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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05. 2016

이 소설은 커다란 시이자,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은유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수렵생활을 지속한 이후, 생존을 위하여 시작된 인간의 폭력 행위 - 육식 행위 - 는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최초의 적대적 행위였다. 단지 목숨을 부지하고,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지배적 구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시작된, 육식에 대한 본능은 점차 피에 굶주린 '흥분된 맛'에 대한 욕구로 변질되어 왔다. 때로는 그 처참한 살육의 과정에서 얻어졌던 '피의 맛'이 안기는 심미적 요소에 인간은 쉽게 유혹되기도 하였다.

피로 점철된 인간의 오래된 역사의 뿌리는 무엇에서 근거하는가? 인간의 유전자에는 폭력의 씨앗이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있단 말인가? 이 모든 포르노그래피적인 인간의 파괴적 본능을 억눌러왔던 오래된 순수 이성이란 무엇일까? 폭력에 충실한 자, 타자를 억압하고 스스로의 이성을 말살시켜가며 스스로의 영혼마저 파괴시켜버리는 잔인한 인간,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숱한 피해자들, 약자의 위치에서 강자가 안기는 폭력의 광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그 살육에 더 이상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한 여자의 처참한 사투를 수면 위로 들춰낸 소설, 세계 3대 문학 상인 맨부커 상을 받아 더욱 화제가 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뒤늦게 읽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진행되자마자 나의 심장은 수축과 팽창을 급격하게 이어나갔고, 책을 붙든 손아귀에 힘이 얼마나 세게 들어갔는지 부들부들 온몸이 진동하고 있었다. 긴장감 때문에 얼굴은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올라, 마치 책을 향한 나의 뜨거운 시선으로 종잇장을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은 쿵쾅쿵쾅 좀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몰입도만큼은 최고였다. 한 시도 내 눈을 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과 사람들의 기이한 행동이 이어졌다.

영혜의 돌발스러운 행동을 지켜보는 나의 시선은, 그녀의 심장이 얼어붙을듯한 처참한 사건의 현장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편집증적인 정신 상태를 보이는 남편에게 쏠렸다. 참으로 기묘한 첫 장면이었다. 아내의 충격적인 행동 앞에서도 사건의 인과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충실하려는 이기적인 남편, 나는 남편의 행동 속에서 가정을 등한시하려는, 별다른 책임감 없이 아내의 이상적인 증상에도 신경질적인 반응만을 거듭하는 지독한 무관심, 수수방관으로 포장된 내면적인 폭력이 보일 뿐이었다. 사건은 잔인스럽게도 나에게 눈을 돌릴 겨를도 없이 숨 막히게 진행되었다. 이야기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희한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흥분은 잦아들었고, 폭력의 화상은 나의 내면에서 저절로 진정되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장면의 묘사들은 너무나 생생하여 더 큰 이미지의 충격을 전달했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이성을 상실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 속에서, 잔인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김기덕 감독의 처절한 연출이 늘 싫었다. 그의 영화를 감상한 이후, 찾아오는 더러운 감정이 너무나 싫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광기의 실상을 아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채식주의자>역시 나에게 낯 뜨거운 우리의 현실, 우리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더러운 민낯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소설의 여주인공 - 영혜 - 은 어느 날 돌연히 육식을 거부한다. 단지 꿈속에 나타난 어떤 잔혹한 환영, 한 장면 때문에 그녀는 채식을 선언한다. 그녀의 꿈에 나타난 장면들은 지극히 잔인하고 비현실적인 광기가 스며든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녀의 꿈에 나타난 처참한 장면은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꿈은 현실인지 가상인지 주인공의 내면을 극도로 혼란시킨다. 그녀가 좇는 것은 식물에 대한 집착이었다. 단지 '꿈' 때문일까? 그녀는 그동안 그녀의 삶을 뒤덮고 있었던 삶의 전형적인 관습에서 멀어지려 한다. 행복하지도 않으며, 만족이라는 없는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삶의 의무로부터 멀찍이 벗어나려 하였다. 

