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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남자 2

단편 소설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밤의 남자 1


옆자리에 앉은 그 남자에게서는 온통 검정, 칠흑 같은 검정으로 만든 반듯한 윤기가 흘렀다. 달빛조차 사라진 깜깜한 밤 속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검정 선글라스를 썼고 단정한 검정 양복을 차려입었으며, 길쭉한 검정 넥타이를 목에 걸쳤고,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단해 보이는 검정 서류 가방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 남자는 검은 향기를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진작 이렇게 협조할 것이지. 인간들은 늘 이렇게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고 나서야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니까.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으면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당신도 가끔 본질을 망각하는 편인가? 비겁하군!”라고 남자가 침묵으로 응수했다. 물론 그 형태는 지극히 모호하고 주관적이었다. 그의 입술은 옆에서 지켜봐도 바위처럼 굳게 닫혀 있었고 눈썹이든 양쪽 볼이든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근육을 쓰지 않고 말하는 재주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귀찮은 듯이 오직 정신적 수단으로만 말했다. 그 남자는 개념적으로 그러니까 침묵의 언어로 나에게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듣지도 못했는데 이해하고 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 잠시 이 차 안에 멈춰 서서 그 남자의 생각을 고이 나에게로 운반이라도 해주는 걸까. 어쨌든 나는 정면을 응시한 채 목적지도 없는 구불구불한 시골 국도를 여전히 달리는 중이었다. 다만, 어떤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에 붙들려 액셀에 아무런 힘을 가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마치 프로포폴 주사를 맞은 것과 비슷했달까. 오직 휠을 간신히 붙잡고 미등이 비치는 보닛 바로 앞을 흐리멍덩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피부에선 땀이 연속적으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시간이 부재된 밤을 보내고 있군. 잠이 부족하군. 아주 지독한 불면증에 걸려들었군. 마치 대낮처럼 환한 밤을 말이야. 그거 꽤 재밌겠어? 반대급부로 고독한 측면도 존재하겠지만. 그렇지만 고독이란 건 뭔가 부재할 때만 느끼게 되지. 인간만이 누리는 특수한 자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느끼는 고독은 부재가 없는 고독, 자유라고 착각한 고독이야. 실체도 없고 그저 꾸며대기만 하는 혐오스러운 고독이지. 당신은 자유를 고독의 대리인이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은 그저 겉멋에 불과해. 당신은 지금 지독할 정도로 죽음의 선동에 휘두름을 당하는 중이잖아? 매일 밤마다 덤벼대는 그 충돌질을 나는 지켜보고 있어. 그래, 당신 머릿속에는 욕망이 가득해.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삶에 대한 쓸데없는 욕망, 집착, 강박증 같은 거야. 모조리 가망이 없는 것들이지. 당신은 절대 결행하지 못할 거야. 끊어내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은총을 받으면 모를까.”


“이쯤에서 내가 누구인지 소개를 해야겠군. 짐작은 했겠지만 나는 ‘죽음의 그림자’라고 해두지. 저승사자 같은 개념은 아냐. 그것은 내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지. 나는 극복할 수 없는 일에는 시간을 투자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아. 내 역할은 말이야.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인간에게 이해가 쉬울까? 음, 내 역할은 배달해 주는 거야. 대리자의 역할이라고 할까. 당신들이 자주 쓰는 배달 서비스 같은 거 있잖아. 나는 저승사자에게 건수가 될 만한 물건을 배달해 주는 거야. 곧 죽음을 결행할지도 모를 자들, 죽음의 유망주들, 단칼에 자신의 목을 벨 가능성이 높은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그들을 바스켓 안에 깔끔하고 안전하게 포장해서 저승사자에게 인도하는 거지. 그게 우리의 역할이야. 우린 그래서 기다리고 낚아, 어디에서는, 다만 그곳은 저수지처럼 음침한 영혼들, 죽음이 배회하는 늪지 같은 곳, 불안과 체념이 넘쳐나는 곳이지. 너희 같은 부류들은 생이 생산하는 짧은 환희의 순간들을 어찌어찌 축하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지만, 불안한 기운은 떨쳐낼 수 없지.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해. 너희 같은 작자들 말이야. 절망을 위해 살짝 건드려주는 게 필요하거든. 그래, 내 역할은 죽음의 후예들에게 희망의 숨을 불어넣어 주는 거야. 영원한 죽음, 영원한 종말을 평화롭게 맞고 싶은 인간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는 거지. 그리고 고결한 저승의 사자들에게 인도하는 것이지. 그게 내 일들이야.”


“어떻게 그 일을 하냐고? 나는 기다려. 누군가 내 덫에 걸리길 기다리며 이 늪에 닻을 내리고 있지. 제 발로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어둠의 늪지대에서 그물을 던져놓고 눈동자가 없는 눈을 선글라스 속에 감춰두고 유혹하는 거야. 너처럼 어리석은 인간이 걸려들 때까지. 시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물론 내 세계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긴 하지만, 당신의 세계를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거야. 깊은 이야기는 어리석은 인간의 범주로 이해하기 힘드니, 여기까지 설명하는 것으로 하고.”


“아무튼 궁금할 게 많을 거야. 지금 대체 어떤 일들이 이 차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지 말이야. 난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어. 당신이 이 시골로 혼자 도망치듯 숨어든 이후부터, 줄곧 당신을 저 검은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서 내 눈동자의 빨간 실핏줄이 터져가며 재미있게 관람하고 있었지. 난 당신이 결국 여기로 올 줄 알았어. 당신 같은 속물들은 결국 어둠을 받아들이게 마련이거든. 어둠을 어떻게 영접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 위아래 입술이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심심해서 접착제를 입에 칠하고 다니진 않는다. 지금의 불가항력적인 현상은 분명 내 오른쪽에 앉은 남자의 짓이 분명하다. 그렇게 보면 이 남자의 말대로 그는 저승계에 속하는 어떤 비중 있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말이 하고 싶은가 보군. 역시 인간은 궁금한 게 많아. 그래 봉합된 입술을 메스를 그어줄 테니 어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코로 숨을 쉴 수 없던 나는 그의 깔끔한 칼질 덕분에 비로소 입으로 크게 한숨을 내보낼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태연하게 그 남자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했지만, 내가 던진 말들엔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내재되어 있었다. 가장 문제는 대체 내가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내가 가끔 정체 없는 너머의 세계, 죽음이 포장된 이후의 세계를 습관적으로 그리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극적인 상황을 맞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 남자에게 인도되었다. 아마도 내 예상으로는 그 남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바빠질 무렵, 그 남자가 제안을 해왔다.


"물론 강제로, 질질 끌고 가진 않을 거야. 그러니 그건 안심해도 돼. 모든 결정은 네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와주고 데려다주는 일에 그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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