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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8. 2016

조규찬 - 무지개

무지개와 같이 찬란했던 나의 꿈들

장대한 햇살이 비치는 오후였다. 탁 트인 베란다 창밖에 시야를 무심코 던지고 있노라니 집안에 몸을 가둔다는 것은 가을에 대한 죄악이라며, 누군가 나를 툭 건드리는 것 같았다. 지난 몇 주까지는 최악의 더위가 집안에서 머물도록 강제했다면, 성큼 다가온 가을의 선선함을 두고 계속 몸을 사린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바깥공기는 여름과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제 본격적인 가을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가을은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겠다고 여름을 슬며시 계절의 언저리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 자리는 다른 주인이 여러 명 있지만, 규칙적으로, 시간에 따라 자리를 배분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나눈 것만 같았다. 가을은 이제 그동안 미뤄두었던, 본연의 자리로 찾아올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간단한 채비를 마치고 나는 계절과 계절이 충돌하는 도시의 혼란 속으로 방황에 나서기로 했다. 누군가 내 옷깃을 잡아 끄는 듯한 원인모를 중력에 잠시 이끌리기도 했지만, 모든 망설임을 물리치고 번쩍이는 세상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드높였다. 하늘은 너무나 깊고 푸르러서 온 세상의 파란 물감을 모두 동원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주체할 수 없을 감성을 담아, 여기저기에 파란 빛깔의 덧칠을 안겨줄 것을 원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어 잠시 하늘을 이미지로 둔갑시켰다. 건너편에 아파트 공사현장에 우뚝 솟은 타워크레인과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이 묘하게 어울렸다. 타워크레인은 조용하며 청명한 가을 상공에 자신의 굳고 맹렬한 의지를 내밀었다. 고요하고 나지막하게 신음조차 내지 않고 성큼 하늘을 향하여, 바람과 정면으로 맞선 채 위용을 뽐냈다. 크레인 끝에 매달려 있는 아슬아슬해 보이는 추가 마치, 지난날의 나의 꿈의 환영처럼 언뜻 비쳤다. 소망했던 꿈이었으나, 그 꿈을 그리지도 못하고 묵묵히 따라가지도 못한 젊은 날의 나약한 의지가 떠올랐다. 저 드높은 타워크레인의 우뚝 솟은 강직함처럼, 누군가 내 꿈을 조금이라도 밀어주고 당겨줬으면 '내 꿈이 지금처럼 미약하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천국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



나를 혼돈에 빠뜨렸던 창공에서의 자맥질 속에서 헤어 나오기 위하여 다시 내면을 다스렸다. 마비될 것 같은 발걸음에 다시 구속당하지 않은 자유의 정신을 누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야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밀어 준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 속으로 나의 몸을 이동시켰다.


도시 속의 가을은 벌써 빌딩 사이를 돌아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있었다. 어느새 바람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여기저기 조각하고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서늘해진 바람을 가슴에 흠뻑 맞으며 옆 사람과 더 가까운 거리로 좁혀 들었다. 그들은 맞잡은 두 손 사이로 가냘픈 바람이 간신히 통과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따뜻한 것임을, 서로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은은한 행복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거리에서의 방황을 잠시 멈추고 나는 서점을 찾았다. 모처럼 시간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넉넉한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 혼란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책 한 권에 빠져들면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마력의 공간이 바로 서점이었다. 이 책 저 책을 둘러보며 서성이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헤엄쳐갔다. 에세이 코너, 소설 코너 사이를 휘돌아가며 나도 저 높은 서가란 곳에 '내 책을 올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찾아올까?'라며 보이지 않는 어떤 희망을 꿈꾸기도 했다. 꿈꾸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원대한 순간, 나도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미래를 그렸다. 정신을 가까스로 차리고 몇 권을 장바구니에 실었다.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늘 위안이 필요할 때마다 찾았던 광화문의 한 서점은, 나에게 꿈이자 무지개와 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의 색채는 마치 무지개처럼 휘황찬란한 색으로 빛났다. 나는 그저 나의 색깔과 어울리는 책에 나의 마음을 투영시키면 될 뿐이었다. 나는 책에서 나의 꿈을 찾았다. 지난한 현실을 떠나, 책 속에 흠뻑 젖어 있으면 나는 책들과 함께 무지개가 떠있는 높은 곳으로 둥둥 떠다녔다.


지금은 내가 어른이 되었지만, 나의 마음속에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어떤 때 묻지 않은 감성을 다시 찾아 헤맨다. 이 세상이 비록 도덕적이지 못하고 온갖 병으로 만연한 사회로 몰락하고 있지만, 내가 순응하지 않는 사회의 모순된 굴레에서 언젠가 벗어나는 것을 소망한다. 단순히 늙고 병들어가는 육체와 가다듬지 않은 정신의 몰락으로 내 삶이 너저분해지는 것을 거부한다. 몸은 늙어도 맑은 생각을 유지하는 것은 나에게 무지개와 같은 꿈이다. 


내 어린 마음에 추종을 보내주었던 꿈과 같은 노래를 마지막으로 선곡해본다. 조규찬이 18세에 작사, 작곡을 했고,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무지개>가 바로 그 노래다. 풋풋한 소년 조규찬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무지개'와 함께 다시 잃어버린 꿈이란 것들을 떠올린다. 그 꿈을 구체적으로 가꾸어나갈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으로 다가온다.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는 조르바가 꿈꿨던 자유로운 삶을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펼쳐나갈 수 있는 삶, 그 꿈을 통해서 서로의 원대한 미래를 상상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이 현실이 되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삶, 그 삶이 바로 내가 꿈꾸던 무지개였다. 


조규찬 - 무지개「1989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 1회 기념 음반(대상 수상곡)」


창백한 아침 햇살이
동산을 맴돌 때

나무 위에 새들도 
구름마다 흐르네

집 앞에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도 모르는 기쁨이
내 몸을 감싸네

한 여름날 소나기를 흠뻑 맞은 아이들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띄워 보내고

뒷산 위에 무지개가 가득히 떠오를 때면
가도 가도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따라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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