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세 번째 읽고...
과거에 올렸던 <그리스인 조르바> 리뷰
<그리스인 조르바>를 세 번째 읽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세 번째 만났다. 정신적으로 지쳐버려서 살고자 하는 의욕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마다 조르바를 무의식적으로 찾았다. 조르바는 나에게 있어서 바이블이다.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조르바는 나의 괴로움을 이해해주었고,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한 살아있는 철학이었으며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안식처(安息處)였다.
응원의 메시지가 필요할 때마다, 조르바는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고, 내가 그를 찾을 때마다 늘 다른 위로의 뜻을 전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삶을 그럴듯한 모습으로 애써 포장하려는 내게 조르바는 거친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조르바의 말들은 거칠고 투박한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어서 겉으로는 깨끗한 것처럼 번지르르하기만 한 나의 가식들을 모조리 허물어뜨렸다.
이 책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철학적인 소설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이윤기' 선생님의 맛깔스러운 번역본을 추천한다. 이 책은 작가와 동지적인 관계였던 조르바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조르바와 작가가 동고동락했던 크레타섬에서의 이야기들을 전한다.
산다는 건……
"P.8 : 산다는 게 감옥 살이지. 암 그것도 종신형이고 말고, 빌어먹을……"
"P.13 :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서 무디고 둔한 것이다. 영혼의 지각 능력이란 조잡하고 불확실한 법이다. 그래서 영혼은 아무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는 예견할 수 없다."
개똥철학 나부랭이를 주워들은 텁석부리가 혼자 중얼거렸던 것처럼 '산다는 건 감옥살이'다. 감옥은 분명한 것 같은데 창살도 높은 담벼락도 없다. 생각과 행동에 제약을 받지만, 능력에 따라서는 시스템의 한계를 초월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게 자유를 구속당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감옥살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세계에서 우리에겐 자유란 있을까. 다만, 감옥살이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적어도 탈출을 꿈꿀 수는 있겠지. 그것조차도 모르고 사는 인생이라면 조르바가 외치는 '자유'란 것이 무슨 달달한 의미가 될 수 있겠는가. 그 사람에겐 차라리 감옥이 편하고 더 어울릴 수도……
영혼의 입장에서는 육체가 감옥일 수도 있다. 영혼이 갈망하는 세상의 진입을 방해하는 장벽이자 감옥보다 더 무서운 뻘 일 수도…… 자유를 꿈꾼다. 무의식의 세상에 사로잡힌 나의 영혼을 다시 구원해야 한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P.14 :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P.226 : 조르바와의 만남은 외부 사건의 수학적인 연속도, 내부의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책벌레였다. 그는 작가로서의 정형화된 삶의 틀을 깨부수고 밖으로 나오고 싶어 했다. 진솔한 글을 위해서는 세상과 밀착되어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며, 삶의 잔인하면서도 적나라한 모습까지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작은 내면의 일렁임이 조르바를 만나게 했고, 크레타 섬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책으로 멀리 떨어진 삶을 원했던 주인공의 현실적인 갈망(자유)이 크레타의 폐광으로 향했던 이유가 되었다. 주인공은 들떠 있었다. 기존의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큰 결정을 한 것이다. 조르바야말로 그가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자유의 본질'이었음을 첫눈에 알아보게 된 것이었다. 임자 제대로 만났다.
"P.22 :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는 사나이였다."
자유?
"P.24 :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 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자유에 관한 인상적인 조르바의 말이다. 정제되지 않는 그의 거친 말투가 좋다. 그는 산투르에게 교묘히 자신의 내적인 열망,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입하고 있다. 아무도 조르바를 강제할 수 없었다. 조르바는 마음이 내킬 때 움직이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아무도 그의 영혼을 지배할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어느 곳에도 귀속되지 않았다.
"P.18 :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 하지만 해본 일만 해가지고서야 어디 성이 차겠소."
자신의 원하는 본능에 따라 산다는 것, 결국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이해한다는 뜻을 전제로 한다. 현재의 삶에서 만족할만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며 같은 자리에서 안정만을 추구하고 개척을 멈춰버린 나의 삶이 보였다. 현실에 만족하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순간에 자유는 멈춘다.
"P.38 :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하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당신은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가."
