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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pr 23. 2023

너는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해


너무나 읽기 어려운, 그러니까 난해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책을 겨우겨우 완독해냈다. 완독하고 나서도 대체 이렇게 어려운 책을 왜 읽는 거야, 라고 나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도 내가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기만 하다. 


어려운 책은 아주 가끔 읽지만 보통 내가 찾는 책은 늘 이런 식이다.

1. 부드러운 화이트 와인처럼 술술술 넘어가며 읽히는 책.

2. A가 나오면 B가 나오고 다시 나의 예측대로 C가 나오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갖는 책.

3. 무엇이든 정답만 일관성 있게 제시해 주는 책.

4. 매끄러운 번역을 자랑하는 책(수동태, 번역체 지양)


물론 지금도 나의 선호도 혹은 취향은 바뀌지 않는다. 웬만하면 쉬운 책, 무난하게 잘 읽히는 책, 말하자면 10페이지 정도라면 적어도 10분 이내에 읽어낼 수 있는 류의 책만을 고른다.


요즘 나오는 자기 계발, 에세이들은 위에서 제시한 기준을 지킨다. 실용이라는 단어로 치장한 책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책들은 딱히 독서토론에서 다룰만한 그러니까 치열하게 디베이트(debate) 할만한 발제들조차 가지지 못한다. 반론이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다. 내가 울고 싶은 것은 나조차도 그런 책을 만드는데 앞장 섰다는 사실이다.


어제 완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리고 요즘 읽는 중인 《돈 끼호떼》는 일반적인 책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책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걸까? 고전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도 인물의 생각하는 방식도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심지어는 문체까지도 일반적인 것과는 멀다. 이 세계의 절대적인 중심인 나, 내가 세운 가치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완벽한 나의 자유의지를 꺾는다. 그런데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에 강하게 붙들려서 억지로 어찌어찌 읽어내곤 있다. 읽으면서 고통을 잔뜩 느끼지만 어쨌든 읽어내곤 있다. 꿋꿋하게.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도 존재한다. 내가 몰락하면 세상이 존재한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나는 이기적이다, 아니 거의 에고이스트라고 고백한다. 글쓰기는 에고이스트가 집착한다고 한다는데, 맞는 것 같다. 나는 나에게 집착하고 내가 내린 결정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잘못된 판단조차 때로 합리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나는 피해자일 뿐이며, 세상이 잘못됐기 때문에, 타인이 만든 문제 때문에 나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는 절대로 믿는다. 믿음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보통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처럼……. 부인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저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라고 자본주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는 '내'가 첫 번째라고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져 왔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나를 위해 디자인된 시스템에 적응해 온 것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이 이름을 꼭 기억해 두자.


작곡가이자 편곡가 데이비드 포스터가 아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어느 소설가(아마도 하루키?)의 책에서 잠시 언급된 적이 있는 이름이다. 그 작품 속에서 월리스는 46세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월리스라는 이름이 그 소설가의 작품에 등장한 가상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어떤 우연한 작용, 어떤 힘에 이끌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책을 읽게 되었다. 아니다, 이 기억조차 왜곡된 것이 분명하다. 유튜브인가? 누군가의 추천인가? 인터넷 게시판인가? 아니면 우주의 절대적 중심인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인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이것은 물이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분명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이것은 물이다》


물이란 무엇인가? 물은 물이고 공기는 공기로다. 물은 원자라는 물질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파동이자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물이란 것은 대체 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주변에 존재하지만 왜 존재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갑자기 원자들이 생겨났고 우연한 움직임 덕분에 물이란 것도 생겨났다. 흔하디 흔한 공기도 마찬가지겠지. 물을 이야기하면서 공기는 왜 끌고 왔을까? 나는 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우리 주변엔 물도 있고 공기도 있다. 항상 우리 옆에 그것은 친구처럼 존재한다. 굳이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 의미를 살펴보지 않는다. 굳이 사고하려 들지도 않는다.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현상조차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고 해석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늘 존재하는 건데 뭐 하러 사유해?


그래, 우린 그래서 책을 읽는다. 정보를 얻기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타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배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나는 나에게 편한 책들만 고른다. 편식이 여기서도 이어진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찾고 비슷한 관념을 만나고 비슷한 선택을 앞으로도 계속한다. 나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고 그 가치에 따라 고정적인 선택만 반복한다. 


월리스는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 나타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설정된 그러니까 만들어진 '디폴트 세팅'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타인이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의심하라고, 자기 자신이 절대적이라는, 오직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라고 말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생각하기 위해, 내가 유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을 벗어나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책을 읽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인문학 > 독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 배우고 내부에서 소화시키기 위해 습득한다. 하지만 우린 편한 것을 선호하고 귀에 듣기 좋은 소리에만 집착한다. 성공하고 싶다고 그렇게 외치면서도 오직 자신 만을 생각하는 편협한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인을 공부하지 않고,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을 배우려 하지 않고, 나만의 틀만 고집한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선생님에게 부모님에게 배워왔다. 내가 최고라고, 나의 신념만이 유일한 선이라고, 나의 믿음이 나를 살린다고. 나는 피해자다!


우리는 생각하는 법을 오래전에 배웠다. 아니 배울 필요도 없이 생각하는 법은 우리 스스로 터득했다. 그런데 그 생각의 기준은 우리 자신에게만 있다. 나의 생각은 오직 나를 이롭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절대적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만 따른다. 딱히 선택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선택만 하면 되니까. 디폴트 세팅!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 우리가 고등 교육을 배우려는 이유는, 선택을 잘 하기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선택은 내가 중심이 아니다. 나를 떠나라, 아니 버려라. 이제 관점을 돌려야 한다. 세상의 중심엔 내가 없다.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을 우선시한다. 이타적인 게 아니다. 선택하는 순간을 맞았을 때, 전형적으로 나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잠시 타인의 입장도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냥 관점을 잠시 비틀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받지 않았지만 바꿔야 한다. 세상 모두가 이기적인 인간들로 변해가서 오직 자신만의 자유만 따지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타의를 위해 선택하는 생각을 배우기 위해 인문학이든 책이든 배우는 것이다.


메타인지는 나를 벗어나서 조금 멀리 나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타인의 관점에서 나의 생각과 행동을 관찰한다. 그리고 나와 타인을 동격으로 둔다. 그렇게 될 때, 그런 겸손한 자세를 갖출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생각을 갖게 된다.


월리스의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이렇게 글을 썼지만 과연 내가 나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월리스의 선택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의 문장을 소개하며 긴 글을 정리한다.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말입니다.《이것은 물이다》

서점으로 달려간다. 월리스의 다른 책을 구입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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