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왔다. 주머니에게는 사정이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에겐 나름의 사정이 꼭 있어야 한다. 나에게도 몇 가지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 빈곤한 사정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다. 지면상의 측면도 있고 표현상의 한계도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저 읽고 지나처 버리면 그만일 뿐이다. 어차피 모두 지어낸 이야기일 테니까.
내가 도서관에서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를 빌려온 것은 얇은 주머니의 속사정과 가볍게 부담 없이 가볍게 책을 읽고 싶다는 사정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굳이 분류하려는 건 어떤 의도가 포함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른 생각을 급작스럽게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란 인간은 원래 즉흥적이고 떠오르는 대로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인간이니까.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책을 빌려와서 나름 진지한 자세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집엔 진지한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몇 달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지 주변은 온통 하연 먼지 가루들과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다. 과자 부스러기와 라면 봉지, 읽다만 헌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 난잡한 환경을 개척하려고 마치 홍해가 쩍 반쪽으로 갈라지듯이 나는 손에 잡히는 막대기 같은 물건으로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양방향으로 분류해놓곤 좌식 책상의 다리를 폈다. 그리고 그 위에 독서대 위에 《테스트 씨》를 펼쳤다.
그런데, 아뿔싸 내가 이 책을 빌려온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경에 봉착하고 말았다. 뭐야? 이유가 뭐야. 왜 폴 발레리인데? 프랑스의 대문호라는 작가 소개를 보고 빌려온 거야? 네 수준은 생각하지 않고? 후회가 막심했다. 차라리 낮잠이나 실컷 잘걸.
한 손으로 페이지를 주욱 넘겨봤다. 글자들이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절대 구경할 수 없는 일생의 멋진 쇼를 펼쳐보고 다시 그 짓을 반복했다. 하지만 역시 지루했다. 책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던 순간도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어보자, 유시민 작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정말로 좋은 책이란, 아무 페이지를 펼쳐놓고 읽어도 재밌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을 그때 갑자기 기억해내고 겨우겨우 읽다, 중간쯤? 어딘가 걸리는 느낌이 드는 부분을 랜덤 하게 활짝 열었다.
거기엔 '대출확인증'이라는 포스트잇보다 작은 종이가 꽂혀 있었다. 사용자명은 김해*, 대출일은 2017년 11월 10일 오후 1시.라는 거의 지워질 지경으로 변해버린 회색 글자가.
오늘은 2023년 1월 8일, 2017과 2023의 간극을 계산해 봤다. 정수와 실수, 명확함과 모호함,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이 두 가지 숫자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 무엇이 건설되어 있는지 대체로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이를 거쳐가고 건너간 것들에 대해선 잠시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대출확인증은 하나의 페이지와 또 하나의 페이지 사이에 걸쳐있다가, 나비가 춤을 추듯 나풀나풀 좌식책상 밑으로 문득 떨어졌다. 아주 느리게 시간을 현재에 붙들어 놓은 채로, 영원히 꺼져버릴 듯한 모양새로 추락하던 종이는 나에게 의문을 던졌다.
'김해*" 그리고 2017년. 난 일기장을 뒤져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2017년 11월 10일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직장에 있었을 테고, 거기서 말없이 일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말하자면 나는 의미 없이 아니 의미 따위는 찾으려는 생각 없이 그저 관성적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오늘 2023년 1월 8일과 2017년 11월 10일이 나타내는 지점엔 별다른 차이점이든 개성점이든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으리라.
2017년 11월 10일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 13시라는 시간에 도서관에 방문해서 책을 빌린다는 것은 여간해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의 두 글자만 확인이 가능한 그 사람이 금요일 13시에 도서관을 찾아갔다는 사실에 각별한 관심이 갔다. 하지만 나와 2017년의 김해*씨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조차 찾을 수 없다. 물론 서로 똑같은 책을 빌렸다는 면에서 우리에겐 어떤 동지와 같은 측면이 존재했지만.
놀라운 것은 프랑스의 대문호라고 소개된 폴 발레이의 이 책이 2017년 이후로 대출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 아무도 이 책을 찾지 않았다. 무려 7년이 흐르고 나서야 이 책은 두 번째로 읽힐 운명을 맞았다는 얘기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이 책에도 각별해졌지만, 이름 모를 김해*라는 사람과도 더 친근해진 기분이 들었다.
'데카르트의 삶은 가장 단순하였으니'라고 시작되는 이 책을 나는 진지한 자세로 읽어보기로 했다. 나는 평상시 책을 거의 읽지 않지만, 실직 이후로 다른 삶, 더 한가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했으니 이런 작은 우연 덕분에 책에 집중할 이유를 겨우 찾은 것이다. 책장을 넘기기 거의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독서라는 작업에 충실했던 이유는 이야기 끝에쯤에 다다르면 뭔가 색다른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달까.
그러다 나는 다시 두 번째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쇼핑몰의 영수증이었다. 그녀, 내가 그녀라고 말한 것은 그 영수증에서 그녀 이름의 세 번째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수증엔 하이트 피쳐 1리터, 유기농찌개두부 300그램, 윌슨여성단복파일 5족, 온더바디 더내추얼이라는 상품 목록이 적혀있었다. 합계 17,260원. 시간은 2017년 11월 10일 13시 40분. 그렇다, 그녀는 그날 도서관에 들러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를 대출하고 곧바로 대형쇼핑몰로 발걸음을 돌려 쇼핑을 한 것이다.
책 한 권을 빌린 다음의 목적지는 쇼핑몰이 제격이 아닌가. 나는 상상을 한다. 책 한 권을 빌리고 쇼핑몰에서 구매한 물건이 가진 17,260원이라는 물건의 값어치를.
책은 대출의 대상일까? 쇼핑의 대상일까? 나는 책을 쇼핑하지 않는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원래 책을 읽지도 않으니, 책을 사야겠다는 결정은 거의 1년에 한 번 정도다. 그러니 2017년의 그녀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곧바로 쇼핑몰에 찾아가, 쇼핑할 물건들을 만지작 거리거나, 곧바로 어떤 물건을 쇼핑했다는 사실은 보다 현실적인 의미가 다가온다. 현실은 오직 현실일 뿐이다. 현실은 환상의 범주일 수 없다.
대출확인증 도서명엔 '테스트 씨'라고 적혀있다. 테스트 씨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폴 발레리가 쓴 책 제목이라는 명제가 놓여 있으니, 여기서 시사하는 테스트 씨는 사실상 폴 발레리 자신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테스트 씨는 어쩌면 나 자신이거나 나의 분신일지도 모른다. 테스트 씨는 나일뿐만 아니라, 2017년에 책을 빌린 김해* 자신 일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테스트 씨이거나, 테스트 씨가 아니거나, 테스트 씨였거나, 앞으로 잠재적인 테스트 씨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 마지막엔 내가 폴 발레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한다.
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내 안에 무수히 많은 테스트 씨들, 내 인생에 거쳐왔을 모든 테스트 씨를 생각하곤 심각한 피로가 몰려와 좌식 책상을 옆으로 미뤄두고 낮잠을 자기로 했다. 낮잠 속에서 2017년의 김해*씨를 만나 2017년과 2023년의 다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