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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다는 소리는 이제 집어치워

글 못 쓰는 얼간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장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제1화 : 그 남자의 솔깃한 제안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전에 남자가 건넨 태블릿부터 작동시켰다. 바탕화면엔 이렇다 할 앱 같은 것도 심지어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기본 앱조차 없었다. 하나 뿐인 '무제' 폴더를 클릭하고 내용물을 다시 확인했다. 그 안에는 남자가 몇 십 년 넘게 메모했을, 그러니까 글알못, 글 못쓰는 얼간이들을 위한 자료들이 철옹성처럼 빽빽하게 망루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글쓰기 수업을 5년 넘게 리딩 해온 사람이 아닌가? 나름 이 업계에 아름아름 알려져 있다. 5월엔 대기업과 제휴하여 글쓰기 과정도 개설하기로 확정했다. 이석현이라는 이름은 몰라도(아니 노션 전문가로 알려지긴 했지만……) 공심(공대생의 심야서재)이라는 닉네임을 기억하는 사람이 꽤 있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그 남자가 유명한 소설가라고 해도 무작정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남자가 만든 자료의 제목만 대충 훑어보곤 바로 옷소매를 걷어붙이곤 태블릿을 꺼버렸다. 남자의 의견은 그저 참고 대상일 뿐이다. 글이란 것은 순전히 나의 창조적 발상만으로 전개해야 한다. 프로젝트란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를 받아서 일을 하는 사람의 순수한 의지와 역량 그리고 지식만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 남자는 내 경험의 무게를 믿고 일을 의뢰했을 것이다.


컴퓨터를 켜고 스크리브너를 실행했다. 그리고 노션 제텔카스텐 페이지를 연 후, 메모해놓은 사람들이 글을 쓰지 못하는 사례들을 검색했다. 몇 가지 글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곧바로 생각나는 대로 마치 법원 속기사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완성해놓고 이 글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기고한 글이라고 우기면 된다. 다소 무책임하고 비겁하긴 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인격과 품의를 등한시한 인생을 살아왔으니 지금도 뒤로 살짝 물러서면 된다. 내가 전면에 나서 있지만, 나는 그 남자를 방패로 삼아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미션 #1

제목 : 글 못 쓰는 얼간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장 - 시간이 없다는 소리는 이제 집어치워


시간? 시간이 없다고? 나도 시간 없어.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어디 드라마에서 사용된 진부한 대사를 끌고 왔지만, 시간은 원래 없어. 아니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 없는 시간을 끌어와서 핑계 대지 말고, 솔직한 이유를 대보는 게 좋지 않겠어. 엉?


엄밀히 말하면 너에겐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글을 쓸 시간이 없다는 말이 더 맞을 거야. 그런데 넌 여기저기 모임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언제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 채팅방에서 이별 인사를 짧지만 우아하게 남기려다, 대신 비겁한 늑대처럼 조그맣게 으르렁거리다 사라지곤 했지. 운영자에게 내민 변명 거리는 늘 똑같아. 그 지겨운 레퍼토리 이제 좀 바꾸면 안 될까?


너에게 없는 건 시간, 그러니까 24시간이 아니잖아. 너에겐 매정하게도 시간이 하루 2시간뿐이고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시간이 48시간처럼 넉넉하게 늘어나는 건 아니잖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하루 24시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아널드 베넷이 그랬잖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굳이 내가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불러내서 시간 개념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너는 그의 사상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너에겐 시간이 늘 없을 테니까. 너는 절대 이해하지 못 할 거야.


솔직해져 보자고. 너는 글쓰기를 아주 우습게 생각했어. 블로그만 개설하면 글이 막 저절로 써질 줄 알았잖아. 네 친구가 그랬고 블로그 이웃이 매일 글을 쓰는 것을 구경하면서 너도 충분히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믿었을 거야. 꾸준함 따위는 누구나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 하루 커피 마시는 시간?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처럼 일이십분 투자하면 글이 자판기에서 퉁 하고 튀어는 제로 콜라처럼 간단할 거라 믿었겠지. 시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없으니 시간을 줄여보겠다고, 그러니까 생산성을 올려보겠다고 chatGPT에게 월 2만 원씩 가입비를 냈을 지도 몰라. 비싼 돈을 지불해놓고 매일 얼간이 같은 질문만 퍼부어댔겠지. chatGPT는 앵무새 같은 답변만 반복했을 거야. 앵무새 모양으로 물으니까 앵무새처럼 대답을 했겠지. 너는 그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 이런 식의 아주 두루뭉술한 질문만 던졌을 게 틀림없어. 어쩌면 chatGPT가 그럴싸한 문장을 써줬을 지도 모르지. 운 좋게 월척이 걸려들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웬걸? 나름 chatGPT의 도움을 받다가 자존심이 상해서 실제로 써본 거야. 그런데 생각보다 힘드네. 너무 고통스럽네? 즐겁고 신이 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화딱지만 나네? 인생도 마음대로 주무르기 힘든데, 글은 더욱 내 의도와는 반대대로 전개되네? 내가 글의 커맨드 센터가 아니라, 글이 나를 막 휘둘러대네. 이딴 걸 내가 왜 시작했지? 후회가 치밀어 들지? 모임에 25만 원 결제 했는데, 그 돈 따위는 1도 소중하다고 생각 들지 않아. 내 소중한 시간을 이 따위 글쓰기에 허비해버리는 것 같아. 그래서 그 길로 광속으로 방 탈출을 감행해버리지. 내 소중한 시간 의미 있는 곳에 써야 하잖아.


그래서 너는 너 스스로의 판단을 돌이켜버려. 글을 쓰지 않는 말하자면 널찍했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자유를 얻었다고 착각하는 거지. 얼마나 좋아? 다시 시간이 짠 하고 새로 생겼는데.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 거야. 뭐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나는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너는 언제나 시간을 제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핑계라곤 시간밖에 없는 거야. 너에겐 책임의 멍에를 절대 짊어주기 싫은 거지. 그게 합리화야. 너의 끈기 부족, 나약한 인내력, 꾸준하지 못함을 포장하는 변명 같은 거라고.


그러니 앞으론 시간이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핑계는 대지 마. 나도 너도 모두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솔직하고 명료하게 말해. 빵 먹을 시간, 설탕이 엄청 들어간 돌체 라테를 마시면서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유튜브 숏츠 영상 볼 시간, 넷플릭스 드라마 보는 시간, 게임할 시간, 밥 먹을 시간, 잠 잘 시간, 화장실에서 큰일 볼 시간, 주말에 늦도록 퍼 잘 시간, 이런 다른 모든 시간에서 글 쓰는 시간이 밀렸다고 말하라고. 엉?


글 쓰고 싶어? 그럼 글쓰기를 삶의 최우선 순위로, 제일 간절한 순위로 격상시키라고. 그렇게 하기 싫다고? 그럼 글 쓰겠다는 소리는 두 번 다시 하지 마.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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