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6시에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커피를 마신 후, 간단하게 레토르트 볶음밥을 데워 먹었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더 내려마신 후, 5분 동안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구의역에서 광화문역까지 갈아타는 구간을 한 번 갈아탔고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서 광화문역에 도착했다. 곧바로 4층까지 있는 스타벅스, 3층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커피 벤티 사이즈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니 9시, 줌 원격 접속 시간까지 약 1시간이 남은 셈이었다.
1시간 동안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이전 직장이든 오후에 만나는 연희든 나는 누구든 기다린다. 다만, 기다림 끝에 무엇이 찾아와 줄지 예측할 수 없다. 계획한다고 그것이 얼마나 치밀한 미래를 전달해줄지 알 수 없다. 그저 내 성향대로, 하고 싶은 대로 변칙적으로 살아가면 그만이 아닌가.
10시가 됐다. 나는 강차장이 전달해준 Zoom 주소로 접속했다. 얼마간 기다리자 그들이 나에게 제어권을 넘겼다. 강차장의 피씨로 원격 연결이 된 상태에서 또다시 원격으로 서버와 연결했다. 말하자면 인셉션에 나오는 장면처럼 나는 하나의 타인의 환경에서 또 다른 타인의 환경으로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여러 환경으로 진전하니까, 마치 내가 여러 개의 시공간으로 분할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나는 여전히 스타벅스 3층 구석에 앉아서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평범한 개발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제점과 취약점을 찾으려 애썼다. 원격 디버깅을 위해 필요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지점에 브레이크 포인트를 걸었다. 그리고 콜-스택을 통해 특정 변수의 값을 추적하고 메모리 릭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자원이 누수되는 지점을 찾았다.
문제점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새롭게 코드를 짜는 게 나았다. 이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 폭탄을 가슴에 싸안고 상공에서 땅으로 함께 추락하는 것과 같다. 이런 건 떠맡으면 안 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온라인으로 계약을 맺고 말았다. 나도 그들과 한 배를 탄 셈이 됐다. 일단 시스템이 가진 문제점들을 노션에 체크리스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각 결함을 픽스할 세부적인 날짜를 적었다. 말하자면 데드라인을 설정한 셈이었다.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특급으로 분류된 일들부터 처리하자고. 오늘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이다. 1시에는 무조건 노트북을 덮어야 한다. 연희와의 소중한 데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최대로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은 2시간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2시간 이상은 무리다.
결함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코드를 새로 짤 것인가,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봉합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과거의 내가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주어진 책임은 퇴사 덕분에 이미 면책됐다. 나는 이미 퇴사자의 신분이다. 결함을 멋지게 봉합한다 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 봤자, 이 시스템은 그들의 소유지 내 것이 아니다. 애써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최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부터 해결하면 된다. 주어진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다. 그 시간이라면 남은 문제는 충분히 척결해버릴 수 있다. 즉결 심판하듯이 하나씩 처리해나가면 된다.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다. 그들의 눈높이도 내 눈높이도 아니다. 평균 정도만 해내면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굳이 코딩까지 나설 필요가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포트 설정만으로 충분히 끝나버릴 비교적 간단한 일들을 2시간에 나눠서 깊이 고뇌하는 철학자처럼 해결한 다음, 오늘 해결한 이슈 사항에 대해 강차장에게 리포트했고, Zoom 접속을 해제했다. 연희가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전원 케이블을 돌돌 말아서 구석에 넣은 다음 스타벅스 문을 열고 나왔다. 정확하게 한 시 오 분 전이었다. 그래, 이 정도라면 서점까지 걸어가는 시간, 넉넉잡고 오분이면 정각에 정문 앞에 도착할 것이다. 연희에게 나는 시간을 비교적 엄수하는 인간으로 계속 남게 될 공산이 컸다.
서점 앞에 도착했을 때, 연희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서 있었다. 밝은 원피스 색깔 탓이었을까,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연희에게선 독보적인 광채가 났다. 사람에게 자연광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 발광하는 빛의 위력이 어떤 느낌인 것인지 나는 100미터 바깥에서도 충분히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해야 했다. 감격스러움과 그것에서 피어나는 감정 표현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한가하게 연애나 하는 20대들에게나 어울린다.
