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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r 22. 2017

작업 확인서

논픽션 + 픽션

'작업 확인서'라고 쓰인 누런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내 앞에 서 있던 낯선 사내는

한 손으로 종이 한 장과 스마트폰

그리고 손잡이를 동시에 붙잡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부자연스러운지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창문을 건드렸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사내는 묵직한 배낭을 등에 메고 있었으며,

무거운 것을 받치기 위해 허리를 두꺼운 벨트로 묶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삶의 무게를 겨우 지탱하고 있는 수단인 듯 보였다.

등에 짊어진 삶의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사내는 무거워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막일꾼'이었다.

나는 그의 '작업 확인서'를 힐끔 살피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내는 시종일관 초조해 보였다.

버스 창밖에 시선을 유지한 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안경을 추켜 세우기도 하고 시계를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사내는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이었다.

다만,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가야 할 곳과 점점 멀어지는 듯한 불안한 모습이었다.


오늘 주어진 일감에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걸려있어서

반드시 시간 내에 도착해서 일을 엄수하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의 인생에는 제대로 시작하고 끝맺음 한 것이 그다지 없어서

오늘 주어진 기회가 벼랑 끝 승부 같아 보였다.


그때였다.

불안하게 움켜쥐고 있던 빛바랜 종이 한 장이

열려있던 창틈 사이로 그만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사건은 손쓸 겨를도 없이 일어났다.


사내는 난데없이 고함을 질러댔다.

기사에게 버스를 세워달라고 비명을 쳐댔다.

기사의 반응은 쌀쌀하고 침착했다.

절대 세워줄 수 없다고, 이곳은 정류장이 아니라 대답했다.

종이 한 장 때문에 버스를 세울 수 없다며,

다른 승객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며,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시간을 희생할 수 없다며

사내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했다.


사내는 버스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 듯했다.

반면, 사람들은 그런 사내를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사내의 하루가 어떻게 되든

문제없다는 사뭇 냉정한 얼굴들이었다.


사람들과 사내 사이에는 공감할 수 없는 간극이 점점 커졌다.

사람들의 관심은 급격히 사내로부터 멀어졌고

사람들의 일상은 바삐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 사내를 더 이상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사내를 잠시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회사를 향했다.


그 '작업 지시서'가 스마트폰에 담겨 있었다면……
그 말을 내가 진즉에 전해줬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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