그녀의 채식 선언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깊은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서는 단 하나의 장면이 어떤 사건의 발생을 트리거 시키는데, 영혜에게는 꿈에 나타난 '핏빛 얼굴'이 채식선언으로 나타나고, 그녀의 형부에게는 몽고반점이 감추어진 욕망을 트리거 시켰다. 그 특징적인 하나의 사건들은 그동안 자신의 내면을 억누르고 있었던 저항, 욕망, 폭력을 폭발시킨 하나의 유발 요인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영혜는 단지 비현실적인 '꿈'의 장면 때문에 채식 선언을 한 것일까? 소설의 서두 부분만을 읽고서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해석할 수는 없다. 그녀의 채식 선언은 사실 가정 폭력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폭력의 희생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녀와 그의 언니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가했다. 심지어 성폭력까지도 …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그러고 난 아침 식탁에서 무심코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어 지거나,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 지곤 했다는 것을


위의 장면은 세 번째 연작 소설인 <나무 불꽃>에서의 영혜 언니의 독백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두 자매가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죽인 무공을 세웠으나,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도 폭력의 가해자이자 희생자이기는 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용사들 대부분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면에 상처를 입은 아버지는 가족에게 또 다른 양상의 폭력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내면의 희생자였던 아버지,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폭력 - 여덟 살까지 종아리를 맞으며 - 을 당하며 살아왔던 그녀의 아픈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그녀의 가족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모두 폭력을 방치하였고, 피해자의 시선과 도움을 무시했다. 

단적인 사건으로 가족의 단란한 저녁시간, 채식을 선언한 영혜에게 고기를 강제로 먹이려고, 입을 벌리고 고기를 밀어 넣던 장면의 광기는 서슬 퍼런 아버지의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수모가 끊임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영혜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했다. 폭력에 더 이상 자신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은, 폭력의 결과인 육식을 하지 않겠다는 것, 자신의 의지에 방해가 된다면 차라리 스스로에게 자해하고 말겠다는 세상을 향한 분노의 외침이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두 가지 선상에 서 있다. 폭력을 가하는 자,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자, 시점이 3인칭으로 바뀌며 폭력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전환된다. 영혜의 형부는 몽고반점이라는 포인트를 발견하며 새로운 열정을 불태운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금기시된 열정이었다. 단순한 몽고반점 하나가 그의 숨어있던 폭력성을 트리거 시켰다. 예술로 빙자된 그의 폭력성은 채식 선언을 한 처제의 영혼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영악한 형부는 꽃 그림, 즉 채식 선언을 한 처제를 식물이 가장 아름답게 진화된 꽃의 형상으로 품을 수 있다고 상상했다. 그는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예술로 포장된 프로노 그래피를 완성시키고 만다. 이것은 생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 처제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예술을 빙자한 포르노적 욕망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그녀의 영혼은 이제 채식주의자를 뛰어넘어 식물 자체로 완성이 된다. 죽음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연의 일부분으로, 가장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녀의 물구나무서기는 이제 죽음이 가까워진 그녀의 삶을 증거 한다. 이제 그녀는 모든 고통을 죽음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그녀의 언니는 괴이한 그녀의 마지막 행동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언니 역시 똑같은 폭력의 희생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 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P.161


나는 이 책이 작은 소설이 아니라,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서사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까운 가족들조차 폭력에 무관심하며 그 폭력에 동참하는 행태 속에서, 나는 무지막지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커다란 시이자,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은유였다.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는 권력을 상징했고, 그의 가족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폭력을 수수방관하기만 하는 나약한 국민들이었다.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결국 죽음이 아닐까? 영혜가 선택한 채식주의자는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힘없는 자의 마지막 선택일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관능적이고 갖은 폭력이 난무하는 읽기 힘든 소설일 수도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 낯 뜨거운 섹스 등의 과격한 주제로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지만, 숨어있는 우리의 지난 참상들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역사를 이야기는 담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는 폭력과 그 상처에 신음하고 있는 약자들의 이야기들을 대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문장을 소개한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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