"P.83 : 붓다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주인공은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여전히 붓다의 사상에 취해있었고 크레타 섬에서도 붓다의 철학을 찾았다. 주인공은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 골몰했다. 주인공이 크레타섬을 찾게 된 목적 중 하나는 관념적인 세상에 통제된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의 세계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괴로움, 슬픔, 기쁨 등의 원초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P.343 : 내 존재의 심연에서 전날 밤에 느낀 즐거움이 솟아올라 필경은 흙으로 빚어졌을 때 내 육체라는 대지에 물을 대어 주는 것 같았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눈을 뜨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느 순간 주인공은 육체와 영혼이 서로 떠날 수 없는 공존의 관계임을 깨닫는다. 영혼은 육체란 감옥에 갇혀 있어서 벗어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육체와 영혼이 나누어질 수 없는 서로 공존하는 관계임을 문득 깨닫는다.
행복
"P.98 :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행복은 언제나 과거로 흐른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행복의 순간을 흘러버리고 곧 잊어버리고, 다시 행복이란 걸 손에 넣겠다고 세상을 떠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한단다. 그리고 또 잊어버릴 테고 자유가 잃었다며 투덜거리겠지... 그것이 자유를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반복적인 패턴이다.
"P.174 :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현재 주어진 직분에 만족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 단순한 논리지만, 이것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현실에 대한 불만족 때문에 자유라는 허상에 얽매이고 비겁하게 떠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자신을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P.135 : 이같이 잔인한 생각들은 나를 도망치게 하지는 않네. 오히려 내 내부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필요 불가결한 땔감이 되어 준다네. 나의 스승이신 붓다가 <나는 깨달았다>고 했기 때문이네. 나도 깨달았네. 이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마는, 유쾌하고도 변덕스러운 조물주를 사귄 나머지 나는 이제 내가 맡은 역에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충실할 수 있을 것이네. 즉 용기를 잃지 않고 틀림없이 해내겠다는 것이네. 깨달음으로 나는 신을 연기하는 무대의 공연자가 된 것이네.
P.196 :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은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모든 걸 버린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자신을 비운 다는 것, 욕심에서 자유롭다는 것, 인간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가치겠지.
P.326 : "...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별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러.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기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야?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P.328 : "...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좋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 조르바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로운 삶 - 때론 방종 - 을 살았다. 그는 실컷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기에 후회가 없을까? 살인, 강간, 도둑질 그는 범죄자였고 약탈자였다. 소설 속의 조르바의 삶이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그가 저지를 모든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P.386 :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이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우리는 오늘에 허덕거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다가 단지 일보 전진했을 뿐인데, 꿈을 잃고 희망을 포기해버린다. 고개를 조금 더 내밀고, 앞으로 전진하면 더 큰 열매를 딸 수 있는데, 그만 제자리에 정체되고 머물러버린다. 꿈이란 것은 잘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가면 된다. 카오스처럼 보이는 것은 당신의 뇌가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P.415 :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P.417 : 나는 새벽에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에 그 같은 기쁨은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예사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과 추진하려는 외부의 계획들이 무너져 버리고 그것에 대한 희망조차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그 순간 주인공과 조르바가 맛보았던 해방감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이란 그들을 구속했던 감옥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마음먹기에 따라 내던져버릴 수 있는 허섭스레기였을까.
"P.416 :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희열의 감정을 과연 누구나 볼 수 있는 걸까. 소유를 향한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순간, 외부적인 파멸이 찾아왔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절망의 강을 능히 혼자서도 극복할 수 있다는 순수한 한 인격체로서의 의지, 조르바가 늘 꿈꾸던 내면의 자유였다.
"P.417 :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와의 짧은 여행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향은 인간이 오랫동안 해결하고 싶었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해답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슬람교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적인 현장이었던 크레타섬에서 자랐다. 아버지로부터 투쟁 끝에 얻어지는 독립의 순간, '자유'라는 단어를 늘 가슴속에 새기며 살았다. 결국 자유란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끝에 얻을 수 있는 최종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 처해있다. 나라의 지휘권자는 비열한 욕망에 눈이 어두워 국민들을 그만 비통에 빠뜨리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현재 난파선 그 자체다. 곧 침몰할 듯이 목적 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는 걸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짧은 희망 한 가닥을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주인공과 조르바가 모든 외부의 욕망들을 상실했을 때, 그들의 영혼엔 자유가 찾아왔다. 절망 끝에서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미래의 구원이 괴로움 끝에 찾아왔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국가적인 위기가 찾아와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가치와 믿음이 무너지고 있지만,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본다. 막연히 나라의 시스템에 기대는 것이 아닌 국민 한 사람의 자유의 날갯짓으로부터 시작된 희망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