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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습격하다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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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령 S자 고갯길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중이었다. 옆 자리에는 군대 동기인 주열이가 한참 전부터 침을 질질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저 녀석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떨어져도 세상모르고 처 잘 놈이야, 아주 천하태평이로군.’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옆문을 몰래 열고는 녀석의 엉덩이를 강하게 걷어차는 상상을 했다. 이 옛길 밑으로는 이제 미시령 터널이 뚫린 덕분에 위태로운 고갯길을 일부러 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1단으로 기어를 놓고 슬슬 올라가면 그만이다. 오를 때는 공포가 실감 나지 않았는데 내려갈 때는 상황이 딴판으로 달라졌다. 브레이크 패드가 나갈까 봐, 엔진 브레이크를 요령 있게 쓰면서 핸들을 요리조리 돌리느라 정신이 거의 가출해 있었기 때문이다.


주열이는 군대 동기다. 엄밀히 말한다면 녀석이 한 달 먼저 입대했으니 선임이라 할 수 있겠다. 녀석의 주장으론 자신이 권위가 아주 높은 하늘 같은 고참이라는 셈이다. 그 논리는 군대에서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녀석과 함께 이곳 인제까지 다시 오게 된 걸까? 난 아직도 녀석에게 정신적인 지배라도 당하고 있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가스라이팅이 아닌가.


“야! 저 아래쪽에 도서관이 있었지? 아마?” 녀석이 꿈에서 깨서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저렇게 외쳤다.

“뭐? 도서관?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무사히 살아서 이 고개나 넘어가서 황탯국이나 들이키자고”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황탯국보다 사실 도서관에 들려서 긴히 볼 일이 하나 있어”

“뭐 화장실이라도 달려가려고? 그 장트러블이 또 시작된 거야? 네 장 내 세균의 문제는 주유소에 들르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님 잠깐 세워줄 테니 저 벼랑 끝에서 쪼그리고 앉아 일을 보던가. 확 밀어버리게!” 내가 짜증이 나서 대답했다.


엉뚱한 녀석인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개발자 다운 평정심을 그만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제대 후 5년 만에 만나 함께 인재에 놀러 가자며 모든 비용을 자신이 대겠다고 나더러 자동차만 준비해 오라던 녀석의 자신만만한 제안치곤 뭔가 허술하면서도 어이없기만 했다. 녀석은 자신에게 계획이 있다며 다소 획기적인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녀석의 제안이란 것은 이러했다. 자신이 얼마 전부터 독서모임에 참여해서 하루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하루키가 어느 날 빵 가게를 습격했단다. 내가 하루키가 아니라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이겠지, 하며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주열은 그 소설을 읽고 나서 왜 자신은 단 한 번도 그런 상상을 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뒤떨어진 창의성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러니 하루키가 시도한다면 자신도 하루키를 사랑하는 만큼 하루키의 월드의 일원으로서 무엇이든 감행한다는 것이 주열의 다짐이었단다. 그래서 사실 나를 이 여행에 초대한 것이라고. '자기가 언제 적부터 하루키를 사랑했다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이곳 인제에 초대한 게, 네 범죄행각에 나를 공범으로 몰아넣겠다는 심산이었다는 거네? 혼자서는 실행하기 무서우니까 나라도 동참시키면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같던?”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미시령 꼭대기에서 유턴할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설명을 미리 안 한 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우리는 앞으로 점점 늙어갈 거 아냐. 30대 초반에는 그 나이에 알맞은 모험을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하루키처럼 빵 가게를 습격하는 일이든, 도서관을 습격하는 일이든 말이야” 녀석이 말했다.


“아니 다 좋다고 치자. 30대 초반에 도전할 수 있는 역사적인 도전치고는 너무 치졸한 거 아냐? 하필이면 시민의 마지막 문화 공간인 도서관을 왜 습격하냐고? 차라리 습격하려면 시립 평생학습관이나 구립 도서관 같은 자본이 충분한 곳을 습격할 것이지, 턱없는 예산 때문에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시골 도서관을 습격하냐고. 빵 가게와 도서관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다고 말이야.”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대답했다.


