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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솔깃한 제안

얼간이들에게 던지는 최종 경고장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그 남자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은 것은 지난 금요일 저녁이었다.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제안 그 자체로서 흠잡을 만한 포인트가 전혀 없는 티끌만 한 결함조차 없는 제안. 요즘 나는 자의적으로 재택근무에 심취한 상태이긴 하지만 소기의 목표였던 퇴사를 쟁취하지도 못했고 2년째 연봉도 동결된 상태라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나의 퇴사를 조금 빨리 당겨주지 않을까, 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만나서 자세한 요구사항을 들려주겠지만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말했다. 몇 십 년 넘게 IT 회사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자주 만난 고객들이 건넨 말도 그 남자와 별반 다르진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하답니다. 화면 몇 개만 대충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이런 어이 없는 복잡함을 감춘 요구사항 같은.


남자는 고덕역 부근 그러니까 스타벅스 명일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그 스타벅스 지점을 자주 가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난번 행색이 아주 멀쩡한 할아버지가 고디바 초콜릿을 훔쳐 간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로 더 그 지점을 자세히 기억 속에 저장하고 있었으니, 그곳을 찾아가서 2층 후미진 구석 자리를 찾아간다는 건 동네에서 치킨 다리를 뜯으며 걸아가 고도 남을 법한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남자와 2시 정각에 스타벅스 명일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최대한 편하게 카키색 면 반바지와 그레이 색깔의 티 셔츠를 입고 베트남에서 사 온 검은색 크록스를 신었다. 그리고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는 백수인처럼 그 지점으로 천천히 찾아갔다. 내가 그 남자를 어떻게 판별할 수 있냐고 물으니, 2층에 올라오면 당장에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 남자는 첩보원처럼 말했다. 나는 마치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와타야 노보루가 가노 마르타를 만나는 기묘한 장면을 연상했다. 분명 이 남자는 하루키의 소설을 심취했음이 분명했으리라.


1시 58분에 2층으로 올랐다. 나는 아래층에서 쓸데없이 굿즈를 구경하며 일찍 도착해버린 시간을 낭비했다. 20분을 그렇게 흘려보내고 2층에 오르니 역시 나는 대번에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유튜브에서 얼굴 공개하기를 꺼려 하는 남자처럼 늑대 가면, 아니 늑대 투구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나를 알아본 것인지 손을 들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나는 쭈뼛 거리며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살짝 긴장했지만, 사람들은 예상보다 타인에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늑대 투구? 아니 개 가면 쯤이야 이제 일반적이지 않나?


나는 자리에 앉아서 메뉴라도 하나 주문해야 하는 게 아닌지 두리번거려야 할 것 같았는데, 테이블에는 이미 아아가 2잔 예비되어 있었다. 음. 역시 매너 있는 남자네. 남자는 뭔가 말을 시작하려는지 주머니에서 보이스리코더 같은 것을 꺼내서 작동을 시켰다. 그리고 남자의 말이 플레이? 아니 시작되는데 마치 바람 빠진 헬륨 풍선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변조된 채로 투구인지 몸인지 알 수 없는 말하자면 온몸에서 음파가 진동? 아니 발산한다고 해야 할까. 수렴한다고 해야 할까. 나는 대체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작은 변조 장치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신분을 숨긴 채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 바랍니다. 먼저 제가 무례하게 연락을 드리고 만나자고 했는데, 이렇게 흔쾌히 응해주셔서 더 감사드리고요. 제가 누구인지는 공개할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저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업계에서 꽤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죠. 이미 예측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이 바닥에서 이름이 꽤 팔려있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 작가님을 만나자고 했냐 하면요 특별하게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였습니다.”


나는 그 남자의 부탁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내가 1년 동안 벌 수 있는 금액을 일시불로 지불한다는데, 그 일이 누군가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승낙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짐짓 심각한 자세, 뭔가를 고심하는 사람처럼 한 손을 턱 밑에 받치고 생각하는 척을 했다.


“다름 아니라 제가 요청드리는 일은 이 선생님의 직업과도 연관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제 직업과도 관련이 있죠. 이를테면 말입니다. 한 작가에게는 개량된 이미지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키에게는 하루키에게 어울리는 이미지, 폴 오스터에게는 폴 오스터만의 이미지, 또 카프카에게는 또 그 나름의 이미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저에게 구축된 그런 개성적인 세계를 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네요. 이미지는 뭐고 개성적인 세계는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마치 선생님 소원풀이 같은 걸 대신하라는 투로 들립니다. 어디 가서 선생님 대신에 누군가의 귀싸대기라도 한 방 올리고 올까요? 일종의 심부름센터 같은 건가요?”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폭력적인 것, 그러니까 잔인한 복수극 같은 것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저 대신 글을 써주시면 됩니다. 제가 요청하는 글을 40편만 써주시면 됩니다. 글 한 편당 정해진 분량은 없습니다. 단 40편만 써주시면 됩니다. 또한 기한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계약기간 내, 즉 1년 내에만 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글은 이 선생님의 블로그에 게재해 주시면 됩니다. 다른 요청사항은 없습니다. 제가 요청드린 주제대로 글을 꾸준하게 발행만 해주시면 됩니다.”


“흐음… 그 글의 주제란 무엇일까요? 혹시 반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그러니까 좌파 혹은 우파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담은 그런 글은 아니겠지요?”


