 난 그 기세를 침묵으로 일갈하고 말았지만.


우린 차 한 대가 지나갈만한 꼬불꼬불한 길을 거쳐 독일마을의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 왼쪽으로 굽은 길을 올라서면 또다시 오른쪽으로 굽은 길이 나타났고 올라가면 역시 반대의 길이 계속 나타났다. 거의 모든 집들이 하얀색으로 페인트 칠을 했고 지붕은 주황색 벽돌이 삼각형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포개져 있었다. 작은 울타리와 낮은 관목을 사이로 어떤 집에서는 주인 없는 진돗개가 하연 거품을 물고 짖어대며 고요를 요란하게 찢어댔다.


“이 동네의 개들은 저에게도 불친절하지만 연희씨에게도 만만치 않네요?”라고 내가 말하자, 연희는 “그러게요 제가 간헐적으로 이곳에 내려오니 애들이 낯설어하나 봐요.” 멋쩍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우리를 불청객 취급하는 반갑지 않은 진돗개 무리를 거쳐서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곳, 그러니까 정상이라는 곳에 서니, 신기하게도 동네가 나름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온 동네 집들이 마치 초록의 바다 사이를 떠다니는 작은 돛단배처럼 보였다.


“멋지네요. 독일마을. 독일마을은 한집 한집 구경할 게 아니라 전체로서 조망하는 게 중요하군요. 이게 독일마을의 멋스러움이로군요.” 내가 이렇게 칭찬하듯 말했다. “사람들은 이국적인 걸 선호하는 편이죠. 낯선 것을 반기기도 하고요. 낯선 생태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그들만의 몸부림이겠이죠. 민석씨는 어때요? 이런 그림 같은 마을에서 평생도록 산다는 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나는 딱히 그런 포레스트적인 상상을 해본 적은 없다. 지금 연희가 건넨 말속엔, 내가 언젠가 이 마을에서 연희와 평생토록 살게 된다는 그런 의미심장한 메시지,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단단하게 잡으라는 신호로 해석해야 하는 건 아닌지, 다소 앞서가긴 했지만,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석씨, 제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민석씨에게 도움을 줄 만한 분이 서울에 계신데요, 그분께 조언이나 코칭 같은 걸 받아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분을 한 번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음, 도움이라면? 어떤 종류의 도움일까요? 딱히 제가 도움이란 걸 받아야 하는지 그런 필요성 따위를 느껴본 적이 없어서 갑자기 뜬금스럽긴 하네요.” 나는 물론 도움이 필요하긴 하다. 다만 어떤 종류의 도움이 나에게 요긴할지 알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절실하게 다가왔다.


사실 우린 버스에서 만난 인연일 뿐인, 그러니까 쌩판 모르는 타인인 연희에게 이렇게 숙식을 제공받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받아보라니, 사실 내가 이런 걸 마다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의심스러웠다. “연희씨,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갑자기 긴장하게 되네요 호호 설마 고백 비슷한 거 하려는 건 아니죠? 전 아직 준비가 덜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고백이거든 다음에, 조금 더 우리가 진전된 사이가 되면 그때 해주기 바라요”라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연희가 말했다.


“흐음, 그럴 단계는 아직 아니지 않나요? 그건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뭘 나중에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어떤 긍정적인 가능성을 지금 연희에게 내비친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애초에 품게 하면 안 된다. 여자는 작은 실마리에도 때로 지나치게 기대는 법이다. 조금 냉정하게 말을 건넸어야 했다. 게다가 급가속은 절대 금물이다.


“제가 궁금한 것은 왜 연희씨가 저에게 지나치게 과분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느냐 이겁니다. 우린 그저 버스에서 같은 자리에 앉은 우연일 뿐이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런 선물을 받는다는 게 제 사상적 기반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요. 이건 시스템적으로 봤을 때, 예측이 불가능한 중대한 오류거든요”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결국 이 말을 언젠가 했어야 했다.


“글쎄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에 꼭 특별한 목적이 담겨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저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인류애적인 사랑을 베풀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리고 지금 저는 민석씨와 산책을 하는 중이고 기분도 꽤 좋아졌고, 뭔가 호의를 베풀만한 분위기도 조성됐잖아요?”


“그 때문에 우린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거죠. 물론 때로 그 방향이 의도치 않은 곳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그런 분위기조차 저에게 찾아온 하나의 즐거운 변주곡이라 생각해요. 저는 그저 지금 제 마음이 당기는 대로 순응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러니 저에게 자꾸, 왜, 무엇 때문에, 이런 Why를 자꾸만 들이대지 마요. 저는 본능에 따라서 제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에 제 마음을 맡길 따름이랍니다. 그러니 자꾸 의문이 마음 여기 가운데에서 자라나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감정에 충실할 따름이니까요” 연희가 말했다.


“앗,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군요”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얼마나 사려 깊고 전망이 밝은 것인지는 나는 잘 몰랐다. 다만 연희는 상당히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사실만 파악할 뿐. 그녀가 어쩌면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거나 아직 어렸을 지도.


“그냥 이대로 당분간은 가보도록 해요. 어차피 지금은 펜션의 비수기이고, 게다가 여긴 비어있고, 저도 안식년을 맞아서 이곳에서 당분간 쉴 예정이라, 급할 건 1도 없거든요. 회사일은 몇 달 쉬도록 조치해둔 상태라 일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고요. 몇 달 버틸만한 돈도 나름 있고요. 저 나름 재력가랍니다. 호호 이 나이에 이렇게 서울과 남해에 몇 채의 집을 가진 젊고 예쁜 여자가 어딨겠어요. 이런 캐릭터 드물지 않나요?” 연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라고 약간 비꼬는 태도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연희를 찬양할 만한 점이 마치 게임기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늘어선 줄처럼 길게 놓여 있었다.


