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 사냥꾼처럼,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고통 없는 영겁이 시작될 수도 있는 그런 빈틈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감각을 죽였고, 자기의 기억을 죽였다. 그는 자신의 자아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와 수천 가지의 낯선 형체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으며, 짐승이 되고, 썩은 고기가 되고, 돌이 되고, 나무가 되고, 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깨어나면서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 심연의 감각 속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삶은 잔인하리만큼 모질게 나를 몰아붙였고 그 외롭고 끝이 없는 고통을 당장 끝낼 용기조차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을 주는 적이 누구인지 형체가 불문 명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삶은 역겨울 이유가 되었다. 그것이 만약 윤회의 정체라면 수없이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운명이라면 무기력하게 누운 채 체념을 하고 말아야 할 것인가. 무수히 반복되는 수레바퀴의 회전에 깔려 그것과 함께 공전해야 운명일지라도 어지러워 구토가 치밀어 오를 상황일지라도 나는 그저 그 번뇌란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깨달음의 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란 원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기에 밋밋한 척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이 나와 같은 범부의 인간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그 끝 어딘가, 깨달음이 줄 수 있는 청량함을 얻기 위해 모든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근근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리뷰를 썼다.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쓴다는 것에 쉽게 손이 가질 않았다. 다만 읽고 나서 느낌을 적을 때 감정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허물어질 것 같아서 바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 거친 감정에서 객관성을 꺼내어 다듬는다는 것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엄밀히 말한다면 읽고 생각하고 또 써야 하는 귀찮은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리뷰 시한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대로 글을 쓰지 않는다면 <싯다르타>를 통해서 느꼈던 감정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아서 뒤늦게나마 키보드에 손을 댔다.
지혜로운 바라문들이 자기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지혜를 대부분 전달하였으며, 그들의 풍부한 지식을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그릇 속에 어쩌면 이미 다 부어 넣었는데도 그 그릇은 가득 차지 않았고, 정신은 만족을 얻지 못했으며, 영혼은 안정을 얻지 못하고, 마음은 진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였다. P.15
이 책은 헤세가 느낀 동양철학, 특히 석가모니의 사상에 대한 주관적인 깨달음, 소설을 쓰며 그의 자아가 변화하는 실체적인 과정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내고 있다.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구도자에겐 궁극적으로는 깨달음, 해탈, 열반의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평범한 인간도 대상일 수 있지만…… 사는 것 자체가 때로는 집착인데, 그것이 안기는 고통에서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는 숲 속에 들어가 사문이 되었고 석가모니를 스승으로 받아들여 진리를 배웠고 또 윤회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인간의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삶의 고통을 배웠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그럼, 아니고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P. 208
구도자의 삶을 산다면, 그저 기다림, 사색, 단식을 통하여 자신을 내어던질 수 있다면 진리는 우리에게 반드시 찾아올까. 황금빛 새장 문을 활짝 열고 아침마다 기다리고 있으면 도망간 새가 다시 돌아와 줄 것인가. "그녀는 싯다르타가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때 창가로 걸어갔다. 희귀한 새 한 마리를 잡아 가두어놓은 금빛 찬란한 새장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새장의 문을 열더니 그 새를 끄집어내서는 날려보내 주었다. P. 126"
싯다르타는 구도자의 삶과 범속한 인간의 삶을 모두 체험했다. 부처 고타마의 존재조차, 그가 던지는 구원의 메시지조차 그에게 강렬한 울림을 주지 못했다. 싯다르타가 원했던 것은 자신이 입고 있던 껍데기를 직접 벗어던지는 거였다. 그것은 절대자가 귓속에 직접 속삭여주거나 강제적으로 의미를 주입해줄 수 없는 가치였다.
