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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15. 2017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한없이 넓고 따뜻했던……

몇 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휴일 새벽, 느닷없는 벨 소리가 고요를 깨웠다. 나이를 하나, 둘 차츰 먹어서일까. 휴일에 걸려오는 벨 소리는 늘 불길하다. 덜컹 심장이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확인하기도 전에 근원지를 알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다가왔다. 

스마트폰이 평소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일단 걸려온 전화번호부터 확인했지만 생소한 번호였다. 내 마음은 더 불길함에 휩싸인 채,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차가운 공기를 뚫는 목소리였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얼른 준비하고 내려와. OO 병원 장례식장이야."
"…… 언제 돌아가셨어?"
"좀 전에 돌아가셨어."
"어 알았어. 금방 갈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마치 생과 사의 흐름을 예지하고 준비를 오래 한 사람처럼 고통조차 사라진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그 어떤 애달픔이나 목이 멘 느낌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OO 병원으로 어서 오라는 짧은 메시지만 남긴 채 대화를 끝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지가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다. 먹고살기 바쁘다고, 매일 이어지는 야근에 지쳐 주말엔 쉬어야 한다고 갖가지 핑계를 들어 할머니를 뵙지 않았다. 할머니가 기력을 잃은 후부터 나는 할머니를 저만치 뒤로 밀어두고 살았다. 자라고 나서부터는 더욱 할머니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거동이 힘들어 손자에게 의존하여 외출을 하신다는 얘기를 이따금 듣기도 했고, 요양원에 들어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고도 할머니를 찾지 않은 나는 참 못된 손자였다.

외할머니에겐 나와 내 동생, 그리고 이종사촌 동생 이렇게 외손자가 총 3명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방학 때마다 할머니가 있는 외갓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외갓집은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원시적인 놀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했다. 나와 사촌동생은 특히 흙과 친했는데, 과수원과 논밭이 우리의 놀이터였다. 흙 밭에서 주로 뒹굴다 보니 손과 발이 깨끗할 날이 없었지만, 그 동네에서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심지어는 묘지가 있는 으스스 한 뒷동산도 놀이 무대가 되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여름엔 과수원에서 풍기는 딸기와 같은 과일의 향기를, 겨울엔 눈 꽃향기를 맡으며 다녔다. 우리는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끌벅적거리는 도시를 잊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넓은 마당 같았다. 실컷 뛰어다니느라 귀중한 물건을 부수거나 뙤약볕 아래서 밭일을 보고 있는 동안, 귀찮게 해대는 우리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셨다. 할머니는 가난의 부끄러움을 일찍 알아차린 나를 어르고 달래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만든 마당에서 헤엄치고 다니며 쓰디쓴 가난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없이 넓고 따뜻했던 할머니가 새벽에 돌아가셨다. 택시를 타고 나는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나는 신발을 벗고 할머니가 계신 장례식장에 자리를 잡았다. 외숙모의 상기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놀러 갈 때마다 싫은 티를 팍팍 내던 젊은 시절의 외숙모. 그랬던 외숙모가 나에게 친한 사이인 것처럼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들뜨고 시원해 보이는지 우리에게까지 사이다를 따라줬다. 사이다를 연신 들이키는 외숙모의 입가에는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상쾌함이 보였다. 고통이 싹 가신듯한 환희에 들뜬 모습도 보였다. 뭐가 그리 즐거웠을까? 그녀의 세월에서 할머니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뿐이었을까? 할머니 옆에서 오랫동안 비껴 서있었던 나는 그날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도 어른들의 또 다른 얼굴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 역시 할머니에게 죄송한 손자일 뿐인데, 이렇고 저렇고 지적질할 자격이 있을까.

돌아가신 할머니는 표정이 없었다. 자신이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는 채 할머니는 외로운 여행을 떠났다. 나는 할머니가 없는 빈 곳에 멍한 표정으로 앉았다. 나 역시 담담하다 못해 냉정하기만 했다. 눈물샘이 완전히 고장 나버린 걸까. 왜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죽음이라는 것에 너무 관대해진 탓일까?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시끄럽게 수다를 떨었다. 여기저기서 호상이다, 충분히 오래 사셨다는 말이 난무했다. 오래라는 기간의 정의는 누가 내리는 걸까? 할머니는 충분히 사셨기 때문에 눈을 감을 때 후회가 하나도 없었을까. 초라한 죽음을 앞두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는 것 같아 나는 갑자기 불쾌해졌다. 난 잠시 아무 말없이 조용하게 이 자리를 지키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그곳을 떠나 바깥바람을 쐬었다.

가끔은 그냥 시간이 멈추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언제였을까. 돌아보니 내가 외갓집에 머물렀을 때마다 할머니는 늘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눈을 감고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니, 서운한 것은 쉽게 떠오르고 내가 받았던 값진 것들은 전부 지워져있었다. 왜 좋은 기억들은 쉽게 잊히고, 나쁜 기억들은 오래 살아남아 나를 
괴롭힐까. 먼저 잊힌 사람을 기억에서 몰아내기 위한 마음의 자연적인 정화작용일까. 

억지로 기억을 되돌려봤다.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던 내가 넘어질까 걱정하던 할머니, 시골집의 커다랗고 뜨거운 아궁이 앞에서 손자가 잘 방을 따뜻하게 덥혀야 한다고 부채를 휘두르시던 할머니, 대보름 전날 귀신을 피해야 한 해 동안 재수가 좋다고 내 신발을 꼭 안아 감추던 할머니, 화로에 갓 구운 군밤과 군고구마를 손수 까서 내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나에게 시골 논길에서 도깨비를 만나 혼비백산했던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해주시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내 눈에도 보이지 않던 희미한 물방울이 맺혔다. 깊게 들여다보니 기억나는 것들이 더러 있긴 했다.

이제 나를 손자라 불러줄 할아버지, 할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물들었던
 냉정하고 차갑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깊어갈수록 자꾸 좋은 기억만 되살아나 편안하게 앉아있던 나를 미치게 했다. 그때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그리움 때문인지, 마지막에 배웅조차 드리지 못한 채 헤어져버린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언젠가 사라져야 한다는 상상을 하니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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