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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남자 3

밤의 남자 1

밤의 남자 2


“……”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의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 내 수업에 청강하는 자격이 아닌 수강생으로 참여하는 거라고 간주해도 되겠지? 파우스트처럼 노예 각서를 쓴다거나 신체 포기각서 따위를 쓰라고 강요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행여나 걱정은 하지 말라고. 일종의 롤러코스터를 잠깐 타는 거라고 생각해. 다만 롤러코스터가 5분이 아닌 몇 시간, 혹은 몇 날 며칠 동안 지속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신에게 편할 거야. 하지만 괜찮을 거야. 이거 하나는 장담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일이 끝난 후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면 그 몇 날 며칠은 그저 몇 분 정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물론 너의 기억과 너의 경험과 네가 겪은 상처들은 개념적이긴 해도 네 기억에 고스란히 남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네 불면증은 그 덕분에 조금씩 치유가 될 거야. 그건 내가 개런티 하지. 죽음의 그림자의 자격으로 말이야.”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죽음의 그림자의 자격이란 무엇인가. 그가 나에게 놀이기구에 올라타라고 주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분석하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뜬금없이 롤러코스터라니, 죽음의 그림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롤러코스터를 전혀 타지 못한다. 평생 동안 바이킹이든 아이들이나 타는 다람쥐 통이든, 어쨌거나 애들이나 좋아하는 놀이 기구류에게 내 몸을 의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5분의 롤러코스터가 아니라 몇 날 며칠의 롤러코스터라니 이건 거의 사망유희에 가까운 혁명적 사건이 아닌가. 내 영혼이든 죽음의 그림자라 불리는 녀석이든 둘 중의 하나는 치명적 손실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 신체에 상해를 입는 일도 아닌데 일찌감치 포기한다는 건 자존심에 심각한 내상을 입을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아니라 나에게 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어차피 내가 질 싸움이지만...


하지만 나는 계속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때로 침묵은 긍정을 의미한다. 죽음의 그림자라는 녀석과 나 사이엔 끔찍한 공백의 순간이 찾아왔다. 공백은 무수히 많은 어둠에 숨을 불어넣었다. 어둠보다 더 깜깜하고 깊은 공백이 저 깊은 공간 어딘가에 숨어서 나와 녀석의 사이를 조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선택에 따라 나는 어둠에게 삼켜질 수도 어둠을 점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회와 위기는 그저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닌가.


그 남자는 어쨌든 사무적인 일이긴 하지만 관례상 계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계약이란 건 물질적 세계에서 주관하는 게 아니라 이데아적 세계, 인간의 상상 범주를 초과하는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끔 편의상 편리한 도구를 제공한다고 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이렇게 말한 남자는 원래 존재했지만 잠시 사라졌던 두 팔, 그 존재를 잠시 동안 잊고 산 사람처럼 주머니 속에 감추어둔 양팔을 꺼내듯이 슬쩍 양팔을 마술처럼 움직였다. 그러더니 서툰 것도 능숙한 것도 아닌 평범한 동작과 함께 무릎 위에 까만 서류 가방이 나타났다. 그것은 스르르 허벅지 속에서 분명 튀어나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로 비춰봤을 때, 허벅지 안에서 서류 가방이 솟아오른다고 하나도 기이하진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한 인간을 유혹 중인데, 차 지붕을 손톱으로 구멍을 내든, 서류 가방을 제우스처럼 허벅지에서 꺼내든 하나도 이상할 일이 없지 않은가?


“허허. 자, 여기에 계약서가 있는데 말이지. 하여튼 간 인간들이 쓰는 문명이란,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한다니까. 아니 이런 거까지 맞춰줘야 하나? 우리가 무슨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들도 아니고 말이야. 당신들은 왕이 아니야. 그저 게스트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남자는 나에게 태블릿 한 대를 내밀었다. 그의 형체 없는 손가락 끝엔 디지털 펜이 쥐어져 있었다. 그 펜으로 여기다 서명을 하라는 얘긴가? 고민했다. 평상시 매뉴얼 따위를 읽어보지 않는 나는, 태블릿 위에 깨알 같이 그러니까 거의 3포인트 크기로 설정된 글자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읽어본들 불리한 내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펜을 들고 대충 슥슥 서명을 하곤 태블릿과 펜을 형체 없는 그의 오른손에 쥐여줬다. 모든 과정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허무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이제 계약이 끝났으니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보도록 할까? 아까 말했듯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데려갈 일은 없을 테니. 이건 단순한 관례일 뿐이라고 한 번 일이 일어나면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리와인드되는 테이프가 아니라고. 일단 여행이 시작되면 질문은 허용되지 않을 테니,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빨리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질문 있나?”


