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사 온 맛없는 샌드위치와 탄산수 한 잔을 마시고 있으니 마침 청소업체가 도착했다. 그들은 고려청자 같은 진기한 문화재를 난생처음 구경하는 사람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더니 계산기를 꺼내서 요모조모 두들겨댔다. 견적이 꽤 나오게 될 거라는 일종의 암시 장치인 셈이었다. 나로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심적으로 나름 대비가 되어있었으므로 그들이 아무리 충격적인 금액을 제시할지라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자세가 마련되어있었다.
그들은 프로답게 계약서에 사인을 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박살 나 있던 물건은 언제 우리 집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자리에 있건 그들에 의해서 말끔하게 치워지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들은 조각난 책상을 바깥으로 옮겼고, 내가 아끼던 문구용품을 한꺼번에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종이들은 재활용으로 분류되었고 냉장고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냉장고도 문짝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그들의 트럭으로 옮겨졌으며 싱크대와 그 밖의 세간살이들도 재빠르게 옮겨졌다.
그때, 누군가 집에 찾아왔다. 연희였다. 연희에게 얼핏 집주소와 연락처를 알려주긴 했지만, 그것은 숙박업소에서 작성하는 흔한 기록의 취지였다. 헤어진 당일날 저녁에 바로 그 정보를 이용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와, 이게 무슨 일이래요? 아포칼립스적인 구도네요 완전. 여기 사진 좀 찍어도 돼요? 기념으로 남겨 두게요.”라고 물었으나 이미 그녀는 카메라를 켜고 여기저기를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겠다는 그런 근면 성실한 자세로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흡사 그녀는 종군기자와 같았다고 할까. 물론 나는 종군기자를 영화에서만 봤다. 지금 내 눈앞에 종군기자가 나타나서 여기저기를 허락도 없이 찍어낸다면, 분명 뒤통수 한 대를 갈겨버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나는 한심하게 연희를 바라봤다.
연희는 마치 이 집의 여주인처럼 청소업체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지적질을 했다. 때로는 마치 자신이 청소반장이라도 된 것처럼 직접 나서기도 했고. 게다가 더 버릴 건 없냐고 이 참에 다 갖다 버리자고.
“아니, 전화나 카톡을 하시지 뭐하러 이런 전쟁터 같은 현장에까지 찾아오셨어요?” 내가 물었다.
“와 이건 범죄현장 딱 재현하는 느낌인 걸요?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 책상은 마치 프레데터가 일부러 반쪽으로 딱 갈라놓은 느낌이잖아요. 우워.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작정했네 작정했어.”라고 하며 너무나 신기한 구경거리를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되었다며, 나름 들뜨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는 거였다.
“그러게요. 경찰관만 한 명 있으면 완벽하게 현장검증이라고 해도 되겠어요”라고 내가 말하자, 연희는 “진짜로 경찰에 신고했어요?”라고 물었다. 그래, 내가 경찰에 신고했을까., 안 했을까. 물론 어딘가 전화를 걸어서 신고를 한 것 같긴 하다. 그런 기억도 이제 너무 멀리 달아나버린 것 같지만…
연희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다니더니, 뭔가 지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내 앞으로 왔다. 뭔가 말을 건넬 모양이었다.
“내일이에요.”
“뭐가요? 뭐가 내일인가요?”
“제가 민석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분이 서울에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분과 연락을 주고받았거든요. 엄청 바쁘신 분인데, 당분간 여유가 좀 있다고 하니, 그분한테 도움을 좀 구해봐요. 내일 아침 그분에게 찾아가 봐요”
“아니, 잠깐만요. 저기 연희씨, 그 도움을 주신다는 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당장 내일 찾아가자고요? 그리고 대체 어떤 도움을 받는 건지, 좀 알아야 도움을 받던가 말던가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짜고짜 치고 들어오면 제가 어떡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도움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연희씨가 어떻게 알고 그래요.”
“뭐, 어차피 고민하는 척하다, 마지못해서 갈 거잖아요. 괜히 내빼는 척하지 말고 그냥 나만 믿고 갑시다.”
