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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남자 5 (완결)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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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오르다, 미끄러지기를 수십 수백 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성곽 꼭대기를 향해서 줄기차게 그리고 무모하게 도전하는 한낱 무명 병사의 불굴의 찬 도전처럼 나는 오르고 또 오르고 멈추지 않으며, 숨을 참고 숨을 고르고 그러다가 또 지쳐서 한 자리에 가만히 납작하게 엎드려서 하얀 입김을 공중에 살포하다가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그 싸움은 오롯이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고독과의 진지한 일전에 불과했는데, 죽음의 그림자인 그 녀석은 보란 듯이 자신의 존재를 말끔히 지워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저 높은 지점, 작은 초가집처럼 생긴 저 어둡고 음침한 구석에 왜 당도해야 하는지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가슴에 새겨둔 채 무심하게 오를 뿐이었다.


버려진 폐허인지, 망가진 패잔병들의 막사인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공포의 무대장치인지 아무튼 분간하기 힘든, 어둠 속에서 '나 여기 있오! 붙잡으려면 어디 그렇게 해보시든지!'라고 숨죽이며 외칠 듯한 그 흙집은 흔히 명당자리라고 불릴 만한, 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따뜻하고 온기 있는 그 자리에 바로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빛이 숨 막힐 정도로 흘렀다. 지붕이고 외벽이고 왜소한 앞마당에도 빛이 넘쳤다. 아니, 한 밤중에 사람의 발길이라곤 천 년 전쯤에 끊어질 것이 분명한 이 낡고 어둡고 침울한 거처에 빛이라니, 그것은 그저 내 상상 속에서 나 증명될 터였다. 그래, 나는 산 중턱에 이르고 나서, 고고하고 든든한 축성을 가까스로 넘어서서, 마치 큰 보람을 획득한 탓에 세상이 무조건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탓에, 내 마음대로 그렇게 쓸데없는 의미를 갖다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밝은 상상에도 불구하고 대비되는 불길하고 불우한 시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암시하는 그 낮고 퇴폐적인 분위기는 그곳에서 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내면의 세계, 내 마음대로 조작 가능한 증오들이 조작해나가는 마음의 불협화음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 남자는 갑자기 사라졌다. 어떤 용무라도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종의 정해진 매뉴얼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 남자라는 존재, 그는 언제든 다시 원한다면 나타날 수 있고 언제든 나에게 가혹한 미래를 암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임이 분명했는데, 상징이라 함은 내 처지에서 상정할 만한 모든 악의적 가능성에 해당됐으니, 나는 어쩌면 기이한 이 현상을 앞에 두고 나름 긍정적인 의미를 대입하려고 꽤 노력했던 것 같다. 와르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온갖 죄악들과 치부들과 패악질들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질서의 세계로 규합되고 싶지 않아서, 시야를 가리고 빛을 포섭해가는 그 끔찍한 그림자의 배신 행위를 부정하고 싶어서 나는 억지로 가설을 만들어놓고 그 가설에 타당한 증거들을 하나씩 대입해가며 내가 예측하고 추정한 사실이 분명 맞을 거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현실은 바로 내가 파국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 끝엔 구원이 있을 거라는 가설이었다.