“……”


“또다시 말이 없군. 그래, 그러면 내가 한 마디 해주지. 이건 경고라고 봐야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미리 겁은 집어먹지 말라고. 뭐랄까, 우린 여행을 떠나게 될 거야. 어디로 향하게 되냐고? 그건 네가 하는 것에 달려 있어. 네 생각에 따라 나도 움직이게 되어 있거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거나, 누군가를 죽도록 증오하거나, 누군가의 성공을 질투하거나,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도망친다거나, 누군가를 멸시하고 천대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아무튼 이런 악마적 세계를 상상한다면 그 상상대로 배경이 만들어질 거야. 그러니까 여행은 너의 의도대로 작동한다는 거지. 너 하기에 달려 있어. 자 그러면 잠시 네 머릿속을 스캔해볼까?”


잠시 후, 굉장히 뜨겁고 축축한 손이 내 이마 쪽에서 뒤통수 쪽으로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기분 나쁘고 불쾌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완벽히 통제당했으니까. 그저 그 남자가 리드하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그 남자는 내 손을 잡았다. 역시 꺼끌꺼끌한 감촉과 함께 손바닥 안에 온갖 크기의 쇠 가시들이 박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찾아왔다. 나는 그 가시에 관통당해서 온통 손바닥의 통증 세포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나 그 감각은 표면적인 감촉에만 잠깐 영향을 미쳤을 뿐, 실제로 통증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남자가 언급한 신체에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말엔 아마도 감각세포들을 그 남자가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감각 따위야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도 될 일이었다. 남자의 능력이라면 파괴된 세포쯤이야 얼마든지 원래대로 환원시켜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 남자의 왼손은 내 오른손을 부드럽고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 남자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슬이 체결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쏜살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허벅지 아래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으나, 우린 계속 다른 장소로 위치를 바꿨다. 어느새 우린 차 안에서 차 바깥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납득하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정의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 바깥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라리 꿈이든 상상이든 여기는 현실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게 현명하다.


오른손에서 감각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핏방울이 아래로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지는 걸로 봐선 분명 내 몸에선 좋지 않은 반응이 일어나는 게 분명했다. 핏방울들이 도로 위에 구덩이라도 만들 기세로 아래로 아래로 계속 떨어졌다. 게다가 그 남자는 얼마나 빠르게 걷는 것인지, 속보로 쫓아가다가 나중에는 거의 전력으로 뛰어도 남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울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나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선량한 피해자들이 로프에 두 손이 묶여 길바닥을 질질 끌려다니는 것처럼 아예 따라가는 일을 포기하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도로를 넘고 방지턱을 넘고, 도로 경계석을 넘고, 논두렁을 넘고, 검은 호수를 건너고, 이랑을 넘어서 온갖 잡초들과 풀잎들이 바스락거리는 들판을 넘어서 얼굴과 몸이 그것들에게 쓸려버리는 광경을 옆으로 누워 끌려가며 구경했다. 나중에는 누워서 산과 들이 내 벗이 되어서 함께 장관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논과 밭과 들을 통과해서 개구리들의 우렁찬 울음소리, 나무 꼭대기에 앉아 슬프게 울어대는 소쩍새의 메아리, 기분 나쁜 까마귀들의 날갯짓 소리, 풀잎들이 바람에 산들거리며 속삭이는 소리를 구경꾼처럼 넋을 잃고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촉감으로 느끼고 나중에는 기묘하게 마음이 편안하게 돌변해버려서 될 대로 되라는 자세로 남자에게 한 팔을 완전하게 빌려주고 말았다. 그러다 그 남자는 검은 산 밑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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