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었다고? 후후. 누가 먼저 선을 넘었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나는 그 따위 선을 그어놓은 적도 없어. 네 마음대로 선을 규정해놓고 넘었다가 말았다가, 그런 착각 놀이에 빠진 거지. 게다가 어디까지 간 게 중요한 게 아냐. 단지 네가 내 집에 네 영역 표시를 했다는 게 문제지. 집안에 온통 네 냄새가 배어있는데 말이야. 그걸 보고 내가 가만히 있어야겠어. 냄새 빼는 데 공기정화기를 몇 시간 돌렸는지나 알아? 그러니 선전포고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면 대응을 해줘야지. 그러니까 나는 네 방문에 그저 반응한 것뿐이야. 기브 앤 테이크하듯이 말이야. 기브 앤 테이크, 이제 뭔 의미인지 알겠지?”
기브 앤 테이크, 주면 받는다. 그리고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돌려준다. 무엇이든… 그것이 기브 앤 테이크의 원칙이다. 좋은 것을 받으면 좋은 걸 그대로 돌려주고, 나쁜 걸 받으면 그것의 10배의 형태로 말하자면 재앙 같은 것을 대신 돌려준다.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은 최대한 더 최악의 형태로….
“그래서 내 집을 그렇게 예고도 없이 박살 내버렸군.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환경을 바꿔버렸어. 그래 맞아. 내가 선제공격을 했지. 예고도 없이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해.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그 생각에 몹쓸 감정을 담고 싶지도 않아. 너 따위에게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도저히 이해 안 되는 게 있어. 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우리 회사에서 잘 지냈잖아. 아주 친하지는 않아도 고민거리를 들어주고 문제를 같이 고민할 사이 정도는 됐잖아. 그렇게까지 나를 파괴시키려 한 이유가 뭐야?” 내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세상엔 이해 못 할 일이 많이 일어나. 모든 사건에 이유를 대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어떤 일은 그냥 이유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뿐이야. 그러니 해석하겠다고 나한테 따지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네가 말하기를 우린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는 사이였다?라고 이해할 수 없는 투로 말하는데 그건 반은 맞고 사실 반은 틀린 얘기야. 그건 늘 일방적이지 않았어? 너에게는 유효하지만 나에게는 소모적인… 그러니까 나는 늘 듣기만 하고, 그래 그 짜증 나는 너의 넋두리를 듣고 매일 똑같은 소리를 지겹게 듣고, 듣기도 싫은 너의 상관, 너의 지루한 업무들, 넌 자질구레한 일들을 나열해댔지. 난 그것을 외우듯이 매일 들어야 했고. 그게 우리의 친근함을 대표한다고 하면 부정하지는 못하겠어. 하지만 그거 너무 일방적이었던 거 아니야? 너는 언제나 네 말만 실컷 늘어놨잖아. 너와 나 사이에는 늘 네 이야기만 있었어.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 중대한 프로젝트,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여자 친구, 퇴사 문제. 등등등 생각만 해도 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군… 그런데 넌 그런 시골의 작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나 늘어놓을 만한 소리를 나한테 습관처럼 퍼부어댔지. 너는 스트레스를 풀고 나는 대신 스트레스를 넘겨받았어. 그것도 기브 앤 테이크에 속할만하겠어.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어버린 너는 일상의 너로 가뿐하게 돌아가서 신나게 일을 했지. 경진대회에서 수상도 하고 상금도 받고 해외 연수까지 다녀왔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말이야. 독일과 미국에 가서 신나게 관광까지 했잖아. 그 빌어먹을 기념사진은 왜 나한테 보여준 거야? 난 너를 보면서 내가 너의 스트레스를 모두 감당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네가 받은 모든 혜택이 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 기분 알아? 그저 상담사처럼 모든 고민을 다 들어주고 문제까지 해결해줬는데 결국 내가 들러리였다는 기분, 네가 나 대신 좋은 걸 모두 독차지해버린 거야. 쓰레기를 다 치워줬더니 영광은 네가 다 차지한, 그 거지 같은 기분을 네가 아냐고. 난 그래서 그날로 결심했어. 어떻게 해서라도 널 파괴시키고 말겠다고. 널 내 다리 밑으로 기어가게 만들고 말 거라고. 그렇게 결심하고 마침 안이사가 기회를 준 거지. 너는 보기 좋게 걸려든 거고.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이제 모두 알겠어?”
