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준수는 그날도 12시에 뭉그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체중계에 올라 숫자를 확인했다. 시야가 게슴츠레한 탓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명백한 의미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감추려 해도 다시 수면 위로 얼굴을 들이민다. 그것은 오랜 진리가 남인 인류의 수식어 혹은 진실의 인장이다. 시선을 외면해도 변하는 건 없다. 디지털 숫자는 더욱더!
그가 확인한 숫자는 ‘63.5’였다. 충격적인 숫자였다. ‘이런 빌어먹을 완전히 망해버렸어. 이 저주받을 간악한 녀석아! 대체 네가 하루 동안 하는 일이 뭔데, 숫자 하나 제대로 또박또박 맞추질 못한단 말이냐, 어디서 치졸한 짓거리를 해대고 있는 거냐고!’라고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나 볼법한 사나운 발성으로 아무 죄 없는 체중계를 향해 다투듯 외쳤다. 하지만 준수는 그런 비극 따위는 단 한 번도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렇게 토해내면 자신이 왠지 그럴싸하게 보이지 않을까,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발언을 토해낸 것이다. 어떤 기대 심리 때문에.
준수의 키는 180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호빗족에 가까운 남자들이라면 더욱 이 숫자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그래 범속한 이들이라면 앞쪽의 제시된 63.5라는 숫자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긴 여간 힘든 게 아니다마는 키가 180이라는 정보를 접하곤 다른 선상으로 더욱 아연실색하게 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대체 뭐가 충격적이라는 건데?’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준수에게 63은 경계 바깥의 숫자였다. 그는 거의 1년 동안 61~62 킬로그램대를 무난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중간에 폭식을 몇 번 거치긴 했지만 그래도 통곡의 63을 넘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경악할 만한 숫자를 확인하고 만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다이어트도 부익부 빈익빈이냐고, 어디서 건방지게 몸무게 가지고 자랑질을 하는 거냐'라고, 따져 물을지도.
도대체 1도 이해할 수 없는 준수의 내면으로 빠르게 진입해 보자. 그의 변론을 한 번 들어보고 나서 그를 비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선, 그것이 인간적 태도가 아닐까?
준수는 대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1년 동안 63이라는 숫자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한 겨울인 12월 중순인데, 아침부터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부터 수상쩍었다. 세상에서 불쾌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저 바깥의 기이한 현상이 자신에게 어떤 불리한 상황을 초래할까 싶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체중계가 일탈을 결정하고 만 것이었다.
처음 체중계에 올라갔을 때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럴 리가 있어?' 그렇게 자신감에 차오르며 이런 오류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상적인 변주에 불과하다고 두 번째 시도에 나섰다. 그런데 첫 번째와 다름없이 두 번째도 같은 숫자가 기록되자, 슬슬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혔는데 디지털은 절대 오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평상시 그의 지론에 따라서 곧바로 더 심각한 절망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천 원 몰에서 구입한 싸구려 티셔츠를 헐크처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힘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나오는 제제보다 모자랐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절실하게 체감하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세상엔 얼마든지 온갖 예외들이 나타난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다시 체중계에 오르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63.5, 심지어는 소수점 밑의 자리도 바뀌지 않았다. 꼼짝없이 자신이 트랩에 걸려버린 것이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정신세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그나마 지독한 다이어트 때문에 예민해지고 혼탁해진 정신세계는 이제 겉잡을 수 없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 그는 환청인지 자신의 미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 때문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준수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이왕 이렇게 확 찐 김에 잠이라도 실컷 자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낮에 잠을 자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나마 밤에 30분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것도 대낮에 눈을 부릅뜨고 버틴 덕분이 아닌가. 그러니 그는 체념 상태에 잠시 버러져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 그답게 생각하지 않고 덮어놓고 실행부터 하는 습관대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의 결심이 첫 번째로 향한 곳은 다이어트의 원흉, 밀고자인 냉장고였다. 그는 범인을 색출하는 것처럼 냉장고 문을 거칠게 양쪽으로 열어버렸다. 전기세 따위는 걱정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냉동 칸과 냉장 칸에게 골고루 빔을 쏘아대듯이 사납게 쳐다봤다. 이렇다 할 고칼로리에 해당되는 음식들은 없었다. 냉장고 안에 보이는 것은 바스크 치즈케이크, 인스턴트 핫도그, 프랑스산 버터, 하바티 치즈,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커클랜드 푸룬, 1등급 계란 한 판, 각종 견과류 팩, 그리고 당근, 오이와 같은 채소들, 마지막으로 글루텐 프리 스낵류 등이었다.
