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죽음의 그림자와 나는 들판과 산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니까 인간과 자연의 중간 경계쯤에 서서 산꼭대기, 아니 그저 높고 까마득하게 외형을 이룰 뿐인 삼각뿔의 가장 높은 지점인 뾰족한 부분을 동시에 응시했다. 그곳엔 침묵의 우듬지들이 외롭게 자라나서 하늘 끝을 거의 찌를 듯이, 마치 신경이 잔뜩 곤두선 사람처럼 예민하게 솟아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자리에 멈춰 서더니 이제 어떤 순간들과 잠시 헤어져야 할 것이라고, 마치 이 경계에선 자신조차 잃어버리는 게 좋다며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검정 슈트의 깃을 빳빳하게 세우고 브레스트 포켓에 꽂힌 하얀 헝겊을 빼더니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고 슈트 양쪽 주머니의 수선된 부분을 아래쪽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바지 무릎 아래단에서는 보이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내고 하얀 손으로 구두에 광이라도 내듯이 위쪽과 옆쪽을 윤기 나게 닦아댔다. 아마도 그는 어떤 결연한 의지를 나에게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비쳤다.
“혹시 저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건 아니겠죠? 지금 시간에...”
“맞아. 우린 저쪽으로 당장 올라갈 작정이야. 등산화 따위를 준비하지 못한 준비성에 대해서 탓하진 않아도 돼. 넌 그저 오르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은 목적을 반드시 찾아내야 할 테니까. 고개를 돌려서 저 앞을 똑바로 보라고 무수한 덤불과 이름 없는 잡초들, 성마른 풀잎들, 그리고 죽어있는 초록 물결의 마지막 몸부림, 저 검은흙과 그 밑에 잠든 곤충들의 짧은 밤들을,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세계의 소외들을 지켜보라고, 우린 낱낱이 저런 장면들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완전한 잠에 빠지기 전에...”
눈앞엔 작은 관목들과 이름 없는 들풀들, 벼락을 맞아 불타버린 수목이 마치 무명의 옛 성의 성곽을 이루듯 촘촘하게 위아래로 배열되어 있었다. 높아봤자 인간의 힘으로 쉽게 젖혀버리든지 허벅지로 방향을 바꿔버려도 충분할 만큼 그들에겐 거의 승산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로선 의지를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터였다. 밤이 찾아오면 숲은 빛의 끄트머리에서도 완전히 배제된다. 게다가 이런 음영 지대라면 수분의 공급을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간혹 흩날리는 빗줄기에 목을 잠시 축이는 게 전부랄까. 이곳은 어쩌면 죽음과 비슷한 세계다. 하지만 여기서는 죽음도 잠시 휴식 중일 지도 모른다. 영원한 잠에 빠져 있다. 낯선 관람객의 의도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아무튼 그 남자는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로 지시를 내렸다. 바로 저 꼭대기, 얼마나 높은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산등성이 쪽의 우듬지들의 세계로 올라서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나는 그 순간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가 그다지 많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자 꾸물거릴 시간은 없다고. 여기서 연인처럼 속삭일 여유는 없어. 눈치 볼 나이는 이미 지났잖아? 왜 저기로 가야 하냐고? 이유는 없어. 다만 당신이 과거에 선택한 것들이 앞으로 꾸준하게 변칙적으로 펼쳐질 거야. 과거의 선택은 미래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은 불길한 까마귀의 날갯짓 같은 거라고 생각해두면 돼. 우리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무가치한 것들로 취급할 때,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삶의 어떤 부분을 뒤흔들게 되는지 우리는 실제로 경험해 보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과거에 낭비하거나 지나쳐버린 일들에 대해 보다 신중해질 거 아니야. 겸손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잖아. 과거의 잘못을 후회할지도 모르고. 자, 앞으로 가보자고. 올라가, 멈추지 말고.”
물론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죽음의 그림자라는 존재와 함께 어디론가 여정을 떠나게 될지, 그 끝에 치명적이며 최종적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삶의 분수령을 통과한 결국 모든 것들을 극복해낸 나 자신이 있을지 예측하긴 곤란했다. 과거 무수히 많은 순간에도 질문 없이 살아간 나, 그렇다고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고 해서, 딱히 질문 거리를 떠올리거나 의문감을 표시한다고 인생이 급작스럽게 좌회전을 할 일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나는 모든 사람을 믿지 않고 살았다. 도시가 싫어서 그 도시의 잿빛 소음에서 떠나고 싶어서 나름 고독한 산골로 숨어들지 않았는가. 물론 내가 깨끗한 신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야 겨우 고백하지만... 나는 범죄자다. 당신들은 혹시 예측했을까? 도시의 법률이건 시골의 법률이건 나는 인간의 잣대로 판단했을 때, 범법자임이 분명하다. 무슨 죄를 저질렀냐고? 그래, 그 얘기를 실토하기 전에...
