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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Dec 23. 2018

공대생의 심야서재 ‘베이직 시즌 2’ 글쓰기 모임 후기

각자 무엇을 깨달았을까?

공대생의 심야서재 ‘베이직 시즌 2’ 글쓰기 모임이 마무리됐다. 한 시즌을 종료할 때마다 ‘아, 언제 10주가 훌쩍 지나갔지?’, ‘이번에도 무사히 잘 끝낸 걸까?’, ‘합평 시간과 코멘트가 문우들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었을까?’ 등 여러 질문을 던지게 유도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는 아무리 머릿속을 지우개로 쓱싹쓱싹 문질러대도 사라지지 않는다.


성장하려면 ‘반성적 사고’는 필수인 셈이다. 당장 퇴사라도 해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거나 돈을 들이붓는 마케팅 활동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끌어모을 궁리나 할 것이 아니라, 10주 동안 글쓰기 모임을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무슨 일들을 벌였는지 앞으로는 어떤 콘텐츠를 보강해야 하는지 반성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반성적 사고는 배움을 이끈다. 다음 스텝으로 일보 전진하기 위해서 말이다.



후기를 남긴 분의 글에서 한 문단을 발췌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늘 어깨에 힘을 잔뜩 쥐고 다녔다. 연필을 너무 꾹꾹 눌러대는 바람에 툭툭 부러져 종이가 찢기거나 글자에 흑심이 번지기 일쑤였다. 흔히 힘을 빼라고 한다. 힘을 빼지 못하면 긴장하기 때문이다. 긴장은 근육을 경직되게 만들고 사고를 정지시킨다. 그래, 우리는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정체되어 있지 않으려고 배우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어 다가서고, 문들 두드리고 힘껏 문고리를 돌리고 만난다.



수업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대를 할 것이다. 10주간의 수업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듣는다면 글쓰기가 획기적으로 늘 것이라고. 자신의 글을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쏟고야 말 것이라고, 그래서 그 경험을 남들에게 간증하는 시간을 갖게 될 거라 기대할 것이다. 그래, 그런 순간은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 맞는 터뷸런스만큼이나 흔하기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을 하여 비행기에 오르지 않는다면 결코 겪을 수 없는 고통과 동시에 안도의 순간일지도.


쉽게 말한다면 글쓰기는 그저 습관 쌓기에 불과하다. 가족들과의 시간을 뒤로하고 카페 한구석에 처박혀 홀로 2시간은 흘려보낼 수 있는, 오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걱정하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노트에 펜을 끄적거리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불쑥 글감으로 찾아와 그것을 받아 적느라 몇 정거장을 훌쩍 지나쳐버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 궁극의 재미가 되어버리는 일, 그것이 바로 글쓰기 습관을 기르며 겪게 될지도 모르는 무서운 사건들이다. 


<쓰기의 감각>에서 앤 라모트는 “어떻게? "일단 책상 앞에 앉으라고. 당신은 매일 거의 똑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무의식을 창조적으로 작동하도록 길들이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매일 아침 아홉 시라든가, 매일 밤 열 시에 책상 앞에 앉으면 된다. 타자기에 종이 한 장을 넣던가, 컴퓨터를 켜고 빈 문서를 연 다음, 한 시간 가량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 부정만 하지 않으면 된다. 의심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습관적으로 글을 쓸 것이고, 그것이 당신의 눈물 콧물 장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기폭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래 윗분이 말씀한 것처럼 글쓰기가 습관이 되었다면 그다음은 자신감이다. 비문, 맞춤법, 추상적인 문장, 단문 쓰기, 주어와 술어의 호응, 어휘력 등의 교정은 사실 단순한 것들이다. 글쓰기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 의심, 부정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향상될 수밖에 없다. 다른 신묘한 비책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면 미안하지만 그런 건 딱히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절실한 삶의 자세로, 글을 쓰면서 어떤 철학적 경험을 타인과 나눌 것인지, 나는 능히 그 단계를 넘어서고야 말겠다는 용기, 자신감이 필요한 것이다. 변화는 실천에서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 마음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10주가 지났을 때, 이전에 쓴 글이 너무나 부끄러워 머릿속에서 삭제하고 싶다거나, 내가 왜 그런 공산당 하급 나부랭이들이 골방에서 생산하는 선전물 같은 글을 썼는지, 나르키소스처럼 자아도취에 빠진 나머지 공개하지 못해 안달이 난 바람에 후회할 일들을 벌였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글쓰기는 어떤 수확을 안겼을까? 윗분처럼 단순한 말 한마디가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말하듯이 써라’ 상당히 간단해 보인다. 말이 어눌하다면 글로 보강이 될까? 상호 보완 관계일까? 말과 글 둘 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임은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분명해진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는 것 말이다. 말은 손짓, 발짓, 표정 등을 활용한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평상시 잘하던 말들이 긴장된 어투로 돌변한다. 내가 아닌 ‘나’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그런 상황은 글을 어색하게 만든다. 분명 내가 쓴 글인데, 나는 없는 현상을 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쓴다. 글에는 작가의 에피소드, 사유, 인용 등이 포함된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혼자서는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함께 쓰고 공감을 나누고 건설적인 비평을 통하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된다. 그것이 어떤 틀에 갇혀있던 나를 깨우치게 만든다.





최근 나는 글쓰기 및 첨삭에 관한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내가 글쓰기에 관련된 논문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어색하다. 학창 시절, 아니 30대에 진즉 공부해놓을걸, 늦은 나이에 발견한 다른 재능이 삶을 고양시킨다. 가끔 듣던 ‘不狂不及’ : ‘미치지 않으면 일정한 정도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고 할까? 어떤 말이든 내 것이 되려면 그 문장에 체화하는 경험을 겪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새삼 깨닫는다.


시즌은 계속 이어진다. 오늘도 수업에 참석한 문우들의 글을 성심껏 읽을 것이고, 알에서 뛰쳐나올 수 있도록 나는 바깥 껍질을 살짝 두드려 줄 것이다. 문장의 첨삭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구조와 형식을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할 것이며, 책에서 읽는 문장을 가끔 소개할 것이다. 그리고 보모처럼 살뜰하게 문우들의 글을 돌보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꿈을 응원할 것이다. 그게 내가 바라보는 글쓰기 강사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생각해본다. 수많은 글쓰기 강사와 다른 차별점을 찾기 위해서 가끔 방황을 겪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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