"빵 가게는... 말이야 빵과 책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지. 빵이 테제라면 책은 안티 테제에 해당될 수 있겠지. 한쪽이 성립되면 다른 나머지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그 무엇과 같은 관계라고 정의해 두 자고. 도서관에서 책 읽으면서 빵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아무튼 약간 허술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고. 빵 가게 습격을 읽으려니 나는 공연히 도서관이 그 순간에 생각난 거뿐이야. 뭔가를 충동적으로 벌이기엔 그냥 시골의 작은 도서관이 적당하다고 여긴 것이지."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세상은 모방의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그리스의 비극으로부터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모방하기 시작했고 모방은 인간다운 인간을 창조하는, 그러니까 신이 내린 학습 같은 개념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숭배하는 하루키의 책에서 계시를 받은 대로, 이제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행동할 때라고 주먹을 불끈 쥐며 단팥빵 모양의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 주열은, 우리가 빵 가게를 습격하지 않고 도서관을 습격하려는 이유는 모방엔 나름의 변형이라는 요소가 존재해야 하며, 그 변형이야말로 작가의 재능이 빛나는 가장 독창적인 모방, 그래야 인간은 늘 진보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진정한 테제에 성립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도서관을 습격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일종의 컬렉션이라는 테제에 속한다는 것.


컬렉션, 나는 그 말에 눈이 번뜩였다. 내 취미는 단연코 컬렉션이다. 책이라면 읽지는 못해도 일단 컬렉션 해둔다. 특히 절판된 책들을 찾아서 전국의 고서점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내 오래된 취미가 아닌가. 녀석은 내 취미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방에 준비물들을 챙겨 왔어. 뒷자리 배낭에 곰돌이 푸 탈과 의료용 비닐장갑이 들어있어. 네 역할은 그걸 뒤집어쓰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사서는 한 명이 근무하고 있을 거야. 경비 같은 건 없다고. 그건 내가 미리 조사해 놨고 네가 그걸 뒤집어쓰고 최대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줘. 팝핀 댄스를 추던지 변조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던지, 아님 아이들을 위해 낭독을 해주던지, 어떻게 해서든 소란을 피우라고, 그럼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몰려갈 거 아냐. 그때 내가 유유히 도서관 내부로 진입해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릴케의 시집 한 권을 들고 나올 거야.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목표는 도서관을 습격해서 단지 몇 권의 책만 들고 나오는 거라고. 원래 책도둑은 예전부터 도둑 축에도 들지 못했다고 하잖아. 그리고 우린 이 책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나는 친구로서 네 컬렉션에 기념품을 하나 추가시켜 주려는 거야. 나는 스릴을 느끼며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끼게 될 테고.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산속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도서관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해 두었다. 견인 표시가 있었지만 작전은 적어도 10분 내에 완료될 것이므로 걱정하지는 않아도 됐다. 나는 녀석의 지시대로 곰돌이 푸 탈을 뒤집어쓰고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의료용 장갑을 착용하고 양발엔 역시 족적을 남기지 않기 위한 비닐 슈즈를 신었다. 그렇게 기묘한 복장을 갖춘 나와, 지극히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주열은 30초의 시간차를 두고 도서관 내부로 진입했다.


도서관은 비교적 한산했다. 사서 한 명이 지루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하릴없이 들여다보며 고스톱 게임을 하고 있었고 테이블엔 할아버지 한 명과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 한 명이 신문과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내 대가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니, 뙤약볕이 한창인 이 더운 여름날에 곰돌이 푸 탈을 뒤집어쓰고 시골 도서관을 찾는 돌+아이가 세상에 존재할까? 사서는 나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림책을 읽는 아이도 신문을 골똘히 살피는 노인도 내 존재를 거의 무시하는 듯했다. 뭔가 우리의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뭔가 필요했다. 획기적인 조치가… 임기응변이.