“난 이해를 못 하겠어. 물론 내가 힘들 때마다 널 불러내긴 했지. 그럴 때마다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도 인정해. 그걸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넌 그때 힘든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잖아. 짜증을 낸 것도 아니고 넌 그저 담담하게 들어줬다고. 내가 말하는 걸 무심하게 한 귀로 듣고 또 무의식적으로 소화시킨 것 같았더라고. 넌 그런 걸 태생적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어떤 뛰어난 기관 같은 걸 가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니까. 너한테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는 건 생각 못했어.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미안하게는 생각해. 사과하고 싶다고.” 간곡한 자세로 내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이미 게임은 종료됐고 넌 패배했으니까. 난 그걸로 족해.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만하지 않겠어?” 녀석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너는 결과의 경중으로 비교할 때, 충분한 만족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난 그저 정신적으로 너에게 대미지를 입혔을 뿐이지만, 넌 나에게 명백한 위해를 가했다고. 내 집을 부숴버렸고 날 회사에서 쫓겨나도록 만들었어. 그건 지나친 거 아니야?”
“방금 미안하다고 말해놓고 금방 입장을 선회시키네? 거봐 이게 바로 너야. 넌 늘 이런 식이었다고. 피해를 줘놓고 금방 미안하다는 투로 말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내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그게 바로 네 문제야.”라고 녀석은 말해놓고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도끼 찍듯이 내려놓고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걷어차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출입구로 걸어가 바람 소리가 휭 하게 나도록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아무런 힌트조차 남기지 않은 상태로.
녀석, 그러니까 김대리가 카페에서 나간 이후로 모든 흐트러진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으나 실제론 그러지 못했다. 세상은 여전히 혼돈에 머물렀다. 한 번 잘못 꿰어진 단추는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어긋난 상태가 계속 유지될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몇 번 건너뛴 단추 구멍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잘못된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순 없을까. 그런 건 모두 헛된 상상에 불과할까. 녀석의 말대로 나는 누군가의 분노를 살만한 짓거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당사자의 어떤 결정 탓에 사건은 일어났다. 그리고 피해자가 생겼고 가해자가 생겼다. 그 누구도 중재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건은 미궁으로 치닫는다. 바뀌는 것은 없고 가해자는 계속 양산된다.
나도 카페에서 나왔다. 그리고 어디론가 가야 했지만 목적지는 정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으로 갈 것은 아니었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지하철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연락이 온 것은 다름 아니라 강차장이었다.
“홍대리, 나 강차장인데, 잠시 통화 가능해?”
“네, 강차장님이 웬일이세요? 우리 볼일은 이제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인수인계 문건도 정리해드렸고 소스코드 주석까지도 완벽하게 달아드렸는데 또 우리가 통화할 일이 남아있나요? 그리고 제가 제일 싫은 게 뭔지 아세요? 이렇게 불쑥불쑥 전화질 하는 거예요. 지금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고요. 언제까지 이런 원시적인 수단에 집착할 심산입니까?”
“아, 미안 갑작스럽게 전화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건 잘 아는데…”
“아시면 전화를 안 하면 되죠? 이미 일 저질러 놓고 뒷수습하는 모양새 취하지 마시고요. 저 전화 끊겠습니다.”
“잠시만, 3분이면 돼, 아니 1분이면 돼.”
“하… 뭡니까? 그럼 용건만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 바쁩니다.” 실제로 바쁜 일은 하나도 없지만, 일단 바쁜 척을 하며 내가 말했다.
“별일은 아닌데, 아… 별일이 될 수도 있겠다. 뭔 일이냐 하면 홍대리가 개발하던 시스템 있잖아. 백엔드 모듈, 그거… 센서에서 데이터 받는 그 모듈 있잖아. 그게 지금 작동이 제대로 안 되어서 누가 점검을 해줘야 하는데, 후임자를 아직 뽑지 못했고 구인 광고는 올렸지만… 홍대리도 잘 알다시피 개발자 구하는 거 하늘의 별따기잖아. 안이사가 몇 주 전에 지시한 사항이 있는데, 그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고 안이사는 계속 독촉 중이고… 이거 이러다가 출시 일정 지키기는커녕 중간에 모두 강제로 퇴사당하게 생겼어. 우리 지금 단체로 한강 다리로 가서 자살당하게 생겼다고. 이거 작동 안 되면 다 죽어. 홍대리 퇴사해서 이미 이 회사 직원 신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아는데, 옛정을 생각해서 잠시 도와주면 안 될까? 간단한 일인 것 같아서 말이야.”
“간단한 일이라뇨. 강차장님 개발자예요? 간단함과 복잡함에 대해서는 개발자가 판단할 문제지 기획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죠. 어디서 그런 못돼먹은 것부터 배운 거예요? 게다가 안이사의 지시사항이건 출시 사항이건 그건 그쪽 회사의 문제지, 제 문제가 아니에요. 전 바톤을 강차장님과 그쪽 회사 손에 정확히 쥐어줬다고요. 그러니 손발이 잘 맞는 그쪽분들끼리 잘 화합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세요. 아니 문서를 드렸으면 공부를 좀 하셔야지. 공부는 해보지도 않고 저한테 연락부터 한 거죠? 옛날 버릇 도졌네. 툭,하면 나한테 전화해서 마치 히어로한테 늘 문제를 들이밀 듯이… 바뀐 거 하나도 없군요. 강차장님, 아니 강형, 강씨인가? 나하고 나이도 한 살 차이밖에 안나는 걸로 아는데…” 빈정거리면서 내가 말했다.
