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작가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이지만, 그 결과는 독자에게 의존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 현재 내 글을 읽고 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글에 집중해 줄 것인가? 관심이 지속되도록 글의 호흡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글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 같은 장치가 필요하다. 글쓰기란 작가 내면과의 치열한 격전의 과정이라 하지만, 그 결과는 전적으로 독자의 만족에 의지한다.
보이지 않은 독자들의 취향을 과연 어떻게 맞춰야 할까? 독자들의 성향과 요구 사항을 미리 분석해서 ‘맞춤 글쓰기’를 할 수만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독자와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양방향으로 독자와 소통하기에 앞서, 글에 대한 집중의 문제는 다른데 있다. 사람들은 글의 집합체이자 종합예술인 책을 생각보다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할인율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책이 전달하는 지식의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워서? 책에 손이 가기에는 거리가 멀어서?
비겁한 변명이다. 그냥 읽는 것 자체가 귀찮은 것이다. 읽지 않는 것이 트렌드다. 물론 읽을 사람들은 가격에 구애 없이 구매하고 읽는다. 그리고 브런치와 같은 플랫폼에서도 글을 찾고 능동적으로 시간을 소비한다. 브런치에서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 글에 관한 열망이 높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한 것을 싫어한다. 단순하게 재미있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거나,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읽거나, 아마도 세 가지 이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 가지가 충족되더라도, 언제든 사람들은 글을 떠날 결정을 할 수 있다.
“과거 나의 글을 분석했다.”
다양한 독자층에게 만족을 안기고 싶었다. 미래의 글들을 위해서 과거에 발행한 글들의 역추적이 필요했다. 면밀한 분석을 위하여 발행한 글들 중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은 글, 브런치 메인에 노출된 글, 조회 수가 높은 글을 우선적으로 나열했다. 분석하면서 예전에 발행한 글들이 과연 내가 쓴 글이 맞는지 생경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좋아요’를 많이 받은 글에 앞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쓴 글에서 공통적으로 발굴한 ‘해시태그’는 아래와 같다.
“위안, 위로, 결핍, 버리기, 인생, 열정, 괴로움, 반복, 여행, 글쓰기”
주로 삶과 연관된 해시태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브런치답게 ‘글쓰기’에 관한 해시태그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당장 글을 쓰고 있지 않다 하여도,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나의 글을 읽고 있듯이 글은 늘 당신 곁에 머물러 있다.
조그만 스마트폰 속에도 글은 넘쳐 흐른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앱(App)은 당신의 일상을 지배한다. 뉴스를 읽든, 커뮤니티의 글을 읽든, 유머 글을 읽든, 블로그의 서평을 읽든 당신은 지금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읽고 있다.
스마트폰이 이 세상의 글과 당신을 연결할 수 있는 편리한 거리를 준 건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 간의 공간적 거리는 더 멀리 떨어뜨렸다. 온라인에서 활발한 소통을 나누고 있지만 나는 가끔 외롭다. ‘카카오톡’의 단톡방도 공허함을 달래주지는 못 한다. 내 글 중에서 높은 조회 수를 올렸던 글은 고달프게 살아가는 당신에게 잠시나마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소한 위안을 준 건 아니었을까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삶과 글쓰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글을 쓰며 변화하고 있는 내면의 성장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글쓰기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점이라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체 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됐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한마디로 줏대 없이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출세하기 위하여 ‘저녁이 없는 삶’이 최선이라 판단했고, 주말까지 일을 끌고 들어왔다. 결국 피곤에 찌든 삶이 반복적으로 이어졌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는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문장은 몇 줄 이어지지 못 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글로 옮겨 적는 것은 고통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줄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란?”
일단 입력이 부족했다. 글감 자체가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풍성한 이야기를 펼칠 수 없었다. 일단 서점을 찾아가 몇 가지 책을 골랐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서민적 글쓰기>와 같은 실용적인 글쓰기 이론이 담긴 책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다음은 소설에 집중했다.
이론적인 바탕이 기본 아이템으로 장착이 되었다면, 그다음은 문학적인 감수성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서록>과 같은 국내외 순수 문학에 심취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고, 밑줄을 긋고, 온라인 노트에 감명을 받은 문장을 기록했다. 그리고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책의 위력을 깨달았다. 책에서 얻는 감동은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글을 쓸 때마다 자연스럽게 살아났다. 독서는 나의 생각을 풍성하게 했다. 독서는 내 글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책에서 얻은 깨달음을 통하여 글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발행했다.
이제는 글감이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입력된 것들은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다. 더 깊이 있는 글을 쓰기 위하여 독서와 글쓰기는 병행되어야 한다.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다.
글은 자기만족이라 하지만, 나는 늘 새로운 변곡점을 넘어서며 만족과 다짐을 반복한다. 선을 뛰어넘었다가 슬럼프를 맞게 되기도 한다. 작전상 뒤로 물러서기도 하지만,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물러선 것에 2배 이상 앞으로 전진한다. 장애물에서 굳이 회피하지 않는다.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정면으로 돌파한다.
조심스럽다.
써놓고 바로 발행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다듬고 또 고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