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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19. 2017

삶은 추상적일까.

추상적 생각, 프로그래밍

삶은 추상적일까 구체적일까. 같은 틀에 안주하려 하는 인간은 관성 때문인지 스스로 정한 운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 운명은 가끔 경계가 없이 모호하다. '성공하고 싶어', '내일은 달라질 거야',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와 같은 추상적인 말이나 늘어놓지, 그것을 구체화시킬 묘안은 없다. 미래만 꿈꾸다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이 인간의 냉정한 현실이다.

어제 살아왔던 방식대로 반복한다면 하루 정도 버티는 것은 문제없다. 하루를 구체적으로 설계해 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불분명하게 살아가는 게 더 편하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데, 먼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은 사치이기도 하다. 삶의 구체적인 목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어디로 모험을 떠나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명답을 구하는 일은 고단하기만 하다. 생각에 갇혀 있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보다 내면에 더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다 끝나는 일이 많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생각이 앞선다. 다음 단계를 넘어서려는 의지는 작동하지 못하고 한 곳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나는 모호한 생각을 걷어치워야 하나?

나는 직장에서 이십 년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객체를 코딩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밑그림(얼개, 플롯과 비슷)을 그리는 것이다. 구체적인 동작에 대한 구현은 나중 일이다. 먼저 뼈대를 설계하는데, 구현할 객체를 현실로 모델링 한다. 내가 만들어야 할 객체의 겉모습과 특성을 디자인한다. 그 세계는 실제적인 모습이 없는 추상적 차원(Dimension)이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세계관을 먼저 디자인하고 그 하부의 다른 차원을 점진적으로 디자인한다. 각 차원의 부품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록 좋은 모델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체계를 연결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한데, 그것을 인터페이스(소통)라 한다. 인터페이스는 부품 간의 가교 역할을 하며 실제 내부가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알 필요는 없다. 철저히 내부는 베일에 싸인다.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 주어진 커뮤니케이션 역할만 수행하면 끝이다. 내가 원하는 기능이 있으면 그 하위의 실제 부품을 찾아 실행하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위와 같은 과정으로 객체의 실제 모습을 구현해나간다.

이렇듯 프로그래밍에서는 추상적 접근 방식이 오래도록 중요한 방법론으로 인식되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프로그래밍과 견주어 추상적 접근만으로 모델링 하거나 동작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결단(이직과 퇴사와 같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닥치곤 하는데, 프로그래밍 세계와 실제 세상은 서로 동떨어져 있다. 문제는 프로그래밍에 몰입하면 할수록 나도 모르게 구체적인 행동을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현실을 게임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현실의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추상적 모델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 삶과 나의 본질을 모델링하고 있다. 모델을 시대에 맞게 바꾸며 새로 디자인한다. 다른 사람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예측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정해진 대로 반응하거나 늘 같은 대답을 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습관처럼 일과를 반복하는 사람, 늘 같은 패턴을 보이는 사람, 쉽게 내면을 드러내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조금은 불분명해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삶을 살아가려면 추상적 사고만으로는 곤란하다. 경험은 내면에 쌓여 추상적 모델을 떠받치는 엔진이 된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엔진의 부품들을 연마했다. 그중에는 몇 년 동안 갈고닦았지만 쓸모없는 것들도 있었고, 어떤 것은 핵심 부품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프로그래밍과 글쓰기는 서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듯하지만 닮은 구석도 많다.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방식, 실체를 모델링 하는 방식, 실체가 행동하는 방식이 닮아 있다. 

글쓰기를 하면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세상에 대한 추상적 이해이다. 실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을 이해하려면 세부적인 구조는 다음 단계다. 사물의 구체적인 패턴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이론에 불과하다.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인데, 사물의 감춰진 원리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특성을 발굴하는 것이 글쓰기의 첫 번째 원리다. 그것은 프로그래밍에서 설계도를 짜는 방식과 비슷하다. 사물은 작가의 생각 속에서 자유를 얻고 어디든 자유자재로 뻗어나간다. 그런 면에서 글 쓰는 사람(소설가 더 나아가서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글쓰기 두 번째 원리다.

한 쪽에 치우친 생각을 뛰어넘어야 한다. 경험들을 구축하다 보면 닿을 수 없던 곳까지 갈 수 있을 거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일은 자명한 현실이고, 오늘도 구체적인 일상과 추상적 생각이 충돌하지만 나는 그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삶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듯이 나도 따라 움직인다. 일정한 패턴으로 살아가려는 회귀본능을 억제한다. 삶은 정해져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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