나만 믿고 갑시다? 내가 연희를 믿으라는 건가. 어떤 근거로, 어떻게 연희를 내가 신뢰할 수 있을까. 단지 1주일 넘게 그녀의 펜션에서 숙식했다는 이유만으로? 버스 안에서 만나서 드라마를 함께 들여다봤다는 이유로? 그런 이유라면 나는 멕시코에서 만나는 모든 갱스터과 바로 친구가 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녀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어도 나쁠 건 없겠다 싶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물러설 곳도 없고 더 이상 손해 볼 것도 없다. 단지 건강한 몸 하나가 유일한 재산인데, 그건 늘 내 정신과 동행하는 편이니 걱정 없다. 다만 재정적으로는 퇴직금으로 받은 천만 원 정도가 전부인데 그 카드도 내가 가지고 다닌다. 그것도 냉장고와 책상을 구매하는 데 적잖이 들어갈 게 분명할 테지만.
천만 원으로 몇 개월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돈을 탕진하면 나중에 여기 월세도 지불해야 할 테고, 설상가상 직장까지 얻지 못한다면 서울역 노숙자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앞뒤 가리고 줄자로 여기저기를 재단할 여유는 없다. 일단 빵이든 떡이든 넙죽 받아 들고 맛있게 먹어야 한다.
“내일 아침 8시, 신림역 4번 출구에서 만나요.”
“신림역요?” 내가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신림역 처음이라도 가봐요?”
“네 그쪽 동네는 처음 가봅니다. 제가 동쪽에서만 쭉 살아봐서…”
“뭐 지하철 타고 오면 간단하잖아요. 청소 업체 사람들 빨리 물리고 오늘은 좀 일찍 자요. 내일 늦으면 절대 안 되거든요. 저의 정신적 스승님은 늦는 걸, 제일 싫어하세요. 알았죠?”
“아무튼 알았어요. 휴… 신림동 4번 출구로 8시까지 가면 되죠? 특별히 준비해 갈 건 없나요? 혹시 남대문 가서 총이나 탱크 같은 거 사 오라는 농담할 거면 일 없습니다.”
“민석씨 누굴 구석기시대 사람으로 알아요. 그런 농담하면 어디 가서 진짜 총 맞아요. 알겠죠? 그럼 내일 아침 8시. 신림역 4번 출구 앞에서 만나요. 내일 아침에 만나면 더 자세한 이야기 해줄 게요”
연희는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청소업체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들은 예정에 없던 다그침 때문에 기분이 다소 상하긴 했지만, 그런 일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흔히 부리는 진상짓이라는 생각이 든 것인지, 금방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깔끔하게 물건들을 비운 다음, 누울 자리가 생기자, 나는 바닥에 이불을 대충 깔아놓고 누워서 알람을 확인한 다음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떴는데 확인해 보니, 새벽 3시였다. 잠의 신 휘프노스에게 제발 다시 잠들게 해달라고 간청해봤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책이나 읽자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낸 후,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덮어놓고 눈을 감았으나 역시 휘프노스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책을 펼쳤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6시가 됐다.
나는 자포자기하고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입천장이 데도록 급하게 마신 다음 외출 채비를 했다. 약속은 8시였다. 늦지 않도록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하는 게 내 스타일이니 서둘러야 했다.
구의역에서 신림역까지 약 35분 거리다. 집에서 나가서 구의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약 5분, 지하철 기다리는 시간 평균 5분, 그리고 신림역에서 4번 출구를 찾기까지 헤매는 시간을 계산해서 7시쯤 집에서 나가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6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역식 철두철미한 내 예측대로 7:30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큰 무리 없이 4번 출구를 찾았고 근처 카페에 들러 커피라도 마셔볼까 잠시 고민하다, 아침에 마신 커피가 생각나서 커피는 하루에 한 잔이면 충분하다는 계산 끝에, 그냥 4번 출구 앞에서 서성이기로 했다.
연희는 정확하게 8시에 나타났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그러니까 연희는 아주 정확한 시간 개념을 소유한 인간임이 분명했다. 계단 입구에서부터 연희는 손을 흔들고 나타났다. 나는 그 장면이 꽤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민석씨, 예상보다 일찍 나왔네요? 난 당연히 10분 이상 기다릴 줄 알았는데…”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물론 웃는 표정이나 우는 표정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너무 오랜 세월을 굳은 얼굴로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순간 그렇게 사는 게 너무 편해졌달까. 평범한 인생의 표정엔 감정조차 담기지 못한다.