"제가 아까 소설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소설가도 책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어서……. 음, 나름의 인세 수입이 충분하긴 하지만, 이 작가님도 아시는 것처럼 와이프 몰래 자금을 운용하려면 이래저래 부업활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제 직업과 관련은 크게 없지만 사적으로든 혹은 공식적으로든 여러 수업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혹시 그것이 글쓰기 수업 같은 건가요?" 내가 뭔가 아는 사람처럼 물었다.


"네 맞습니다. 도서관이나 교육청 같은 곳에서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은 없어도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작가로서 인정받은 사람이 쉽게 돈 버는 일은 누군가에게 글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 일이 생각보다 수입이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푼돈이지요. 또 신경은 얼마나 쓰입니까? 되먹지 않은 글을 매일 읽어야 하고 첨삭 지도도 해야 하고, 소설 쓸 시간도 부족한데 지도하느라 요즘은 원고 집필 시간조차 없는 실정이랍니다. 하하."


"게다가 수업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에요. 몇 십만 원의 돈을 지불해놓고도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아요. 한두 번 해보고 적성이 아니라고 혹은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도망쳐 버립니다. 나로서는 돈 써놓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이거 너무 무책임한 일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글을 쓰러 소설가를 찾았나 모르겠어요. 그저 수업만 들으면 아니 4주 동안 글이라도 써내면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될 줄 알았답니까? 그런 사람들이 불만은 또 뭐가 그렇게 많은지요. 제 유튜브까지 찾아와서 악플을 달고, 이제 그런 사람들한테 완전히 지쳤습니다. 이 작가님도 잘 아시겠지만, 어디 글 쓰는 일이 몇 달 만에 뚝딱 되는 일이랍니까? 몇 년을 아니 몇 십 년 동안 등단조차 못하는 작가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나를 지칭하는 것 같아서 한숨이 나왔지만, 피해의식인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번 일이 정치색을 가진 것은 아닌지 물었다.


“아… 그런 글은 아닙니다. 다만 약간은 불편한 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특정 대상에게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누군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건 아닙니다. 어떤 대상, 혹은 집단을 타깃으로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신체나 심신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던 생각들을 제가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서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인가요?”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들은 바로 얼간이들입니다. 멍청이, 어리석은 인간들이죠. 무책임하게 글쓰기 판에 뛰어든 무개념 종자들이죠. 문제는 그 얼간이들이 자신의 주제 파악을 전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허황된 꿈을 깨뜨려줘야죠. 제가 표방하고자 하는 글은 그들을 교화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그동안 구축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날서게 비판하는 일은 저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 작가님에게 요청을 드린 겁니다.”


“그러니까 저를 총알받이로 쓰시겠다는 얘기네요?”


“비유하자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남자가 바람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1년 치 연봉에 해당되는 비용을 드리겠다는 겁니다. 선금으로 50%, 프로젝트를 완수하시면 잔금을 드립니다. 게다가 인센티브도 있습니다. 1개월 내에 작업을 맞춰주시면 50%를 추가 인센티브로 드리고 3개월 내에 맞춰주시면 25%, 6개월 내에 맞춰주시면 10%의 인센티브를 드립니다. 괜찮은 조건 아닌가요? 그저 비판적인 글, 팩트를 때리는 글,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선순위에 대충 올려두는 일이 되면 안 되는지, 얼간이들의 얄팍한 심성을 파헤쳐 주시면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에서 깨어나오지 못한 채 이상한 희망에 붙들려 있는 그들을 구원해 줘야죠”


남자는 그러더니 두꺼운 종이 뭉치를 던질 것처럼 큰 동작을 펼쳤으나 실제로는 태블릿 한 대를 나에게 내밀었다. 거기 온라인 계약서에 서명을 해주시면 되고요. 안에 구글 드라이브 폴더에 보시면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들을 교화시킬, 아니 그들의 현실을 일깨워줄 데이터가 좀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일을 마무리 잘 해주시면 다음 프로젝트도 바로 진행할 수 있으니 일을 빨리 끝내주실수록 좋답니다.”


남자는 태블릿 한 대를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기계적으로 서명을 해버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 아닌가. 퇴사를 앞당길 지도 모르는데, 게다가 글 쓰는 일이라는데 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경력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서명을 마치고 구글 드라이브 폴더를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루트 폴더에는 텍스트 파일이 하나 있었고 파일명은 ‘글쓰기 전에 이 파일을 꼭 먼저 열어주세요’라고 쓰여있었다. 파일을 열어보니 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제목 : 얼간이 갱생 프로젝트

대상 : 글 못쓰는 얼간이들, 글쓰기가 쉬운 줄 아는 겁보들, 무엇이든지 쉽게 보고 뛰어드는 천둥벌거숭이들

목적 : 글을 쓰지 못하는 얼간이들의 정신 상태를 개조하여 글을 잘 쓰는 작가로 탈바꿈 시키기

방법 : 에세이 40편 쓰기

문체 : 반드시 대화체로 쓸 것(평사체)

참고 자료 : 100종 이상의 참고문헌, 논문, 책(필요한 참고문헌은 태블릿 내부에 동봉한 신용카드로 구매 가능, 영수증 증빙할 것)

기한 : 첫 편 발행 후 1년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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