그 음식들은 거의 6개월치의 분량이었다. 지구 어디선가 좀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도 문만 꽉 걸어 잠그고 있으면 녀석들이 지칠 때까지 적어도 몇 개월, 아니 아껴먹는다면 1년 넘게 생존이 가능한 식량이었다. 하지만 지금 준수의 시각으로는 모든 게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는 속으로 결심했다.
“저것들을 모두 해치워야 되겠어! 그는 갑자기 공구 상자를 꺼냈다. 그 속에서 망치와 곡괭이 그리고 도끼류를 꽉 두 손에 쥐어보자고” 자 여기서 우리는 잠시 놀라운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세상에 집에서 곡괭이와 도끼를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놀라운 장비가 집에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준수가 자신의 과잉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장난으로 발설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의 손아귀에 들린 것은 소박한 망치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모조리 없애버리겠다고!” 라고 크게 소리를 쳤으나 그 정도 발성으로는 옆집에도 소리가 가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저 식자재들은 모두 아작을 내야 돼. 모조리 해치워버리자고. 자 제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디 좋은 아이디어라도 강구해 봐.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라고 심문하듯 옆자리, 그러니까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그의 왼쪽에게 투덜댄 것이다. 그는 그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맞아. 지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문제의 대상을 발본색원해서 제거하는 게 먼저야. 이미 물은 엎질러졌잖아. 이미 복구는 불가능하다고. 단기간에 그러니까 오늘 하루 종일 굶으면 아마도 내일은 몸무게가 정상적으로 돌아오겠지, 그걸 급찐급빠라고 하잖아.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나는 조금 더 멀리 보고 싶다고. 그러니 완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나설 때가 된 거야. 그동안 외면했던 일을 마무리해야 할 순간이 도래한 거라고”
준수는 1인 2역을 해가며 왼쪽과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사람이 두 인격을 담당한다는 것, 어느 쪽이 A의 인격이고 B의 인격인지 좀체 파악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준수는 다시 혼잣말, 그러니까 1인 2역에 충실한 배역, 예산이 모자란 나머지 혼자서 여러 배역을 담당해야 할 노련한 연기자처럼 역할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냉장고가 무슨 죄가 있어? 여기다가 음식을 넣은 건 바로 너잖아. 차리리 네 손목을 잘라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제어를 못한 거지, 냉장고는 그저 보관에 충실했던 거라고. 그리고 이 건강한 음식들을 좀 봐. 유통기한이 거의 1년 넘게 남은 싱싱한 치즈며 버터들을 보라고. 네가 마트에서 그렇게 신중하고 제일 뒤쪽에 있던 물건들을 헤집어가며 수집해온 것들 아냐. 그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
“그래 인정해. 죄는 나한테 있지, 하지만 나 스스로를 말살해버릴 순 없는 거잖아. 죄는 적절한 대상화의 작업이 필요해. 적당한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나는 그래서 늘 시선을 분산시켜서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들에게 혐의를 물려. 말하자면 재갈을 물려버리는 거지. 그게 내가 지금까지 생존해온 방식이라고. 그래서 내가 62까지 체중을 줄일 수 있었다고. 저 철없는 눈으로 나만을 쳐다보는 가련한 식자재들을 봐. 저들은 죄가 없어. 악독하다는 것은 인정해.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받을 벌은 나중이야. 꼭 달게 벌 받을게. 그건 확실하게 선언할게.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언젠가 나는 천 벌을 받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준수는 도끼를 들어서, 아니 도끼를 들 것 같은 자세로 냉장고 안의 모든 식자재와 음식들을 투명한 봉투에 열심히 담았다. 거의 반쯤 넘게 담다, 다시 타임을 걸고 고민에 빠졌다. “그래 음식을 버린다고 일이 원천적으로 해결되진 않을 거야. 나는 또 마트에 가서 예민한 시선으로 음식들을 집으로 배달해오겠지. 그리고 저 냉장고 안에 또 가지런하게 쌓아둘 거야. 그건 명백한 사실이라고. 음식을 버린다는 거, 얼마나 큰 벌을 받을 짓이야. 내 체중이 63으로 치밀어 오른 것보다, 더 천벌을 받을 짓거리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곤 다시 비닐봉지에 넣은 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원위치에 놓으려다가 문득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입력과 출력의 원리만 잘 지킨다면 아무리 많은 음식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다이어트가 잠시 소강 상태, 말하자면 단기간에 실패를 맛본 까닭은 그가 게을러졌기 때문이었다. 먹은 만큼, 운동을 했다면 이런 수치스러운 숫자와 대면할 일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 난 어리석었어. 얼간이었다고 먹기만 했지 움직이는 건 지독하게 혐오했잖아. 내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음식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나의 인격들이라고. 그것들에게 채찍질을 가해야겠어.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겠다고!"