“아니, 민석씨는 웃는 걸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 지금 웃었는데요…”
“그게 웃은 거라고요? 아니 웃을 때는 나처럼 따라 해 봐요. 아니 아니 그렇게 말고, 여기 양쪽 입꼬리를 추켜 올리고 눈은 하회탈처럼 약간 찡그리고 볼때기는 이렇게 양옆으로 잔뜩 잡아 늘어서…”라고 하더니 연희는 내 볼을 지난번 꿈인지 아닌지 확인할 때처럼 꽉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아…” 나는 또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연희가 확인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희는 나를 고의적으로 골려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고약한 여자. 너무 아프다.
연희는 “풋”하고 혼자서 웃더니 출발하자고 했다.
“출발? 우리 지금 어디로 가나요?”
“아니 내가 어제 스승님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요. 그분 만나기 엄청 어렵거든요. 아무나 절대 만나주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이따가 만나면 정말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돼요. 알았죠? 자 갑시다.”
연희가 슬쩍 내 손을 잡았다. “헉, 뭐야 무서워. 왜 이 여자 갑자기 내 손을 잡는 거야. 아, 이런 건 대본에 없는 건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면 되는 걸까. 아니면 슬쩍 손을 빼면서 주머니에 넣어버려야 할까.” 아, 어렵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마을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연희는 내손을 꽉 잡고 표지판에 붙어 있는 버스의 배차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연희씨 뭘 그렇게 표지판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앱 실행하면 시간 다 나올 텐데요. 요즘은 마을버스 도착시간까지 다 나온다고요.” 나는 빌미를 잡은 사람처럼, 연희의 손을 슬쩍 밀어버리고 앱을 작동시켰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나만의 작은 작전이었다. 자연스럽게 여자의 손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그럴듯한 작전.
하지만 앱에서는 마을버스의 도착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조금 무색해져서 고개를 떨구며 연희의 눈치를 봤다.
“거 봐요 민석씨, 마을버스 도착시간 따위는 앱에서 보여주지 않는다니까요. 그냥 표지판에서 배차시간 확인했으니 기다려봐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남자가 말이야, 진득하고 무겁게 침묵을 지킬 줄도 알아야지.” 연희는 어느새 또 남자를 들먹거린다.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2~3분쯤 기다리자, 버스가 도착했다. 아침이었지만 버스 안에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로 인산인해였다. 비좁은 마을버스 안쪽에서 우리는 손잡이 하나에 흔들거리는 몸을 지탱해야 했다.
버스는 언덕길을 위태롭게 올라갔다. 아니 바퀴로 굴러간다는 개념보다는 느릿느릿 기어간다는 말이 맞았다.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마치 외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구경해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다양한 표정들만이 빛났다.
거의 언덕 끝에 다다랐을 때, 버스에서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산에 또 올라가야 해요.”
“산이요? 우리 오늘 등산하러 신림역에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등산이라니요. 등산이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등산하러 온 거 아니거든요!” 연희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요. 쓸데없는 질문은 금지예요. 투덜거리는 것도 금지고.”
나는 잠자코 연희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연희는 또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했다. 내가 대체 어떻게 굴어야 연희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의 여자로부터 내가 사랑을 받는 방법이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그 무엇이든 모두 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하여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나는 산에 오른다. 물론 나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쫓는다. 관악산은 쉬운 산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저질체력의 소유자라는 얘기다.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좁은 오솔길이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원래도 말이 없었지만, 아무리 숲의 고요한 향기가 나른하게 퍼져나간다 해도,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서 대화란 것을 나눌 힘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솔직히 연희의 허리를 잡고 싶었다. 혹은 연희가 뒤에서 내 허리를 밀어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수단도 연희와 나는 접촉할 수밖에 한다. 야릇한 스킨십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그림을 연상하니까, 자꾸만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상할수록 깊이 어디론가 진입할수록 땀은 더 비 오듯 쏟아졌다.
“아니, 남자가 뭔 땀을 그렇게 흘려요?” 연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남자는 땀 좀 흘리면 안됩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렇죠.” 나름 치밀한 변론을 구사했지만, 그다지 먹혀들 것 같진 않았다. “조금만 참아봐요. 우리 등산 이제 막 시작했다고요. 앞으로 갈길이 머니까, 기운 좀 내봅시다.”라고 말하며 연희는 두 번째로 내 손을 잡았다. 이제는 스킨십이 아주 자연스러워지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었다.
