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트, 쇼팽, 그리고 텅 빈 만족감
나에게 영혼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멍하게 화면을 구경꾼처럼 관망할 때가 잦아졌다. 몇 글자라도 일단 끄적거려야 끝까지 이야기를 밀어붙일 힘이 생길 것 같은데, 영혼이 빠져나가서인지 마치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다.
예전의 글쓰기는 뭐랄까, 오래된 골목길을 천천히 활보하는 것과 같았다. 주장, 근거, 예시가 걷다 보면 저절로 찾아왔다. 그저 걷고 또 걸으면 머리에 전부 떠올랐다. 눈을 감고도 익숙한 골목 사이사이를 누빌 수 있던 것처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기승전결이 맞는 글 한 편쯤은 너끈히 써낼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적당한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AI가 뱉어낸 문단들을 마치 레고 블록처럼 그럭저럭 보기 좋게 이어 붙이고 편집하면 그만이다. 그걸로 끝이다. AI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해냈다. 마지막 마침표까지 잔인하게 찍어버렸다. 그 기세에 나는 허무의 세계로 찍혀나갔다.
지금은, 서론이고 기승전결이고 뼈대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쓰는 단어들은 족족 평이한 것들 뿐이다. 도무지 내가 글을 어떻게 시작하고 전개했었는지 완전히 감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그러니까 거의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죄 없는 키보드만 또각또각거리기만 한다.
그래, 커닝이라도 해볼까? 제미나이 요즘 글발 좀 올랐던데,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힌트라도 달라고 해볼까. 아니야, 뼈대 정도는 맡겨도 괜찮을 거야, 나머지 살은 내가 붙이면 되니까. 차라리 그냥 모조리 대신 써달라고 할까. 프롬프트 장난질 조금만 치면 내가 쓴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왼쪽 화면엔 내 빈 페이지가, 오른쪽 화면엔 제미나이의 유려한 문장들이 둥둥 떠 있었다. 마치 숙제를 대신해주는 어린 시절 옆집 형을 둔 기분이었는데, 그 형이 사실은 외계에서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애써 하고 싶지 않다.
엣지 브라우저를 분할 화면으로 띄워놓고 왼쪽엔 브런치, 오른쪽엔 제미나이를 띄운다. 제미나이는 말이든 음성이든 언제든 스텐바이된 상태다. 뭘, 맡겨볼까.
하지만 글쓰기는 거룩한 일이다.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극한의 유희가 글쓰기다. 그런데 이 작업을 외계 지성인 AI에게 맡긴다? 그럼 인간의 할 일은 뭔데? 생각하는 일도 귀찮고 쓰는 일도 귀찮다면, 대체 인간은 앞으로 뭘 해야 하는 건데? 나는 뭐랄까, 인류에게 소중한 식량이나 축내는 빈대 같은 부류가 아닌가. 인류에게도 쓸모없고 나 자신에게도 쓸모없다면 빈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제는 글쓰기야. 그렇다면 도입부에서는 어떤 장면을 연출할까? 비유라도 하나 써야 참신해질 텐데,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군. 만약 제미나이라면, 뭐라고 속삭였을까?"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잠식하기 시작한, 제미나이 같은 똑똑한 AI들이 어쩌면 우리 머릿속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의 근육, 상상의 세포들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다. 실제로 체감하고 있으니까.
실제 글을 발행하는 속도는 불과 몇 달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지만, 그만큼 생각은, 그러니까 깊이나 범위만큼은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다.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만 생기거나, 좋은 글감이 떠오르면 이제 제미나이 앞으로 달려간다. 아침에 마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처럼 습관적으로 프롬프트를 두들긴다. 외계 지성에게 피드백을 맡긴다.
무언가 결국 완성된다. 나는 그 결과물을 재단할 자신도 능력도 없다. 어쩌면 내가 쓴 어떤 결과물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제미나이가 작성한 문장들은 마치 중세 시대의 품위 넘치는 귀족들처럼 보인다. 빈틈없는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같은 느낌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래 쇼팽이나 듣자고.
https://youtu.be/wdiuU0DOl2E?si=yLNLq9vO7h7Yw6QT
하지만 완성되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쉰다. 그렇지만 저 만족감은 내 것이 아니다. 만족감은 시스템 안에, CPU와 GPU사이에 흐르는 전기에서 새어 나왔을 뿐이다. 나와 전기 사이에 기묘한 마찰이 빚어진다. 불협화음일까, 빈틈없이 계산된 음표들의 배열일까.
"챗GPT를 쓰기 시작하고부터, 그 녀석 없이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아요."
그저 가벼운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글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자신이 써낸 글의 속사정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그런 ‘글 쓰는 기계’ 공장을 3만 원을 주고 임대하는 인간으로 전락한 것일 지도 모른다.
AI를 멀리하자는 이야기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속이 타지만, 나는 그 열등감이라는 마음에 대해 제미나이에게 또 묻고 있다. 하지만 속도와 숙련이라는 것, 자동 완성이라는 편리함과 생각의 깊이라는 것, 그저 결과물을 제출하는 행위와 진짜 글쓰기 능력이라는 것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을 슬그머니 맞바꾸고 있는지.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다면, 이 문제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그 시작은, 스스로에게 몇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일 테다. 나는 지금 정말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베껴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걸까?
작가가 출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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