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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24. 2017

20년 묵은 직딩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

20년 묵은 직딩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

시는 은유다.



문장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희귀한 문장들을 수집해서 묵혀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먹고 싶었다. '막힘없는 글', '부드럽게 이어지는 글', '독자에게 널리 공감을 주는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남들이 쉽게 쓰지 못하는 표현이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말하듯 쓰는 것은 시를 모독하는 행위라 생각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시가 정답은 아니지 않나.", "독자와 가까운 친구가 되겠다고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 않나.", "독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많은 친구를 두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시란 원래 기묘하고 추상적이어야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경험과 가능성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시의 다차원적인 모습이었다,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사실 쉽게 쓰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시란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 그 사람들의 감춰진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상투적으로 전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찾아왔다. 시를 쓰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각자의 주장을 들으면서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나에게도 독자적인 길이란 존재할 것인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결론은 은유였다. 은유마다 깊이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일 것이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은유를 몇 단계에 걸쳐서 묻어둘 수도 있을 것이다. 시는 사람들에게 모두 열려있는 것인데, 해석도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시의 소유권은 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시를 읽고 도대체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며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이렇게 불친절하게 써 놓으면 독자가 숨겨진 의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고 말이다. 


악플(?)을 맞다.


악플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것에 한 대 두드려 맞았다. 시를 꾸준히 '브런치'나 '블로그'에 공개하고 있었으나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들떠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축 가라앉아 있기도 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은 쓴 소리는 아팠다. 몇 해 동안 교류했던 이웃 블로거가 던진 말이라서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내 시가 너무 어렵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계속 읽으면서도 공감이 가지 않아 일부러 댓글을 달지 안 않다는 소리였다. 단 한번 읽어도 가슴을 쿵 쳐야 하는데 곱씹고 곱씹어야 조금 이해가 된다고 작가를 위한 시가 아니라 독자를 위한 시를 쓰라 했다.

좀 더 쉬운 시를 써보라고, 사람들에게 다가서려면 안도현처럼 쉽고 공감 가는 시를 쓰라는 말이었다. 그분은 상처받거나 기분 나빠하지 말라며 말을 완곡하게 썼지만, 나에게 그 말 - 일부러 댓글을 안달았다 - 은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분이 남긴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를 다시 쓰려고 할 때마다 "독자에게 공감 가는 시를 쓰세요"라는 충고가 맴돌았다. 



어떻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가 등단 시인이 아니라고 쉽게 보고 말하는 건가……
시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왜 시를 쓰려고 했지? 


머릿속에서 바위 같은 것이 쩡하고 갈라졌다. 그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라고 한 것인지, 지금까지 하던 것을  때려치우라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안도현'이 될 것인지 '이석현'이 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 내가 시인으로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왜 사람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할까. 그 말이 후회가 되지 않는다면 왜 삭제를 하고 사과의 말을 꺼냈을까. 나보다 나이가 더 먹었다 하여 꼰대 같은 짓거리를 어린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름도 없고 시인으로 등단한 이력도 없는 평범한 블로거라고 하여 막말을 한 건 아닌가,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그분은 프로불편러' 와 같은 사람인가. 이렇게 하찮게 넘기기에는 그분이 남긴 말이 계속 나의 일상을 괴롭혔다.


나를 돌아보다.


글을 쓰면서 상처를 받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글을 통해서 세상이 마음대로 열리지 않는다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무기력증에 빠진 날들도 있었다. 뭐 내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이 돌아가겠나. 확률의 법칙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극소수가 아닌가. 악플 같은 댓글을 맞는 건,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내 시가 아직 부족하다는 건 아닐까. 나는 화가 나면서도 그분이 남긴 말을 노트에 보관했다. 내가 쓴 시들을 한 번씩 다시 읽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위로를 구하기도 했다. 

나를 다시 돌아보는 건 어떨까. 그 사람이 나에게 던진 말은 분명 깊은 상처가 되었지만, 그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나를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보는 건 어떨까. 위기는 언제나 온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찾아와서 허를 찌르는 것이 위기다. 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아픈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치료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악플을 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다는 마음은 남이 아닌 나만 돌보아 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오랜만에 찾았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90년대 후반에 보았지만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시를 쓰면서 보니 그때와 마음이 달랐다. 영화 속의 우편배달부가 물어본 것처럼 시인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지 위대한 시인 네루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20년 차 직딩이다. 여전히 현업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내 직업이 자랑스럽다. 시인은 직업으로서는 좀 힘들 것 같다. 멈추지 않고 쓴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년째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니 길이 나타났듯이 시 쓰는 일이나 글 쓰는 일도 경험의 축적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아래의 대사는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시인 네루다가 한 말이다.

잘 들어, 마리오, 
난 내가 쓴 글 이외의 말로 
그 시를 표현하지 못하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상황에 맞게...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이야. 


- 파블로 네루다


https://www.youtube.com/watch?v=95IvXVD0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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