연희는 나보다 반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치면 팔을 강하게 흔들었다. 어쩌면 남 보기에 나는 복날의 개처럼 억지로 끌려가는 그림처럼 비쳤겠지만, 잠시라도 그 개였을 또 다른 존재의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은 잔잔한 일본 영화풍 같은 것이었을지도. 언제 시작했을지 모를,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딱히 문제없는 그래서 더 감정이 포근해지는, 오기가미 나오코의 <안경> 같은 영화…
기운을 내고 걸음을 옮겼다. 희말라야를 처음 등정하는 초보 산악인처럼, 물론 나는 관악산에 실제로도 처음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들을 기념하며, 특히 연희와 어떤 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는 감격스러움을 모든 세포에 각인시키겠다는 자세로 걷고 또 걸었다. 때로는 펭귄처럼 때로는 최초로 달에 오른 닐 암스트롱처럼 유영하듯 걸었다. 물론 산길은 끝이 없는 또 다른 길을 안내했다. 고지를 점령하면 더 높은 고지가 우리 앞에 막아섰다.
체력이 거의 방전되었을 무렵 정상 비슷한 곳이 나타났다. 이제 산은 산으로서의 위용보다는 바위로서의 측면을 더 강조하려는 듯했다. “이제 그만 올라가면 안 될까요?” 길섶에 털썩 주저앉으며 안방처럼 기다랗게 누워버리려는 자세를 취할 찰나, 연희는 “힘들어요? 그래요 힘들면 이제 그만 올라가요.”라고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뭐지? 더 올라가자고 할 것 같은데, 여기서 그만 마치자니?’ 내가 한계적 상황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인정이라도 한 걸까? 연희는 의외로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팔을 걸쳐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힘들면 그만 가요. 이 정도면 민석씨도 충분히 노력한 것 같네요. 오늘 우리의 목표는 달성한 것으로 쳐요.”라고.
“그런데, 스승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오늘 아침에 일찍 만나기로 한 것 같은데… 저는 스승님이 관악산 숲 속 어딘가에서 도라도 닦는 분이라고 상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 요 밑에 작은 암자를 지나갈 때, 스님이 나오셔서 합장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잠시 긴장했었다고요. 근데 그 앞을 스윽 지나가버리대요. 이건 뭔가 싶었죠. 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그렇게 연희씨가 강조하던 스승님은 어디에 계신 거예요?”
이렇게 내가 묻자. 연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약 5초 정도쯤 눈을 감았다가 지그시 뜨고는 내 눈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배낭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겨우 앉을 너비의 돗자리였다. 돗자리를 평평한 곳에 깔더니 블루투스 라디오를 꺼내곤 스마트폰에 연결했다. 아주 익숙한 솜씨로. 그러니까 매일 이곳 관악산에서 신성한 제사라도 펼치는 불자처럼, 아니 정말 연희는 그 순간 스님처럼 보였다.
"민석씨 내 옆에 무릎 꿇고 앉아요." 헉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오전에 연희와 만나서 여기에 오기까지 내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마음속에서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사죄하라고 무릎 꿇으라는 거 아니니까요.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앉아요."
연희는 스마트폰으로 법당에서 나올 법한 비교적 고요한 음악을 틀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는 공백 그 자체의 기운만 서려 있었다. 인공 조명도 자연적인 색채도 가미되지 않았다. 오직 나와 연희 사이에서 발산하는 빛들만 고고하게 미세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나는 방금 들려온 불경 소리를 듣고 잠시 멈칫거렸다. 여긴 분명 관악산 숲 어느 지점이다. 시골의 작은 암자도 규모가 있는 절간도 아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부처님이 살만한 그런 장식물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분명 불경이다. 절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도 모르는 얼간이는 아니다. 그 정도 소리는 구분할 줄 안다.