싯다르타는 세속을 경험하기로 한다. 그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강렬히 빠져보는 것이었다. 욕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도 하지 못한 사람이 고통의 뜻을 이해하고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어떤 것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을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로 깊이 침잠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는데, 싯다르타는 그 운명을 위해서 인간을 단순히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일원이 되기로 한 것이다. "소년 시절 나는 오로지 신들과 제사 지내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었지, 젊은 시절에는 오로지 고행, 사색, 침잠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을 추구하였으며, 아트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을 숭배하였지. 그러다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속죄하는 참회자들을 따라가 숲 속에서 생활하였고, 더위와 추위에 시달렸으며, 굶주리는 법을 배웠으며, 나의 육신을 소멸시키는 법을 배웠지. 그러다가 놀랍게도 그 위대한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이 세상의 단일성에 대한 앎이 나 자신의 혈액과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에서 순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지, 그러나 부처로부터도, 이 모든 위대한 앎으로부터도 나는 또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카밀라는 만나 그녀한테서 사랑의 쾌락을 배웠으며, 카와스와미한테서는 장사하는 기술을 배웠으며, 돈을 모았으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으며, 나의 관능적 감각들에 아첨하는 법을 재웠지 P. 140"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을 한다. 카밀라와 함께 사랑이 안기는 쾌락에 빠졌고, 재물의 유혹에 빠졌으며, 도박에 빠졌으며, 그 어떤 인간보다 많은 재물을 취했다. 그는 이미 범속한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자였으나,- "그는 말 중의 말인 옴을 소리 내지 않고 발할 수가 있었으니, 영혼을 한 군데에 모으고 명석하게 사고하는 정신의 광채로 이마를 둘러싸게 한 채, 숨을 들이쉴 때에는 소리 내지 않고 자신의 안쪽에 대고 말할 수 있었고, 숨을 내쉴 때면 소리 내지 않고 자신의 바깥쪽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2" - 그가 배운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깨달음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그는 절망을 체험해야 했으며,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기쁨과 즐거움이 주는 감정이 덧없음을 느껴야 했으며, 그가 머물렀던 찰나의 세상이 결국 허무하고 무기력 한 것임을 직접 깨달아야 했다.
누군가가 간접적으로 들려주는 진리, 책에서 설파하는 지식은 마음과 몸이 반응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에게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 마음이 분열되고 산산조각 나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러니까 존재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아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었다. P. 28"
싯다르타는 삶의 기나긴 고통을 끊기 위하여 죽음을 앞둔 마지막 상황에서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그렇다. 자기는 끝장이다. 이제 자기에게는 자신을 소멸시켜 버리는 일, 실패로 돌아간 삶의 모습을 박살 내어, 비웃고 있는 신들의 발치에다 그것을 던져버리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바라 마지않았던 위대한 구토 행위이며, 그것은 바로 죽음이며 자기가 증오하던 형식의 파괴다. P. 129" 스스로를 파괴시키기 직전에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삶은 윤회하고 죽음은 끊임없이 고통을 안긴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깨달음의 의미를 찾고 반복되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다.
옴! 그는 혼잣말로 소리를 내었다. 옴! 하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바라문을 알게 되었으며, 생의 불멸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든 신성을 다시 알게 되었다. 131
싯다르타는 사문의 길과 세속의 길을 나누던 강물을 무사히 건네주었던 뱃사공을 다시 찾는다. 뱃사공인 바주데바에게 그동안 경험했던 모든 것을 나눈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P. 153" 그리고 뱃사공과 함께 그 역시 같은 길을 걷기로 한다. 그가 죽을뻔했던 강물에서 과거에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자신이 범한 과오를 강물을 통하여 다시 본다. 강물은 먼 곳으로 흘러가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강물의 어느 순간을 지켜보는 싯다르타에겐 현재이기도 했지만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는 방랑자를 의미하기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힘이기도 했다.
듣지 못했던 소리를 봤고, 보지 못했던 세상을 강물에서 봤다. 과거 자신의 방황을 봤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다림을 봤고,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강물은 언뜻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었으나, 강물 역시 순환하는 자연의 체계로서 작동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순응하는 윤회의 또 다른 형태임을 터득했다.
나는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을, 헤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지난한 시간이 요구될지 모르겠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고여있는 썩은 물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발악해봤자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더 깊은 수렁으로 몸을 던지려한 순간도 있었다. 단순히 머리에 지식을 입력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으면 좋겠다. 지식이 기반이 되어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 하늘로 널리 승천했으면 한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 P. 197"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우리가 신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싯다르타는 범속한 인간이었으나 결국 모든 이치를 깨달은 신, 그 자체로 완성이 된다. 그는 사람들과 직접 교류를 나누며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영원성을 깨닫지만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원한다면 직접 고통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 그것이 싯다르타이자 헤세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헤세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제를 버리고 새로운 내일을 위해 흐르는 강물을 본다. 강물은 오늘도 흐르고 내일도 흐를 것이며 나도 고여 썩지만 않는다면 계속 흐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그럼, 아니고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P.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