연희는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서는 서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호구 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 달에 책 몇 권 읽어요? 최근에 감명 깊게 본 책이 뭐예요? 서점은 자주와요? 어떤 작가를 좋아해요?” 와 같은 폭풍 같은 질문들을.
나는 그 질문들을 단숨에 소화시킬 자신이 없어서 하나씩 대답해주겠다고, 그리고 단답형으로 말하겠노라고, 나에게서 서술형의 답안은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저요? 책이란 것과 전혀 친하지 않고요. 서점도 자주 안 오고요. 좋아하는 작가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감명 깊게 본 책도 없어요.”라고 내 취미를 숨기며 말했다.
“책 안 읽는다고요? 그러면 지난번에 <그리스인 조르바>는 뭐예요? 그 정도 책이라면 꽤 마니아틱 하지 않아요? 서점 매대에서 가볍게 들어서 읽는 책은 아닌 걸로 아는데요?”라고 심문하듯 말했다.
“그건 누구한테 기념일 날 선물로 받은 거예요. 선물은 보통 주는 사람이 선호하는 물건으로 간택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제 취향이 아니라 그분의 취향인 겁니다. 선물해준 사람이 무안하지 않게 어떻게라도 읽어내려고 노력 중인데, 10년째 읽는 중이라면 믿겠어요? 그 불가능한 걸 제가 해낸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폼으로만 들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 그 책의 의미와 나를 과장해서 연결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해요”라고 뭔가를 감추는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매대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고 그러다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전시된 책들에 관심을 가져봤지만 딱히 어떤 책을 읽어야겠다는 동기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내 마음은 지금 온통 다른 곳에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남해에 있을 때는 서울에서 벌어진 일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남해 그리고 나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겨버렸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 직장이 내 삶에 다시 개입을 시작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몇 개월치를 살아갈 돈이 비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그 이후의 삶은 보장할 수 없다. 싫어하는 인간이 독사처럼 득시글거리는 소굴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기꺼이 눈을 감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내 운명이다.
책을 친해지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글자에 더 집중이 되지 않아서 빨리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강차장에게 전화가 왔다.
“홍대리, 잠깐 통화 가능해?”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풍의 강차장이었다.
“오늘 일처리 한 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내가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지금 회사가 갑자기 경황스러워져서, 지금 모든 프로젝트가 올 스톱됐어.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원인 불명의 사건 때문에 홀드 된 거지. 윗선의 까다로운 지시사항이야. 그래서 홍대리한테도 미안하게 됐는데, 당분간 진행하던 일을 보류해야 할 것 같아, 라고 말해야겠어. 미안해, 지금은 정신이 사나워서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라고 용건만 최대한 추려낸 강차장이 자신의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황당한 일이다. 갑자기 전화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달라던 까탈스러운 인간들이 이제는 급작스럽게 전화해서 일을 홀드 하란다. 이것들이 단체로 장난치나. 짜증이 순간적으로 솟구쳤다. 옆에서 관심 있게 엿듣던 연희가 한마디 했다.
“무슨 일이에요? 가만히 돌아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니까, 이전 직장하고 다시 관계가 시작된 거죠?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민석씨 호구예요? 그놈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내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뭘 도와달라는 거예요? 민석씨는 뭐 옛정 같은 게 생각해서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그런 거예요? 지금 자선 사업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예전에 제가 몸담았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대타도 아직 뽑지 못했고 출시도 가까워졌다고 해서 조금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조금 도와주고 돈 많이 받으면 좋잖아요. 시간당 25만 원씩 받기로 했어요. 그 정도면 괜찮죠?”
“아니, 이 사람아. 그래요 참 좋겠어요. 대체 최저 시급의 몇 배에요? 금방 부자 되겠어요. 아주 좋아, 근데 배팅할 줄 모르네. 아니 칼자루는 지금 누가 쥐고 있어요? 민석씨 아니면 그 일 해줄 사람 있어요? 표정 보니까 딱 알겠네. 민석씨 밖에 없는 거네. 그럼 칼자루는 민석씨가 쥐고 있는 게 맞는데, 왜 지금 칼날을 쥐고 손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어요? 나, 진짜 이해를 못 하겠네. 그런 건 말이에요. 내가 협상을 좀 해봐서 아는데, 러시안 스타일로 승부를 거는 거예요. 시간당 25가 뭐예요. 나 같으면 250을 받아도 할까말까인데,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민석씨를 찾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근데 어떻게 25에 합의를 봤어요?”