연희의 말에는 물론 마치 자신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간곡한 주문 같은 게 서려 있었다. 다행히 나는 연희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의도대로 나는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걸까? 내일은 그녀가 말한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나에게 어떤 고통을 안길지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새벽부터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하루에 쓸쓸함이라는 맛이 가미된 것이다. 침대에 누워 작은 창 사이로 시야를 옮기니, 오직 흐르는 비와 정지된 시간만이 존재할 뿐인 이상한 장르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남해 독일마을에서 맛보는 비는 과연 어떨까, 궁금했다. 이런 곳이라면 비름 흠뻑 맞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원두를 그라인더로 갈고 커피를 드립한 후, 식탁에 앉아 그 맛을 음미해봤다. 서울 흔한 카페에서 마시는 산미가 강하게 풍기는 가벼운 커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거기에서도 여기에서도 커피는 커피라는 본래의 목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은 상태가 아닌 살아 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목적에 해당되는 걸까, 단순히 운이 좋아서 살아 있는 거니까 그 운을 지탱하기 위해 여기가 아닌 바깥으로 목적을 찾아 떠나야 하는 걸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그 소리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연희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어요?”라고 인사하며 이미 어디론가 떠날 차비를 다 맞춰놓은 사람처럼 나를 불렀다. “네. 이렇게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흡입하는 중이죠. 그런데 노크하면서 동시에 문을 여는 사람이 어딨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여기 있잖아요? 됐죠? 노크하면서 동시에 문 여는 일을 해내는 사람 잘 봤죠? 처음 봤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구경하게 될 거예요”라고 연희는 또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남자는 딱히 준비할 것도 없잖아요? 대충 아무거나 챙겨 입고 가방에 노트북과 민석씨가 그렇게 아끼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넣고 하여튼 간 몽땅 챙겨 오면 되겠네요. 자 5분 드릴게요. 나 여기 소파에 앉아 있을 테니 짐 챙겨요” 그러더니 그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져보더니,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요리조리 그 물건을 뜯어봤다.


“아니, 이렇게 불쑥 오자마자 5분 내에 준비를 마치라니, 번갯불에 땅콩이라도 구워 먹는 거랍니까. 시간을 좀 달라고요. 아직 커피도 다 안 마셨는데…”


“시간 없어요. 차표 이미 예매해놨거든요. 7시 남해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예요. 지금 시간이 5:50분이니까, 나가서 택시 잡는 시간도 필요하고, 아 택시는 제가 콜 부를게요. 그럼 시간 아낄 수 있겠다. 5분이면 충분하죠?”


나는 그녀의 주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시던 커피는 부어버리는 수밖에. 양치질을 대충하고 노트북과 그것에 달린 케이블 몇 가지 종류를 가방에 채워놓은 후, 빨랫줄에 널린 속옷을 얼른 챙긴 다음, 바로 백팩에 그것을 욱여넣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4분 40초가 흘러가 있었다. “준비 다 됐어요. 가시죠. 택시 불렀어요?”내가 말하자. “3분 후에 도착한대요”라고 연희가 대답했다.


모든 게 급작스럽다. 연희와의 만남부터가 그랬으니까. 시작도 마무리도 그렇게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다. 어느 순간 세상이 내 자율권을 건드리기 시작했으니까.


신발을 신고 문을 여는데 아직 햇살은 동쪽 끝에서 연기처럼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으로 다시 서울과 맞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딱히 내가 무방비 상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이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다. 내가 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내 옆에는 연희라는 든든한 여자도 있지 않은가.


나는 걸음을 옮겨보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온 동네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각인시킬 태세로 유영하듯 걸었다. 조금 걸어가자 이미 도착한 택시 한 대가 보였다. 내가 먼저 뒷자리 안쪽에 탑승하고 그 이후 연희가 내 옆에 앉았다. 연희는 조금 가까이 밀착한 듯했다.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서울에서 남해에 내려올 때보다 우린 한결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역시 택시비는 내가 치렀다. 카드 한도는 이제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난번 회사 퇴사할 때 받은 퇴직금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비용이라면 서울에서 일을 하지도 않고 어쩌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실업급여도 신청할 수 있으니, 더하여 이런저런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면 약 1년 정도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남해로 내려올 때와 달리 연희와 나는 버스 안에서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희도 나도 자신의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나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간 풍경과 새롭게 나타나는 풍경의 차이점에 대하여, 그 다름에 내포된 의미들을 해석해내기 위해, 나름 분주했다. 그녀도 나도 우리에겐 서로 할 일이 놓여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일은 내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도 그녀가 분주하다는 건,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택시와 시외버스를 이용해서 남부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작 지점에서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환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우리를 거쳐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생성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시간은 서로에게 상대적이었다. 내 시간은 지체됐을까, 조급하게 흘러갔을까, 정지되어 있었을까, 나는 그 부분을 명확히 해석할 수 없었다.


남부 터미널에 내린 후,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할 것인지 다시금 간단한 협상을 거친 후, 언제 어떻게 누가 먼저 연락 공세를 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시시콜콜한 부분들까지 일일이 결정한 후 서로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집은 예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처음의 상태, 그러니까 마치 핵폭격을 받은 그 모양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 청소업체에 전화를 건 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할 수 있냐고 문의했고 그들은 예약이 밀려있어서 차주에나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약간의 웃돈을 주고 오늘이라도 당장 작업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웃돈이 개념적으로 타당하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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