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이 주는 기쁨
아내와 결혼한 지 20년째 접어들었다. 그날의 의미를 여러 방식으로 기념하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고받는 거창한 선물이나 멋진 외식도 특별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일상을 기념일처럼 여기며 사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그만큼 형식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뜻일 거다. 세속적인 것들은 사실 일상에서 중요한 것들이 아닌데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살아가면서 우리 부부는 철학자의 자세로 삶을 배우고 있다. 여러 고비와 위험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 지금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이제 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살아오면서 많은 걸 잊고 산다. 기쁨은 잠깐이고 고통은 생각보다 오래가더라. 나쁜 기억은 바로 지워졌으면 좋겠는데, 좋은 기억이 먼저 사라지더라. 유년시절의 겪은 충격이나 공포심은 수십 년이 지나도 머릿속에 여전히 살아서 일상을 괴롭힌다. 건전한 자극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미미하고 나쁜 기억은 오래간다. 나이를 먹으면 생기를 점점 잃어 가는데, 옆에서 손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모자란 힘과 용기를 내며 사는 것이다. 부부는 서로 모자란 것을 채운다.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회복시켜준다.
아내와 나는 둘 다 내향적이다. 생각이 많아 결정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따라서 행동도 느리다. 우리에겐 사색의 시간이 특별하다. 해가 저무는 시간,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의미 있다. 지친 일상도 황혼으로 물들어 가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
해가 저물면
둘이 나란히 지친 몸을 서로에 기대며
그날의 일과 주변 일들을 얘기하다
조용히 잠들고 싶어
……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거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내게로 와 줘
……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9-nelMqac6k
어제는 신해철의 3주기였다. 가을 무렵, 결혼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그의 노래는 일상에서 울려 퍼진다. 강한 어조로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신념, 결연한 삶을 살았던 신해철의 철학은 우리 부부에게도 삶의 지표다. 그가 남긴 가사를 마음에 새기며 산다. 지금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단지, 그의 노래는 남아서 우리에게 희망이 된다.
누구나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지금 사랑하는 순간도, 미워하는 순간도 찰나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부부로 만나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완벽한 우연이란 말인가. 우리는 부부로 인연을 맺었고 스쳐가는 순간에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물론, 완벽할 것 같은 삶 속에도 불안함은 깃들여 있다. 그 시선은 외부에서 따갑게 쏟아진다. 우리 부부에겐 아이가 없다. 불완전한 삶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가 그 결정을 한 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이 먼저다. 선택 후 삶을 어떻게 리드할 것인가, 그 결정이 더 중요하다.
……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긴 시간을 스쳐 가는 순간인 것을
영원히 함께할 내일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기다림도 기쁨이 되어
……
신해철의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중에서
의미를 찾는다. 살아가야 할 이유, 부부로서 함께 사는 의미를 말이다. 우리에겐 결혼기념일과 다른 평범한 날도 같다. 매일을 결혼기념일처럼 다르게 사는 것, 모든 날이 우리에겐 각별하며 새롭다. 사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에 감사해야 지치지 않는다. 선물의 가치로 기념일을 빛내는 행위보단 매일 펼쳐지는 일상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오늘도 우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삶은 여전히 우리를 지치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의 충돌은 여전하고, 물질에서 얻어지는 포만감은 짧지만 우리를 유혹한다. 욕망 끝에 주어진 기쁨은 유효기간이 짧다. 신해철의 말처럼 결과의 기쁨보다는 과정에서의 기쁨을 얻는다. 행복이란 사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늘 주위에 있다. 산책을 하고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더 각별하다.
아내는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오늘도 수많은 평범한 날 중에서 또 잊히고 사라지는 날들이라며 철학자와 같은 말을 했다. 창가 옆 의자에 앉아 저무는 햇살을 함께 바라보았다. 각자 마음속에서 작은 소원을 빌었다. 먼 미래가 아닌 내일도 무사하게 해달라고, 내일은 덜 욕먹게 해달라고, 내일은 덜 후회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과거에 수많은 기념일에 우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미래는 저 멀리 떨어져서 손짓을 내밀고 있지만, 잡을 수 있는 거리인지 확실치 않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나는 어떤 남편으로 아내에게 남아있을까. 조금은 더 따뜻한 남편이 되어야겠다.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속삭이는 남자가 되어야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거야."와 같은 뻔한 말보다 사소한 버릇부터 고치며 실천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PPy8Hqu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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