“민석씨가 무릅을 꿇고 앉았으므로 우리의 계약은 자동적으로 성립되었어요." "계약이라뇨? 무슨 소리예요? 연희씨" 솔직히 기분이 묘했다. 연희의 행위를 관찰하다, 어제 연희가 언급한 스승과 도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그것과 연희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묘하게 궁금했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가만히 들어봐요.”라고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성대에서 어떤 소리가 전해진 게 아니라 목소리 자체에서 샘솟듯 흘러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형체는 연희가 분명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소리는 연희에게서 발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리만 균일하게 점 하나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저 소리는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뿌연 안개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연희는 구름을 타고 마치 공중 부양하는 자세로 그 자리에서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의 착각일 뿐이었지만…
“스승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민석씨가 스승이고 민석씨가 제자인 거예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꼭 타인과 맺어져야 하는 할까요? 저는 아닐 거라고 봐요. 민석씨는 스승 없이도 충분히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라고요”라고 연희가 말했다. “아니 나는 연희씨가 스승님을 소개해주신다고 해서, 새벽부터 서둘러서 여기에 온 건데, 다짜고짜 스승이 필요 없다. 너는 너 혼자서도 충분히 설 수 있는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난처해지지 않겠어요? 저는 뭐가 뭔지 대체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지금 불경은 또 뭐예요. 도대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네요.”라고 내가 말했다.
“사실, 민석씨와 저는 남부터미널에서 인연을 갖게 됐죠. 어쩌면 잘못 끼워진 단추 탓에 우리가 만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 과정엔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개입된 거였죠. 작은 변수는 나비처럼 날갯짓을 해서 우리를 독일마을까지 이끌어줬고요. 물론 우리는 그 과정을 함께 시작해서 어딘가를 거쳐가며 투닥거렸죠. 게다가 민석씨는 어쩌면 스스로 사소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꽤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했죠. 사람이 누구인지, 선량했는지 아닌지, 이타적인지 이기적인지는 한 가지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믿어요. 민석씨는 저에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줬어요. 어쩌면 민석씨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수동적인 면의 다른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봤어요. 더욱이 민석씨가 겪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확신을 하게 됐죠.”
“계속해서 말해도 되죠?” 연희가 말했다. 나는 경청하는 자세로 “계속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음… 민석씨는 실패를 경험했어요. 그 실패는 작다고 봐야 할까요? 크다고 봐야 할까요? 인생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는 예측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인생을 아주 짧게 간주하죠. 그래서 꽤 조급하게 굴어요. 미미한 실패를 스스로 크게 확대 해석해버리는 거죠. 스스로를 실패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 앞길을 가로막아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대안을 찾지 못해요. 계속 과거의 환영에 억눌려 살아서, 좋은 기회, 인연이 찾아와도 그걸 알아보지 못해요. 하지만 민석씨는 그걸 알아봤어요. 무작위적인 선택을 따라간 거예요. 그 지점에서 우린 만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아마도 민석씨는 어떤 믿음에 기대고 싶었을 거예요. 작은 믿음, 나 스스로는 해내지 못하지만 누군가 다리를 놓아주면 그 위를 걸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는 거죠. 그게 민석씨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준 거라고요. 성수대교에서 자살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했죠? 그 사람과 평범한 한 인간의 운명이 아주 다른 형태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과 우린 A4 한 장 정도 두께 차이밖에 안될 거예요. 그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어떤 사람은 삶을 선택하는 거죠. 저는 그런 면에서 민석씨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오늘 토 달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 자, 두 손을 모으고 일어서서 절을 해봐요. 108배 알죠? 우린 지금부터 108배를 할 거예요. 이건 부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모든 걸 놓고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생각일랑 모두 버려요. 고민, 번뇌 따위 버리고 현존하는 거예요. 오직 호흡하는데만 열중해요. 여기 목탁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절을 해요. 자 나처럼 따라 해 봐요. 처음이라 엄청 힘들겠지만, 비 오듯 땀이 쏟아지겠지만, 끝나고 나면 뭔가 얻을지도 모르잖아요. 자, 군소리 말고 시키는 대로 해봐요."
연희는 정말 이상한 여자다. 남해 독일마을에서 혼자 펜션을 운영하고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지만 쉬겠다고 휴직을 한 상태고 나를 위해서 관악산 중턱에서 돗자리를 깔고 불경, 그러니까 천수경을 줄줄 외우더니, 이제는 108배를 하잔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여자가 누구인지 나에게 왜 찾아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뭐 이 세상에 내 이해 범주에 속하는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