“홍대리, 감정적으로 치닫지 말고 이성적으로 이야기하자고.”
“아니. 사람을 감정적으로 몰아간 게 누군데요? 김대리가 사건을 터뜨리고 있을 때, 하나같이 작당한 것처럼 입 다물고 마치 나치에 협력한 아이히만처럼 녀석에게 동조한 게 누군데요? 설마, 김대리가 일 벌이고 나서 결과를 나한테 살짝 알려준 걸로, 제가 강차장님과 한 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제가 바보라서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사건의 결과를 받아 들고 나서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챌 정도는 된다고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계속 입 다물고 계시지 왜 그랬어요? 이제 와서 우리가 무슨 친구라도 될 듯이, 아쉬우면 전화해대고 제가 그러면 ‘그래요 알았어요. 당장 도와드릴게요.’ 이럴 줄 알았어요? 일 없습니다. 알아서 하세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이렇게 말해놓고 바로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강차장은 시스템을 잠시라도 들여다봐 달라고 사례는 후하게 지불하겠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통화를 종료하는 문제에 대해서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고심 끝에, 내가 원하는 조건을 말했고 그 조건에 대해서 온라인으로 계약이 성립되면, 그쪽 회사에서 원하는 일에 대해 잠시나마 시간을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시간당 30만 원, 그 금액이 아니라면 관심 영영 끊을 거라고, 그랬더니 강차장은 30은 힘들고 20에 해주지 않겠냐고 그 정도가 자기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볼륨의 금액이라고 애써 강조했다. 과제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제한되어 있다고… 절충하여 금액은 시간당 25만 원으로 협의를 봤다.
계약의 윤곽은 다소 추상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양쪽이 만족하는 선으로 절충된 듯했다. 일의 진행은 리모트로 진행하기로 했다. 특정 시간이 되면 그쪽에서 줌을 열어주기로 했고 나는 그쪽 시스템에 접속해서 요구사항을 처리하면 된다. 간단했다. 접속해서 처리하고 일이 끝나면 접속을 끊으면 된다. 대신 그들은 내가 진행하는 일을 꼼꼼하게 모니터링할 것이다. 투입되는 시간만큼의 비용이 집행될 것이므로 내가 실제로 일에 얼마나 집중할 것인지, 혹시 키보드에서 아무런 작용이 없다면 그들은 그 시간은 비용에서 제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시간당 25만 원을 받는다는 전제에는 실제로 내가 얼마나 많은 줄을 코딩할 것인지, 혹은 디버깅을 처리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요구 사항 분석을 위해서 화면을 얼마나 검토할 것인지, 그런 세세한 스크린의 동작에 따라 비용이 책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픽셀이 변동되지 않는다면 비용은 가산되지 않는다. 생각은 필요 없다. 집요한 코딩이든 지독한 디버깅이든 화면 디자인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화면을 움직여야 한다. 생각하느라 시간을 소비한다면 그 시간은 비용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내일부터 나는 오전 10시에 줌으로 그들의 시스템에 원격으로 접속해서 요구사항 문서를 클릭해서 아래쪽으로 천천히 스크롤해가면 된다. 될 수 있으면 화면이 정지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분석이 끝나면 바로 코딩에 착수하면 된다.
그렇다고 시간을 억지로 소비하기 위해 독수리 타법을 쓸 수는 없다. 나는 최대한 내 스타일대로 코딩에 전념한다. 집중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본능이 튀어나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최대한 코딩에 성실하게 굴면 된다. 말하자면 코딩에는 진심인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갈 테고 1시가 되면 나는 기계적으로 코딩을 마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업무에 투입한 실질 시간은 두어 시간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전에 두 시간을 일하고 50만 원을 벌 작정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준 시간은 일주일, 최장 2주일이었으니 이런 추세로 일을 한다면 대략, 7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셈이었다. 14일 일하고 700만 원이라, 나쁘지 않다. 꽤 쏠쏠한 금액이다. 이 정도라면 한 달 살아내기엔 충분하다. 어쩌면 석 달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각오를 품고 내일을 대비한다. 내일은 연희와 서점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데이트는 나의 상상이고 단순한 만남이 될지도… 구체적인 시간은 잡지 않았다. 1시까지 일을 끝마치고 서점에서 만나면 된다. 아, 시간을 절약하려면 광화문 근처 스타벅스에서 일을 보는 것도 좋겠다. 스타벅스 3층의 조용한 자리 하나를 차지해서 거기서 3시간만 집중하는 거다. 1시가 되면 짐을 꾸리고 서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연희와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그것이 내일의 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