나는 그제야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시에 쓸리고 찢기고 그것이 내 손가락과 손톱 경계를 꿰뚫어가며 살갗이든 그것의 몹쓸 내부의 조직이든 모든 살아 있는 감각에 생채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어쩌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환영적 존재에게 의견 없이 이끌릴 따름이며, 모든 현실은 상상 속에서 상상들이 거짓된 이야기로 창조해 내는, 마치 철없는 양 떼를 양치기가 구석으로 휘몰아가듯이 모든 비관과 비굴한 획책과 간계와 잔인한 다스림들이 나를 교묘하게 한쪽으로 지배할 뿐, 모든 장면은 그저 믿고 싶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비의도적으로 쏠리기만 하는 거라고 나를 그 현상들을 위로하며 내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작은 점, 휘몰아치는 경계의 가장 중심점,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소실해버렸음이 분명한 그 내부로 몸을 디밀었다. 한쪽 발을 걸치면 나머지는 기계적으로 동작했다. 거침없고 순응하는 것이 전부인, 이미 한쪽 몸을 담근 마당에 나머지 반쪽을 담그는 게 무슨 대수랴. 나는 그 흙집 안으로, 황토인지 검은색 페인트로 교묘하게 칠해둔 것인지 알 수 없는 움막의 안쪽으로 서서히, 하지만 빨려들 듯이 진입했다. 그 흙집은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실, 발코니, 방, 이런 개념은 그곳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안과 바깥, 그렇게 경계를 구획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왜 그 안쪽에, 그 공간이 나를 허락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공간은 나를 소외시키려 했던 것이었을까. 내 무릎을 꿀리고 나의 죄를 그곳에 토해내려는 그러니까 죄인이라면 누구든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내세에서는 구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그런 마지막 거처라고 정의라도 내리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어차피 죄인이 아닌가. 나의 죄는 시간과 상관없이 시간과 함께 영원히 흘러가야 하는 형벌을 맞은 건 아닐까. 나는 그 순간, 분명 잠시의 회개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나의 죄를 낱낱이 토해내고 고해성사라도 큰소리로 외쳐야 하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방 한가운데 앉아서 차갑고 시리고 축축한 구들에서 벗어나 어딘가 한 구석에는 온기가 분명 있을 거야. 세상에 죄인이 어디 나 혼자뿐이겠어? 죄인이라면 누구든 이 거처를 통과해야 할 운명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정의하며,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 분명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손을 뻗어서 더듬더듬 보이지도 않는 빛줄기를 찾아내려는 게 아닌, 어딘가 따뜻한 안방의 중심지, 어머니가 늘 아랫목에 밥 한 공기를 숨겨놓던 그런 온기를 찾아 두 손을 동서남북으로 움직이도록 장치했으나 그런 장소는 이곳에 존재할리 만무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할리 없는 다정한 꽃밭 같은 곳을 찾으려고 혈안이 됐던 것이다.


포기, 나는 깨끗하게 승복했다. 나는 싸움에서 진 것이다. 이기려고 발악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쉬운 게 빠른 포기가 아니었나? 나에겐 한 뼘의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늘 빛에게 빚을 진 존재였다. 나에겐 끔찍한 다정, 잔인한 친절이 허락될 뿐이다. 그것이 나의 본래의 정체성, 나를 대표하는 성질이 아닌가. 그러니 인정해야 한다. 아니, 인정하자고 마음을 설득시키자, 이곳이 지옥으로 가기 바로 전, 어떤 교두보이자 관문인 건, 지옥을 대표하는 사자가 나와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그러니까 너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나는 어차피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늘 포기했고 그 포기의 대상은 오직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될 수 없었으며,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하고 사랑한 나머지 반쪽 따위는 어차피 모두 가면에 불과하며, 그것들은 모두 영원하지 못하니, 오직 나의 생, 나라는 존재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녔다'라고 당당하게 심판관에게 대들며 고의로 거짓말로 화답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자신 만만하게 시간이든, 세상의 정의든, 나에게 저주스러운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이든, 나는 그들 모두를 우습게 여겼다. 그래, 나에게 벌을 내려보라고, 나는 그런 벌조차 달관한 인간, 최후의 승자가 될 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비명을 냅다 질러버렸다. 그 이후, 나의 마지막 항변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만 왜소한 형태로 몸집이든 마음이든 자꾸만 부피를 줄여갔는데, 그 순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도 장대비도 번쩍 번개를 떨어뜨리며 성마른 분노를 토해 내는 여름날의 장마 같은 비가 아닌, 그것은 말 그대로 촉촉하고도 무심하게 그리고 줄기차게 한 방울이 떨어지면 또 무섭게 그다음 한 방울이 이어지는, 말하자면 구역을 균등하게 나누어가고 분절해나가는 그런 치밀하고도 일정한 간격을 그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흙집 안에서!


그 비는 차분하고 엄숙하게 떨어졌다. 눈앞의 벽이든 내가 등을 돌린 뒷벽이든 옆 벽이든 계속 흘러내려서 그 방 안에 습기를 더욱 가득하게 매웠다. 습기가 차오르면 하얀 연기가 솟아나며 주변의 온도를 0.1도씩 떨어뜨리는 듯했다. 빗줄기는 매서웠고 냉혹했으므로 이 움막의 주성분이었던 흙들이 일순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흙들은 서서히 균열의 폭을 넓혀갔다. 아래로 또 아래로 지붕의 존재들이 벽으로 세력을 규합해가며 통일된 형태로 군집을 이뤄가며, 어딘가를 무너뜨리고 질서를 어지럽혔다.


