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나는 한 사람의 시 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올 추석은 내가 직장을 다닌 이후로 가장 오랫동안 쉰 기간이었다. 이번 추석에도 나는 기름진 음식에 절었고 안락함에 푹 젖었다. 생산적인 활동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그냥 아무렇게나 하루를 보냈다. 우연히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았다. 이 영화는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새벽 2시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아내는 피곤하다며 침대로 향했고, 나는 심야의 고독한 분위기를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콘텐츠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이다. 소파에 누운 채, 리모컨 클릭질만으로도 원하는 영화가 안방까지 배달된다. 뭐 속도에 민감하게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너무나 최적의 시스템이 아닌가. 즐비하게 늘어선 형형색색의 레시피를 보면서 무언가 식상한 기분이 들었다. 선택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었고, 내 취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혼란스러운 감정까지 들었다. 뭐 어쨌든 나는 자본주의가 생산한 또 다른 기름진 세상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 영화라도 한 편 감상할 수 있는 권리는 과연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이런저런 공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머리를 스친 것은 얼마 전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추천한 영화 한 편이었다.
2002년 난 최고와 최악을 동시에 경험했다. 월드컵이 개막하던 날 나는 뉴욕에 있었고 맨해튼 중심, 고층 빌딩 어딘가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오전 교육이 끝나면 우린 자유롭게 맨해튼의 소호 거리를 걸으며 실컷 쇼핑이나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어떤 계급을 넘어선 우월감까지 들었었다. 그러나, 출장이 끝난 후, 안정적이었던 내 삶은 추락을 거듭했다. 신제품 개발에 연거푸 실패를 거듭한 회사는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급여까지 밀리게 되었다.
8개월째 급여가 밀리자 나는 생활고 끝에 퇴사를 결정했고, 마지막 수단으로 실업급여까지 신청하게 되었다. 내 인생이 꺼진 것 같은 상처를 입었다. 돈이 말라버리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존권에 문제가 생겼다. 도시가스 요금은 한없이 치솟는데 우린 그걸 감당할 수 없었다. 한 겨울에 난방 대신, 패딩을 입고 떨며 지냈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구직센터라는 생경한 곳을 방문해야 했고 나는 막다른 인생에 진입한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취업사이트에서 구직 활동을 해야만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노동부에서는 전 직장을 고발하러 다녀야 했다. 내가 인터넷을 잘 모르는 영화 속의 '다니얼 블레이크'처럼 구직활동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나 역시 주인공처럼 더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텐데"라는 상상을 하며 영화를 보니 더 감정이입이 되었다.
주인공인 다니엘 블레이크는 오랫동안 목수로 일했다. 주인공이 59세가 되었을 때, 아내는 정신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병간호를 하다 지친 주인공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심장병으로 다니엘 블레이크는 직장에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과 의료 담당자와의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질병 수당 지급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기관에서는 주인공의 주치의가 판정한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질병 수당 지급을 거절한다. 주인공은 부당한 결과를 항의하기 위해 기관을 찾아가지만 사회보장 시스템은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기관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이 아닌 오히려 그들이 더 추락하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는 결국 제도권 밖으로 내동댕이 처졌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든든히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세워졌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대가로 급여를 받으며 정당한 세금을 낸다. 세금은 국가를 떠받치고 다시 국민이 살아갈 수 있는 체계를 하부로 공급한다. 우리가 직장에서 한 달을 무사히 버텼기 때문에 급여라는 보장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를 지탱하는 어떤 조직의 톱니바퀴로서의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직장이 불안정하게 되면, 뜻하지 않게 직장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입이 끊어질까 두렵고 불안하다. 사회의 안전 시스템이 보호막 역할을 제공한다고 믿지만, 때론 그것도 거짓이다.
나는 그렇게 직장을 다니고 있다, 언제가 그곳에서 쫓겨난 상황을 가정한다. 그러다 빈곤에 빠져들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시뮬레이션을 한다. 칸트는 "빈곤한 사람이 불편한 점은 끊임없이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빈곤은 우리를 불행하도록 방치하는데, 마지막에는 저항할 수 있는 힘까지 빼앗아간다는 점이다. 아무니 노력해봤자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살아야 한다는 의욕을 상실시키고 자존감마저 부수어버린다. 빈곤은 불편을 강요한다. 자본주의의 보호 체계하에서 누리던 모든 편안함을 뺐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작은 주장마저 펼칠 수 없도록 한다.
삶의 경제적인 기본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지막 자존심까지 놓아야 하는 현실로 인간을 내몬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케이트 가족은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 단지 약속에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구직센터에서 벌점을 받고, 그것에 대한 항의는 집단의 원칙이라는 이유로 무시된다. 아무도 그 부당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오직 다니엘 블레이크만이 적극적으로 그들이 겪은 부당함을 주장한다. 물론 그도 힘이 없다. 그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안전망은 그들을 옥죄기만 한다.
주인공은 밑바닥 인생으로 내몰렸지만, 자존감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받는 부당함에 대하여 저항했고 할 말을 했다. 자신의 처지도 딱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불쌍한 케이트 가족을 도왔다. 그것은 그동안 성실히 일하며 남을 돕고 살았던 그의 인생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노력했으며 게으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시당했다. 그는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는 독거노인에 불과했다.
송파구 석촌동에 살던 세 모녀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처지를 비관한 채 자살했다. 그들은 사회복지제도를 누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엄마에게 약간의 소득이 있다는 것, 병을 앓고 있는 큰 딸과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작은 딸의 근로 능력이 있다는 판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엄마는 몸을 다쳤고 큰 딸은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진단하지 못했다. 그들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상으로 모든 걸 판단했다.
사회적 안전망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장치되었다.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과한 세금을 내고 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그 세금이 언젠가 내가 위기를 겪을 때, 나를 위하여 또는 누군가를 위하여 사용된다고 믿기에 기꺼이 내는 것이다. 하지만 보장 시스템은 여전히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세 모녀와 같은 자살 뉴스가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마다, 부족한 제도들을 보완할 것이라 각자의 위치에서 성토하지만 복지 시스템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시스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수의 우리에게 바뀔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또 다른 다니엘 브레이크와 같은 약자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한다. 우리는 시스템으로부터 감시당하는 것보다, 보호받기를 원한다.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위기를 겪을 때, 우리를 든든하게 받쳐주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길 원한다. 마지막에 다니엘 블레이크가 한 말처럼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다음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전하는 마지막 말이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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