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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28. 2018

혼자만의 글 쓰는 시간

나를 찾다.

달빛이 저물고
어둠이 창가에 비치면
우리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지 않아도 돼
네가 지나가는 모든 길에
내가 서 있을 테니
너는 내 목소리를 따라
빈자리에 날아오면 돼

너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혹은 가장 슬픈 얼굴로
세상의 모든 따뜻한 얼굴과 함께 오겠지

네가 올 때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 되어서 너를 안아줄 테니





  밤이 깊으면 나를 찾는다. 그 시간은 오직 혼자 있는 밤이 유일하다. 찾는다는 것은 원래 내가 소유했던 것을 구한다는 뜻이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밝혀내려고 애쓰는 행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보아도 분명치 않은 걸 보면, 되찾는 것보다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음이 더 맞는 해석이다.

  잃어버렸던 무엇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왜 글에 집착할까. 글을 쓰면 돈이라도 튀어나오나. 글쓰기는 나의 속물적 근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아닐까. 궁극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글 덕분에 물질적인 자유가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자유라는 것은 자의적으로 바라는 것을 마음속에서 떨쳐버리고 버린다는 뜻이다. 현재는 그렇게 못하지만, 이상보다는 어두운 현실이 훨씬 가깝지만, 생각 저 너머에는 보다 완전한 세상이 존재할 거라는 옅은 기대감으로 나는 쓴다.

  충분히 행복한 하루를 마감하고 있어도 허전함은 지울 수 없다. 허전함을 지우려고 글쓰기에 매달리는 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도 매우 바쁘고 진지한 날이었다. 여러 번의 위기와 고비를 겨우 넘겼고 감정의 널뛰기도 극복해야 했다. 글쓰기는 감정을 제대로 보는 효과를 제공한다. 보기 싫은 더러운 것들까지 모두 포괄한다. 역겨운 감정을 글에 토해내면 사람들은 그런 글을 읽고 나란 존재에 대하여 온갖 평을 내리고 섣부른 진단을 내릴 것이다. 나란 인간의 특성은 타인의 생각과 판단에 휘둘리고 정체성은 폄하되고 엉뚱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럼에도 내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에 솔직할 수밖에 없다. 삶을 일부러 아름답게 장식하는 방법으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가짜의 나를 창조하는 짓이다.

  역한 감정을 부여잡고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카타르시스다. 내면에 붙어있던 찌꺼기를 떼어 바람에 쓸려버리는 것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작업은 늘 고통스럽다. 그래서 써놓고도 지워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스럽다.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존재를 날려보낸다. 어차피 수없이 많은 나와 만나야 할 테니. 심야의 시간마다 특정할 수 없는 나를 만나야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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