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 : 연결하다
연결하다
영화 <마션>에서 와트니는 불의의 사고로 화성에서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다. 통신 안테나마저 부서져 지구와 통신마저 불가능한 위급 상태로 빠진 것이다. 단 300일 치 식량으로 4년 후 다음 탐사선이 도착할 때까지 과연 그는 생존할 수 있을까? 나사와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는 어떤 방법으로 통신을 복구할까?
연결하다, 라는 동사를 살펴보자. 이 단어의 뜻은 ‘사물과 사람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이어지거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연결은 우리에게 두 가지 가능성을 안긴다. 서로 이어지거나 관계를 맺고 있으면 안락함을 주지만 끊기면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전달한다. 연결은 관계를 맺거나 그렇지 않은, 오직 하나의 상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끊어진 상태는 고독을 뜻한다. 고독은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의 최선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연결하는 것이다.
네트워크란
연결의 대부분은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진다. 네트워크는 컴퓨터가 데이터를 교환하는 LAN이나 Wi-Fi 망을 언급하는 단어로 한정하지 않는다. 의미를 포괄적으로 확대하여,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학교, 직장, 조직, 사회 등이 모두 네트워크에 해당이 된다. 네트워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이익을 교환하는 추상적인 사회라고 정의한다.
작게는 물론 비트 및 바이트 단위의 데이터가 이동하는 통신 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4차원 산업 혁명의 핵심은 ‘연결’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플랫폼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공급받고 소모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데이터는 엔터테인먼트, 자기 계발, 업무 든 다양한 영역에서 내가 아닌 타인과 소통하는 역할을 밑바닥에서 수행한다.
네트워크의 노예
우리는 자나 깨나 데이터의 지배를 당하는 노예가 된 지 오래다. 우리가 사용하여 발생시킨 불규칙한 데이터는 학습과정을 통하여 정형화된 형태로 프로그램되고 개발된 프로그램의 규칙은 다시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인공지능 스피커, 스마트 TV, 스마트 냉장고, 공기 청정기, 자동 주행 자동차, 디지털 도어록, 보안 시스템, 냉난방 시스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장치가 네트워크 하에서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 꽤 편리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시스템을 컨트롤하는 중심축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은 작은 컴퓨터 장치에게 읽히고 플랫폼이라는 중앙 서버의 체계를 통하여 통제당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만든 규칙은 인공지능이 학습하여 패턴이라는 형태를 낳는다. 그 중심에는 바로 스마트폰이 있다. 스마트폰은 작지만 당신이 소유한 덩치가 큰 데스크톱의 성능을 능가한다. 외부에서든 내부에서든 우리는 Wi-Fi와 LTE, 3G를 통하여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서비스를 내려받는다. 서비스는 꽤 자기중심적인 것 같다. ‘어떻게 내가 원하는 걸 이해하고 추천을 해주지?’ ‘이거 완벽한데?’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우리는 그 맛에 취해있다. 내 개인 정보가 네트워크를 타고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연결의 폐해를 알면서도 그 세계와 소통하려 한다. 온라인으로,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며 신의 영역으로 연결되려고 한다.
고립
연결의 반대는 고립, 끊긴 상태다. <마션> 와트니처럼 화성에서 홀로 버려진 상태를 말한다.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한 상태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절은 타의적인 감정의 결과다. 그래서 우울함과 외로운 상태를 동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기한 것은 고독의 감정이 부르는 연결하고 싶은 욕망이다. 모순된 것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끊임없이 연결하고 싶다는 본능이다. 물론 전적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과 내가 기피하는 고독은 대척점을 이룰지도 모른다. 연결하고 싶으면서도 물리적으로 떨어지고픈 바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세상이 내 것이 된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 잠들기 전 잠시라도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채팅방,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같은 연결이 필요한 네트워크라는 인프라로 뭉쳐진 세계 말이다. 불이 꺼진 밤, 빛을 발산하는 사각형의 화면이 구원의 창구는 아닐 텐데, 나는 자의식이 아닌 타의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가끔 비슷한 꿈을 꾼다. 직장이라는 루틴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마치 조르바처럼 내면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삶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타인과 연결되지 않는 상태의 내가 독립적으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 엄밀히 말한다면 무엇을 좋아하는지부터 의심이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행동을 주저하도록 만든다.
안정감
네트워크는 불안한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미약하고 볼품없는 나라는 존재는 네트워크 안에서 꽤 강력한 아이템을 보유한 캐릭터로 포장이 가능하다. 네트워크는 현실을 감추고 허물까지 덮는다. 연결은 어쩌면 인간이 생존해야 할 무기가 아닐까?
인간의 힘이란 조직에서 출발하는 걸지도 모른다. 조직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자신이 보유한 정보와 경험을 나눔으로써 성장하는 게 아닐까? 설사, 연결된다 하여도 그 상태를 유지하려면 실력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연결에서 차단을 당하는 것이 세상의 냉엄한 질서다.
우리는 단 하나의 조직이라 할지라도 그 시스템이 존재하도록 연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내가 맡은 부분이 부실하거나 뿌리가 흔들리는 상태로 전락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실력이란 결국 연결 지능을 말한다. 인공지능이 득세하는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결국 연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제를 원한다. 에리카 다완은 ‘연결 지능이란 세계의 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사람과 복잡한 정보 관계망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 자원 등을 결합하고 연결해 통합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를 발견하는 재능을 가리킨다.’라고 말했다.
생존
우리는 늘 낯선 환경에 노출이 된다. 디지털이라는 옷을 갈아입은 현대인은 지속적으로 연결되어야만 생존하는 시대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연결에서 버림받고 싶지 않지만, 관계를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발가벗겨진 상태로 노출되어야 한다. 개인 정보라는 것은 이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려 휴식이 필요할지라도, 나는 다시 네트워크로 연결이 중요한 사회에서 요긴한 역할을 담당할 개체가 되고 싶다.
인간은 어쩌면 연결이 필요한 시대의 작은 부품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삶을 살다 인생을 마감할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 시간 글이라도 쓰련다. 그 길이 타인이 만든 네트워크로 연결되려는 것이 아닌 내가 주체자가 되어 나만의 네트워크를 창조하는 길이라 믿고 싶다.
콘텐츠의 시대라고 말한다. 작가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최일선에 서 있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연결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 네트워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신은 없다. 미미한 확률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기대보고 싶다. 삶은 어차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래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거다. 어떤 것이든 내가 연결의 중심축에 서는 날, 그 행운이란 것을 부여잡으려고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블로그나 이곳 브런치가 놀이터가 될지는 부정적이다. 콘텐츠를 생산하려는, 그래서 네트워크 중심부로 연결을 원하는 창작자가 한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내가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썩은 동아줄이 아닌 살아있는 연결 지점은 어디란 말인가? 고민과 사유는 끝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세계로 연결되어 그 틈바구니에서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연결에서 버림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션>의 와트니처럼 나는 당신과 연결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