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모순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책의 주인공인 '안진진'이 스물다섯, 내가 서른다섯. 그녀와 나는 10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나 나는 정신적으로 덜 영근 삼십 대였다. 나는 그냥 되는대로 살거나 사람이든 일이든 무조건 충돌하며 경험하는 것이 최고라 여기는, 좀 생각 없이 사는 인생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내의 생일을 맞아 서점에서 아내에게 <모순>을 선물했고, 아내가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는 기억이었다.
아내의 권유를 받고 몇 페이지를 읽다만 기억이 나는데 당시 - 2007년 - 에는 울림이 전혀 없었다. 주인공의 정서와 궤를 같이할 수 없었다고 할까? 나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았는데, 왜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었을까.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 당시의 내 심리 상태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다.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책을 밀어냈던 것이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 P.8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P.20
뭐, 그 당시 나는 맹목적으로 살았으니깐,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성공해야 한다.'와 같은 경구에 도취해 있는 내가 안진진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겠나. 그 시절 나는 친구와 동업을 하고 있었다. 뭐 사업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나도 한번 성공을 해보겠다고, 순수 내 힘만으로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꿈에 들떠있었거나, 남들이 만들어 놓은 시장에 뛰어들어 그들의 안방을 잠식시키고 말겠다는 의지하나만 컸었다. 나는 뭔가 생각한다는 거 자체를 허락할 수 없는, 속도 싸움만 하고 있었다.
십 년도 넘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나에게도 여유가 좀 찾아왔다. 시간적인 여유도 금전적인 여유도 아닌, 스스로 빈틈을 확보해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그런 날 말이다. 버릴 책과 남길 책을 분류하다 <모순>은 내 손에 들어왔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말이 아픈 구석 어딘가를 후벼팠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나를 들여다본 시작도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어떤 굳은 생각 때문이 아니었던가.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P.13
이십 대 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P.15
<모순>은 양귀자 작가가 40대 중반인 1998년도에 출간한 소설이다. 주인공이 스물다섯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느끼는 정신적인 성숙도는 사십 대 이상이다. 어린 나이에 삶의 어두운 것까지 샅샅이 파악했다고 하기에는, 작가가 지나치게 주인공에게 개입한 정황이 보였다. 한편으로는 너무 이른 나이에 철들어버린 주인공의 모순 같은 선택도 이해가 되었다. 인생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나이라면 지난 젊은 이십 대의 자신에게 꼭 전할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석대로 살아오거나 무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아는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려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전개하고자 했던 것은.
당신이 접시를 날라 오라고, 그것도 쟁반에 담아 오라고 말했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내 몸을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는 것 같았어. 정말이야. 참을 수가 없더라고. 안방 벽들이 나를 가두는 감옥 같았고, 달려온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라. 그 절망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P. 77
일란성 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 자매는 결혼 이후로 운명이 갈라진다. 평상시에는 천사 같지만 술만 마시면 주정뱅이로 변하는, 결혼이 굴레라 여기며 아내와 자식을 쇠창살로 비유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늘 매를 맞고 사는, 고생으로 이모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어머니. 안진진은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며 무감각적인 사람이다. 주인공이 살아가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살아있지만 죽은 인생처럼 살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위태위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여자인 안진진.
자신이 계획한 대로 삶을 철저히 리드하는 남자인 나영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약간이나마 예외가 있는 남자인 김장우.
그녀는 안정과 불안정, 계획과 무계획, 평범함과 모험 사이에서……
어떤 인생이 행복할까. 별다른 위기 없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이란 것은 모두 겪어본 사람? 후자의 경우는 큰 고통 때문에 작은 것은 감각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이라는 것도 쌓이고 쌓인다면, 마음에게 자양분이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어떤 고난이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아닐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무조건 행복하지는 않다는 거, 가진 게 없어서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거, 그것이 삶의 모순이 아닐까.
삶은 살아봐야 안다. 그 느낌이 똥인지 된장인지는 한 번 맛을 보아야 안다. 소설에서 작가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글을 읽는 독자는 이야기에 백 퍼센트 설득되지 않는다. 내가 인생을 잘 살든 못 살든 직접 선택을 해봐야 소설에서 '왜 작가가 삶을 모순이라 얘기했구나'라고 무릎이라도 탁 쳐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은 살아본 자만이 그 깊은 세계를 알 수 있다.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 P.158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P.198
요즘의 화두는 '나'다. 나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이 트렌드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삶이 무한히 윤회하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그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 더 이상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고통을 일상적인 것으로 무심히 넘겨서도 안된다. 오늘이라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래서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에.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그곳으로 떠나야 한다. 생각이든 구체적인 행동이든.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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