나는 곧바로 브레이크 댄스인지 팝핀 댄스인지, 문화센터에서 일주일 정도 배운 실력을 뽐내야 했다. 관절을 꺾으려는데 실제로 관절 마디마디가 따로 노는 건지, 아예 부러지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광경이 좀비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해괴한 춤을 추면서 바닥을 기어 다니며 늙은 애벌레 흉내를 하자, 대여섯 살 먹은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어른을 쳐다보는 눈초리로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그림책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망했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전하게 책을 때돌릴 수 없다. 하지만 주열은 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서가에서 윤동주와 릴케의 시집을 들고, 유유히가 아닌, 얼굴에 진땀을 잔뜩 흘리면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녀석은 심각하게 긴장을 한 나머지, 뛰어오다가 다리가 풀리고 만 것인지, 꼬인 것인지 냉온정수기와 정면으로 충돌을 해버렸고 그 막대한 에너지 탓에 정수기가 쓰러짐과 동시에 들고 있던 두 권의 소중한 책을 노인의 정수리로 날려버리고 말았고, 릴케의 양장본 시집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노인의 이마 정중앙, 그러니까 미간을 강타하고 말았으니 이제 노인은 산송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노인의 미간을 맞고 튀어나온 윤동주의 시집과 릴케의 양장본 시집은 엎질러진 생수통과 혼합이 되어 점점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대본 없이 행동한 허접한 결과물이었다. 녀석은 사서에게 멱살을 붙들려서 왜 책을 집어 들고 뛰어갔으며 대출을 받을 것이면, 여기 회원 등록을 하고 정상적으로 절차를 밟으면 되는 것인데, 굳이 이렇게 이목을 끌 필요가 있겠냐고 훈계를 했다. 주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이 볼 일이 급해서 화장실을 급히 찾아가느라 경황이 없었고 그래서 양손에 시집을 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했으나, 그 시집은 절판된 지 오래된 고서라, 더 이상 구할 수도 없으며 책이 이미 울분(수분)을 잔뜩 머금은 상황이 되어서, 어쨌든 책임을 지어야 하게 되었으니, 이 책의 중고 거래가만 보상하면 된다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그 두 권의 중고가를 보여줬다.


“백만 원이라고요?” 녀석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백만 원이 아니고 두 권을 망쳐놓았으니 이백만 원이야.” 어느새 사서는 반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깟 오래된 시집이 뭐 그렇게 비싸요?”

“비싸지, 윤동주 시집이고 릴케 시집이잖아. 거기 뒤에 출간 연도 한 번 봐봐. 네가 아주 중대한 사고를 친 거라고. 이 책 지금 국내에서 3권밖에 남지 않았거든. 지금 네가 국보급 문화재를 망친 셈이야.”

“아니 그렇게 중요한 거면, 박물관에 모셔놓았어야죠”

“어, 그렇게 하려고 했었어. 오늘 오후에 박물관에 기증 예정이었거든. 근데 네가 딱 망쳐놨네? 그러니 변상을 해줘야지 도리가 있겠어. 물론 변상해 준다고 그 물건이 살아서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변상은 해줘야겠어. 괘씸하니 말이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곰돌이 푸 탈을 뒤집어쓴 채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멀리서 구경하고 있었다. 녀석은 뒷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혹시 카드가 되나요?”라고 상심하며 물었고, 그러자 사서는 “당연하지, 요즘 카드 안 되는 데가 어디 있어. 삼성페이, 애플 페이, 전부 다 돼~" 라며 녀석이 든 카드를 빼앗아들고는 이백만 원을 결제하려 했다. 그런데 한도 초과라는 메시지가 화면에 뜨고 말았다. 녀석의 잔고는 내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순간부터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유유히 걸어서 도서관을 탈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녀석은 내가 바깥으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상황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나가면서 혹시나 주변에 CCTV가 있는 걸 확인했다. 그리고 슬슬 걸어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곰돌이 푸 탈을 벗어서 옆 장미꽃 화단에 던져버리고 의료용 장갑을 벗어서 돌돌 말아두곤 도로 옆 하수구에 던져버리고 비닐 슈즈 역시 벗어서, 느티나무 옆에 슬쩍 감춰두었다. 그리고 내 자동차로 가서 여유 있게 시동을 건 다음 핸드폰의 전원을 Off 시키고 내비게이션에서 서울을 찍고 바로 출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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