나는 포의 소설을 좋아한다. 아니 거의 사랑한다고 봐도 좋다. 심지어 포의 흔적을 찾아서 보스턴으로 찾아가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한 그의 작품은 바로 <검은 고양이>다. 나는 이 소설을 초등학교 2학년 때 수백 번 읽었다. 포는 나의 인생의 가르침이자 인간에 대한 양식을 가르친 선배였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의 삶을 나는 평생토록 꿈꿨다. 하필이면 왜 살인자였던 그 남자였냐고? 그 이유는 묻지 마라. 좋아한다는 게 꼭 무슨 이유가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단지 나는 남자 주인공에게 연민의 정을 품었을 뿐이다. 연민의 정도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충분히 완전 범죄로 끝날 법한 사건, 미 종결될 사건이 재수 없게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밝혀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 내가 범죄자라고 당신들에게 고백한 이유는, 굳이 이 마당에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나도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처럼 아내를 교살했기 때문이다. 살인에는 특별한 동기가 없다. 그저 내 시야를 아내가 저 높은 산꼭대기처럼 늘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혐오한다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저런 높고 당당한 산 자체를 통째로 없애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아내를 내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간단하게 벽을 허물고 방음 공사를 하는 것처럼 아내를 그 안에 바른 후, 두꺼운 콘크리트를 벽 안에 채워버렸다. 물론 나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리석지 않다. 게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혼자서 모든 걸 해냈다. 처갓집 식구들에겐 아내가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몇 개월 동안을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는데, 미친 사람처럼 연기를 하고 다닌 것이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내 불쌍한 아내는 주인공의 아내처럼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다. 따라서 내 범죄가 밝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백 퍼센트 완전한 범죄라고 생각해도 된다. 아내를 죽이기 전에, 물론 나는 아내의 시체를 보관할 장소를 시설했다. 완벽한 방음 공사를 끝내 놓고 그 집에서 몇 년을 살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저 몇 천만 원짜리 방음 공사를 한다고 불평을 토하긴 했지만, 난 그저 미래를 생각하며 참기만 했다.
아내를 벽 속에 묻은 후, 물론 마음은 솔직히 편치 않았다. 매일 밤마다 불을 켜놓고 자야 할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렸고 지독한 불면증까지 덤으로 찾아왔다. 불을 켜면 아내가 옆에 누워서 말을 걸 것만 같았으니까. 몇 년이 지나서 나는 오디오 애호가에게 그 집을 아주 비싸게 팔았다. 심지어 인테리어에 투입된 비용까지 모두 받아냈다. 그 사람은 작은 방에 자그마한 오디오 룸을 설치한다고 했다. 나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 남자가 혹시나 내벽을 허물고 다시 공간을 정리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이미 각종 케이블과 전원 공급에 필요한 설비 공사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그 남자가 자신의 오디오 룸을 위해 벽을 다시 허물 필요는 없도록 장치해놨다는 거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제 짐작을 했을 거라고 본다. 내가 왜 밤에 잠을 못 자는지, 이 건전한 공기뿐인, 깨끗한 시골에 찾아와서도 한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지, 왜 밤마다 남몰래 나서서 어딘가를 배회하고 다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을 텐데 슬슬 납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왜 내가 잠들지 못할 때마다 가로등조차 없는 국도를 헤매고 다니는지, 오늘 만난 죽음의 그림자를 더 두려워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산 위로 올랐다. 관목을 넘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없는 길을 개척하며 올랐다. 가끔 빳빳한 가지가 얼굴을 찌르기도 했지만, 걸어가는 데는 딱히 문제는 없었다. 나는 주변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어 도끼 삼아,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방해가 되는 가시덤불이나 작은 모종 따위는 짓밟거나,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도끼처럼 생긴 그 몽둥이를 휘둘러 시야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리고 경사 60도를 이루는 높이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거의 옆 드린 채로 무릎으로 실실 기다시피 올라야 했다. 오를 때마다 내 손바닥과 손가락은 의지할 곳이 없는 바람에, 쓸데없는 풀잎이나 지푸라기를 흔들다가 흙무더기 속에 처박히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지독한 고통에 빠져서 끝도 없는 정상을 향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오를 때, 그 남자는 뒷짐 지고 편안하게 에스컬레이터 오르듯 정상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중턱쯤에서 작은 공터가 하나 나왔고 전설의 고향에서 나올법한 그런 폐허 같은 집이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