그래서 그는 다이어트의 원리, 먹은 만큼 배출하면 된다. 실컷 먹었으면 그만큼 죽을 만큼 걷던지 뛰던지 하면 된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 후, 저 음식들을 하루바삐 시야에서 치워야겠다고 결정했다. 치우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만족스럽고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은 섭취, 즉 먹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 칼로리 챌린지를 하는 사람처럼, 하루의 음식 스케줄을 꼼꼼하게 짜기 시작했다.
“그래, 먼저 지방부터 해치우자. 견과류와 버터들부터 없애버리자고. 그는 그렇게 결심한 후, 1회용 견과류 봉지들을 차례대로 뜯은 후 피스타치오, 호두, 아몬드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씹다가 씹는 것도 귀찮아져서 생수와 함께 영양제처럼 들이켜보기도 했다. 목구멍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신선해서 즐거웠다. 그럭저럭 견과류 한 박스를 해치우고, 두 번째로 과일 사냥에 나섰다. 냉동 블루베리 한 봉지, 말린 자두 한 봉지, 그리고 바나나 다섯 개를 해치웠다. 슬슬 뱃속에서 포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재차 이어서, 그는 스낵을 찾아나셨다. 탄수화물이 적게 함유된, 글루텐 프리라고 쓰인 봉지를 잡아 뜯곤 목에 탈탈 털어 넣었다. 감자칩류는 입에 넣기 힘들어서 주먹으로 스낵 봉지를 납작하게 으깬 후, 통째로 털어 넣었다. 맛은 진즉에 포기했다. 뱃속에 저장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다음은 삼겹살 팩, 냉동시킨 흰 밥, 바스크 치즈 케이크, 냉동 돈가스들이었다. 이제 입에서 거의 거품이 뿜어져 나올 태세였다. 어디까지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인간의 능력이란? 이런 상상을 하며 몇 년 동안 고집했던 자시만의 다이어트 스타일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먹는 일이란 이렇게 간단하고 편리한데, 자신은 왜 쓸데없이 식이조절에 진심이었는지 후회됐다.
“자 계속하자고 위장을 향해 진군나팔을 불어주자고, 자, 대장은 더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야지. 필요하면 언제든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배출해 줄 테니, 너는 일단 소화에 최선을 다해. 내 입은 먹는 일에, 대장은 내보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그는 이런 주문을 외우며, 다이어트 보조제와 배고픔을 꺼지게 하는 약, 설사약 등 소화를 촉진하는 모든 상비약들을 음식과 함께 집어넣었다. 그래 씹는 게 아니었다.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공간 안에 모든 원망의 족속들을 감금시켜서 그 안에서 모든 문제들을 제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십만 칼로리? 그것은 조금 과장이고 아마도 5만 칼로리 정도는 먹은 것 같았다. 그는 심각하게 폭증된, 거대 풍선이 같은 상태가 되어서, 말하자면 신진대사가 멈춰버리게 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냉장고 옆에 두발을 쭉 뻗고 힘 없이 앉아 있다가 이제 거의 누운 상태가 되어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고 생수대로 옮겨가고 싶었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전략을 취하기로 했는데, 굴러갈 때마다 바닥과 배가 마찰할 때마다, 꿀렁 방지턱을 넘어가는 것과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거북스러운 몇 장면을 넘어가고 거의 생수대 앞에 이르러 물이라도 한 잔 시원하게 마셔보려고 애원하며 몸을 일으키던 순간, 커다란 생수대, 거인처럼 생긴 생수대가 그 앞으로 쓰러지며 배를 정통으로 강타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고 - 소화시키지 못한 음식 때문에! - 자신도 모르게 입 바깥쪽으로 기묘하게 생긴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이상한 무력한 해방감을 느끼곤, 다시 숨을 내쉬어야 겠다고 판단했는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온갖 음식들이 그의 기도와 식도를 막아버려 옴짝달싹 못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는 헥헥거리다가 물 한 잔, 생수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망초 같은 물방울 하나를 마지막으로 짧은 30년의 생애를 마쳐야 했다. 몇 주가 지나 연락도 없이 직장에 나오지 않은 그의 행방이 궁금하여 찾아온 동료들에 의해 그가 발견됐지만, 그의 입가에는 거품도 한숨도 아닌, 초콜릿류들이 삐져나와 온갖 파리떼 들이 몰려 잔치만 실컷 벌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알게 된 다이어트 신봉자의 행복한 종말 스토리였다. 물론 나는 이 이야기에 아무런 윤색도 작가적인 상상력을 덧붙인 일도 없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