그것은 속삭였다. 비음 같은 형태로 낮은 바로크 연주처럼 불협화음들을 불규칙적으로 나열했다. 나는 그 소리를, 음성을, 소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내 살갗에 흡수하려고 그것들은 자체적으로 판단이라도 했던 것 같다. 나름 반대쪽에 서서 저항의 의미를 내세우며 내세의 화음들에 박자를 맞추며 나름 번역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움직임들은 일정하게 보폭을 유지하며 한편으로 맹렬한 상류의 흐름들처럼 나에게로 내 몸에게로 내 정신에게로 밀려들어왔다. 흙벽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너를 끌어당길 거야, 너를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릴 거야. 너를 나의 용액으로 너의 색깔을 나의 피로 바꿔치기해버릴 거야.' 그렇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AM 주파수처럼 마냥 치직거렸다.


그러다 흙벽에서 그러니까 이미 한참 전에 녹아버린 끈적끈적한 빗줄기와 죽지 못한 음성들과 끔찍한 포옹들이 일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저마다 살아 있는, 저승 너머로 넘어가지 못한 존재들, 원한이 깊은 늪지대처럼 넓고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바이러스처럼 생긴 존재들이었는데, 그것들은 같은 동작으로 비슷한 연출로 마치 누군가에게 같은 명령이라도 하달받은 자들처럼, 저승의 개들처럼, 복수의 구렁이들처럼 내 목을 순식간에 감싸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끈미끈하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비늘로 구성된 뱀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구성된 집합체였으며, 근육질로 구성된 아름다운 처녀의 양팔이었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다 결국 패퇴해버리고 만 이무기의 잔여물이었으며,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지옥으로 모든 존재를 휘몰아 처 버리는 죽음의 모든 원망들이었다.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팔들은 내 목을 감싸고 휘어 감고 에워 쌓으며 내 영혼을 꽉 붙잡았다. 내 목을 붙잡고 승모근에 뿌리를 내리고 가슴팍에 저주의 씨앗을 뿌리고 허리춤에 강력한 쇠사슬의 닻을 내렸다. 나는 점점 강력한 존재가 되어갔다.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 숨이란 것은 점점 겨울날의 마지막 햇살처럼 자꾸만 자꾸만 어디론가 숨어들었다. 나는 불안한 존재이므로 완전하게 잠식된 곳으로 숨고 싶었나 보다. 더 이상 떳떳한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가기가 두려웠나 보다. 나는 긴긴밤의 혈투 끝에 함락되었고 영혼의 복수극의 주요 등장인물로 성격을 변신하고 있었다. 나는 꽤 편안해진 것 같았다. 내 몸에 존재하는 모든 구멍이 진흙과 진흙을 반죽한 조각가의 손에서 새롭게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고 매워지고 빈틈없이 채워지고, 그 최종 싸움에서 나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진정 승리한 자로서 나의 승리에 도취되었다고 그들에게 자랑질을 하며, 나는 이제 인간으로서 터뜨린 모든 거짓말들을 회수하고 나로서 오직 나라는 존재를 버림으로써 도태된 자가 아닌, 진정으로 살아남은 하나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맞은 것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사라진다. 나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이런 결말을 맞게 될 거라고 나는 예전부터, 아내를 벽 속에 바를 때부터 예측했다. 운명은 정해진 거처로 나를 인도한다. 내가 거부한다 해도 나는 그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영원히, 회복되지 못하고, 복권될 꿈은 절대 꾸지 못하고, 끝없는 망령의 세계로, 여기와는 단절한 신비로운 마치 스노볼처럼 생긴 환희의 구체 속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나의 죄는 차츰 씻기고 있다. 그런데 내가 드러나고 있다! 빗물로 아니 그녀가 흘려버린 모든 핏불로 나는 정화되고 있다. 그래, 오늘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난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이 거처가 몰락해가는 과정에 동참함으로써, 나는 순금으로 변신한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믿어야만 한다. 그런데 점점 숨이 막혀올수록 내 남은 숨이 수명을 다해갈수록 나는 불안에 빠진다. 아… 이게 아닌데, 으… 내가 원한 결말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내 해석은 그럴싸했는데, 여기에 남은 건 복수극뿐이로구나. 복수의 결말은 공허할 뿐이로구나…


죽음의 그림자는 벽 속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은 하나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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