“그렇죠. 그 시스템 내부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건 저뿐이죠… 다른 사람인 일정 안에 절대 못 맞춰주죠.”
“그럼, 이 멍청이 같은 사람아, 그걸 25로 딜을 해요? 25가 뭐야. 시간당 250은 불러야지. 그 회사 내가 좀 알아보니까 돈도 많은 회사더만, 몇 시간이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놈들의 취약성을 민석씨가 캐치한 거니까, 그리로 집요하게 파고들었어야죠. 한몫 챙길 때는 판을 크게 벌여서 크게 먹어야 하는 거예요. 지금 무슨 조카들하고 소꿉놀이해요?”
"전 조카가 없는 걸요?"
나는 또다시 연희의 연설에 빠져들고 말았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협상가적인 면에서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특히 돈이 개입되는 문제, 연봉과 계약 이런 부분에는 더 취약하다. 월급도 주는 대로, 사이드잡을 할 때도 그들이 제시하는 대로 계약했다. 물론 계약서 따위는 절대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그런 걸 들여다보느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훨씬 유익할 테니.
“안 되겠어요? 민석씨 내가 진짜 심각하게 말하는데요. 앞으로는 돈과 관련된 문제는 나하고 먼저 상의해요. 그냥 맡겨두다가 이 사람 영혼까지 무료로 증여해버릴 것 같은 태세네. 알았어요?”
“연희씨. 나서 주고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요. 연희씨가 저한테 뭔데요? 지금 왜 그러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니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어요. 중간에서 커미션이라도 챙기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대체 왜 자꾸 내 일에 개입하려 드는 거예요?” 내가 다소 짜증 나는 투로 물었다.
순간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나와 연희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벽이 불쑥 솟아난 기분이랄까. 연희는 말없이 내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니?라고 묻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는, 입시에서 최저 점수를 받은 사람처럼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곤 “연희씨…”라고 짧게 그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고 역사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녀와 나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아니면 이어주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어쩌면 관계라는 것을 점검하고 나아가 보다 명료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이 될지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고 싶었다. 분명하고 확실한 관계가 아닌 흐릿하고 모호한 관계는 더 이상 내 삶에 관여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연희, 우리는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한 연인 사이처럼 사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냥 버스에서 우연하게 만나서 인연과 비슷한 형상으로 잠시 시공간을 보내다가 아무렇지 않게 언제든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돌아설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연희는 집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갔고 이전 직장은 당분간 일을 주지 않기로 했고, 나 역시 어디든 목적지를 정해놓고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집인지 짐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집으로 돌아와 청소업체가 정리한 집구석을 구경했다. 마치 부동산에서 남의 집을 구경 나온 사람처럼… 냉장고 자리에는 빈 냉장고의 흔적만 남았고 싱크대가 있던 자리에도 싱크대의 윤곽선만 남았고 책상이 있던 자리에는 4개의 다리가 놓은 자리의 흔적만 남았다. 다행히 소파가 놓인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찢긴 장판을 뜯어내고 새것을 깔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물건은 사라지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만 어떤 것은 과연 그 자리에 존재했는지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여기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아니, 남긴다는 생각 자체가 오류는 아닐까. 나는 이 세상에서 그저 잠시 소란을 떨다가 사라져 갈 손님 같은 인간이니까.
저 빈자리는 무엇으로 대체될까. 냉장고가 꽉 차게 자리를 차지하던 그 공간엔 냉장고이거나 혹은 그와 비슷한 물건이 자리를 차지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처럼 빈 공간으로 내버려 두는 게 맞을까. 하지만 냉장고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냉장고는 냉장고로써의 몫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물건이 없어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물건은 물건 자체에 귀속된다. 심하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처럼 그곳에 빠지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나는 소파가 원래 있었던 자리에 마치 소파에 앉는 것과 유사한 동작으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몸을 똑바로 누이곤, 천장을 말없이 주시하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한 번 그런 동작을 반복하면 하루가 지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무력하고 무모한 동작을 지속하더라도 하루는 제 역할을 해낼 것이다. 그게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