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16. 2018

[시필사] 박준 - 가족의 휴일




별일 없는 주말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었고, 나는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꺼내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공녀>였을까? 아니면 <어린 왕자>였을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시간에 흐르던 나지막한 공기, 대화들이 내가 지금 찾고 싶은 것들이니까.

갑자기 캐비닛 책상을 버려야 한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회사에서 들고 온 몇 안 되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난 접이식 의자를 펴놓고 앉아 동화책의 세계로 빠져들곤 했는데, 그 그림을 아버지가 무척 좋아했다. 아버지가 맘에 들어 하는 걸 보여주는 게 좋았을지도. 어쨌든 난 새 책상이 생기는 줄 알고, 잠시 나에게 찾아왔던 물건이 버려지는 걸 꽤 반겨 했던 것 같다. 

그때, 어떤 기억이 불쑥 문을 두드렸다. 열쇠로 잠가둔 서랍이 생각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열쇠조차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아마도 내가 넣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애를 써도 좀체 열리지 않는 서랍과 아버지의 땀을 쳐다보는 게 재미있다는 생각을 할 무렵, 마침내 서랍이 개봉됐다.

그 안에는 국민학교 2학년 때 받은 온갖 상장들이 들어 있었다. 나에게 이런 종이 쪼가리들이 있었나, 내가 그런 것들을 받아왔었던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칭찬이 가득 담긴 성적표와 상장 무더기들은 버려질 운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누런 종이봉투에 담았다. 봉투는 꽤 두툼해 보였다. 

아버지는 다시 책상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난 책상이 빠진 빈자리를 바라보다 두툼한 종이봉투를 보고 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쳐 지나가는 단상들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