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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20. 2022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을 읽고 난 후의 단상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고 있다. 하지만 읽는 것에 겨우 그치고 낮기 만한 나의 문해력에 기준을 기댈 수밖에 없던 나는 또 무지의 태엽 시계를 무한히 거꾸로 돌리며 안락하고 평화로운 뒤뜰에 몸을 차분하게 뉘이며, 그 위험한 선이 어디까지 솟아오를 것인지 혹은 누구나 바라는 그 문학적 성취에 근접할 가망성이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금이라는 시점에 만족하기만 했다. 읽었다는 것에 단순하게 초점을 맞추고 낮은 성숙도를 감안하는 것은 자존심의 범주 바깥의 일이며, 그렇다고 내가 그의 생애를 그대로 이행할 책무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를 따르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해도 아무도 그 사실을 긍정할 수 없으니, 나는 또한 부족한 나의 수준을 생각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요즘 거의 밤마다 악몽을 꾸는 편이다. 물론 낮은 기억력 탓에 과연 내가 악몽을 꾼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별하긴 힘들다. 그저 그렇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삶은 영락없이 불길한 기운, 즉 죽음과 가까운 곳으로 자꾸만 기울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석연찮은 꿈을 자주 꾼다고 해서 횟수를 기록할 만큼 내가 치밀한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기록하건 하지 않건 어차피 일어날 일은 언젠가 밀물이 쳐들어오듯 터지고 말  테니까. 악몽 속에서 불운하게도 나는 프루스트도 카프카도 아니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닌, 먼지 분자보다도 못한 하릴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나는 악몽 속에서도 소외됐다. 나중엔 거의 지워질 정도로!


그곳에선 가위든, 끔찍한 비명이든 어떤 소리도 장면도 재생되지 않는다. 내가 악몽이라고 과중한 표현을 쓴 것은 눈을 감고 내가 잠과 허무 사이에서 방황할 때마다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실, 망각, 잃음, 나중엔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놓고 내 방 작은 침대 위로 돌아왔는지 자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감정만 느끼기만 했다. 내 악몽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포들은 바로 무위를 구성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내가 과거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몽을 꾸어왔다. 그 사실은 현실이 악몽보다 더 악독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주지만, 그 위안이 내 삶에 긍정적 서신을 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악몽은 악몽을 불어오는 충실한 수행원이고 악몽보다 더 극악스러운 현실은 악몽의 하수인이다. 그 악몽보다 더 잔혹한 현실이라는 뼈대로 만든 갑옷을 둘러 입은 그 미친 망령들은 프루스트의 작품 속으로 내가 더 깊이 침잠할 때마다, 더 강렬한 에너지에 내가 포섭될 때마다 빈번히 잡음을 일으키지만, 난 오히려 그 사실이, 내가 그의 제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그의 아름답고 잃어버린 시간과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그의 메제글리즈, 게르망트 두 길을 연상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반대로 들뜨게 만들었다.


누구나 거쳐갔을지도 모를 그 평범함의 위안이 과거 내 시간에도 한 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나 역시 감격하며 나 또한 프루스트의 영혼을 잠시 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시간을 나에게로 한정하며 꿈을 안겨 준다. 나는 그래서 늘 주위를 더듬는다. 나에게도 따뜻한 홍차가, 달콤한 마들렌이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은 거짓으로 포장되지만, 나는 그 거짓으로 똘똘 뭉친 그 과거에 색채를 입히며 보란 듯이 관찰자가 아닌 생애의 중심인물로서 말하자면 나는 화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비유적으로 연출자가 되는 것이다. 내 기억을 되살리는, 심연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추억들을 중심부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프루스트 현상, 어떤 사소한 단서가 죽은 환영들을 불러와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의자에 앉혀놓고 나는 그들의 진술을 듣기 시작한다. 나는 끊임없이 왜곡의 자장 속에 묶여서 받아쓰기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환기하며, 그것들이 들려줄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꿈은 현실의 외곽에 놓여 있고 꿈은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왕복 운동한다. 잦은 움직임이 일어날 때마다, 이곳에서 균열이 파동이 물결처럼 춤을 추고 나는 또다시 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사실은 나를 악몽의 가운데에서도 꿈에서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안긴다.


시간은 멈춰있다. 이곳에 내 방 작은 테이블 위에, 교보문고에서 구매한 시그니처 독서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시간은 마지못해서 절망한 채 내 공간을 넘실거리며 흐른다. 아니 흐른다고 내가 상상하고 간주할 뿐일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인간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한계성을 체감하지만, 가끔은 체념하거나 잠시 망각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그것은 내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한 위대한 작가의 보잘것없는 생애와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긴 문장과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묘사와 주체하지 못하는 콩브레의 어느 평화로운 순간 덕분일지도.


잠에 들어야 한다. 눈을 감고 암흑의 세계를 몽상하고 절대적인 무의 세계를 그려내려고 노력하지만, 내 몸은 무거워지고 매트리스 속으로 처박히고 자국을 내다가, 억눌리고 하염없이 어둠 속으로 꺼지다 못해, 그 무게와 부피감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나를 억지로 끌어올리다가 용수철에 튕겨 올린 것처럼 공중으로 먼지의 구름 너머로 내던져진다. 공중에서 나는 폭발한다. 엔트로피는 무한대로 증가하고 불규칙함과 소용돌이는 강렬한 태풍을 생산한다. 나는 잠에서 겨우 해방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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