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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25. 2016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나의 상처와 마주 앉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희미한 나의 기억에 남아있었지만 곧 종적을 감췄던... 아니 지워져 버린 것이 맞다. 언제 내가  이 책을 스쳐 지나갔는지 아득한 기억조차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런저런 연유로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어느 시점을 계기로 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제제와 첫 대화를 나눴다. 부끄럽게도 그 책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지금 와서야 무겁게 꺼내 드는 것은 아직도 꺼낼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잊고 싶은 기억들, 깊이 패인 상처를 후벼 파는 것 같은 몸서리치는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이 세상엔 반드시 읽어야 할 '양서'들이 있다. 제제는 어쩐지 나와 통할 것은, 내면의 나와 한줄기 빛과 같은 통로로 엮여, 그 공간에서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제제를 대했던 나의 건조함이 창피해졌다. 당연히  마무리해야 할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가까스로 제출하는 조급한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 글은 사실 작년(2015) 한 참 이슈가 불타오를 때,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생각들을 정리하고 흥분했던 당시의 심경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아마도 중학교 무렵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제제는 내 곁을 떠났고, 나도 나이를 두껍게 먹었다. 출간 무렵 친구들로부터 책의 내용을 듣고 호기심을 느끼긴 했었지만, 다른 활동적이고 더 왕성한 에너지가 넘치는 것들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고 할까? 무엇인가에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라고 할까? 어쨌든 이 책은 이런저런 연유로 내 시야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런데 어느 가수와 제제와 관련된 뜨거운 논쟁이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통하여 들끓게 되면서, 도대체 왜 사람들이 반으로 진영이 갈려, 그토록 광적으로 상대방에게 시퍼렇게 날이 선 언어들을 토해놓는지, 어느 쪽의 말이 더  것인지 직접 읽어보고, 그리고 나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를 잠깐 나눠보자면, 어릴 적 집에 혼자 있을 때, 나와 친구가 되어주며 마음이 끌렸던 것은 세계문학전집 류와 같은 동화책들이었다. 책들에 담겨있던 기본 철학은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 것이. 하지만 '선한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다간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는 삶의 매정한 현실을 깨닫기도 했다. 아마도 나 역시 제제처럼 각박하고 냉엄한 사회의 생리를 너무 일찍 알아차려버렸던 것 같다.
 


돈이 있어야만 더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현실, 내 친구들은 모두 번듯한 집이 있는데, 왜 우리는 반 지하에서 살아야 했는지, 어린 마음이지만, 가난은 가까운 '친구' 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창피한 현실이었으며, 나를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가둔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나는 부끄럽다는 뜻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사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닐 뿐, 다만 불편한 것이었는데... 나의 잘못(이를테면 공부? 하지만 난 공부를 나름 했었다.)으로 아버지의 방황이 시작되었던 건 아니었나, 내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하며, 나의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물론 내가 제제의 나이와 같은 다섯 살 무렵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유년기 때 겪었던 트라우마 따위가 현재의 나의 심리적인 상태를 반영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제제가 겪은 어마어마한 상처와 내 것을 비교하는 것은 생각하기 싫은 또 하나의 고통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만약 나의 마음이 제대로 여물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나도 제제처럼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라고 제제의 마음을 무한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제가 옆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제제는 다섯 살짜리 아이다.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야 할 그런 나이다. 그런데 제제는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형으로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제는 자신이 매 맞는 이유가 자신의 마음에 악마가 있어서, 자신이 쓸모없는 아이이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제는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사라고 사랑을 받는 아이였다. 그의 가족들은 가난이라는 굴레의 스트레스를 어리기만 한 제제에게 풀어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제제는 감수성이 예민했고 이미 모든 세상의 무서운 현실을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였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글을 깨우칠 만큼 똑똑했고,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을 느끼고 금방 배우고 마는 영특한 아이였다. 그런 영특한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땠을까 나는 궁금했다.


 

제제가 영특한 아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학대받는 것을 일부러  유도한 것은 아니었나?라는 발칙한 상상을 해봤다. 심리적으로 쫓기는 아이가 자신에게 스스로 막다른 골목으로 더 깊이 내몰리도록 자신의 자아를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이 가정에서 희망이 없으며, 자신에게 밝은 미래가 없음을 판단하게 된 순간,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의 청소년처럼 자신을 절망하도록 아무렇게나 내버려뒀다는 것이다.



제제가 당하는 학대는 일반적인 학대의 수준을 넘어선다. 책으로 접하는 내용만으로도 처참한 광경을 그릴 수 있었고,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슬리퍼로도 모자라 허리띠를 풀어 채찍질하듯, 폭력을 행사했다. 따귀를 때려 이빨이 빠질 정도였다. 제제는 그런 아버지를 유전적인 아버리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나중에 만난 정신적인 아버지인 '포르투가'가 실제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는지 소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포루투가'가 죽게 되고, 제제는 엄청난 마음의 병을 앓고 죽을 고비까지 넘기게 된다.  이때  거의 포기하려고 했다.


 
내가 유년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 상처를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다. 동생은 누나에게 창녀라 욕하고, 누나는 그 동생에게 지칠 때까지 폭력을 구사한다. 가난뱅이 아버지가 싫다고 하고, 또 아버지는 그 아들을 죽도록 때린다. 제제가 영악했다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폭력적인 집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삶의 기술들을 너무나 일찍 터득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제제는 아버지가 없다 생각하고 길에서 만난 아버지 '푸루투가'에게 부정의 대상을 옮긴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이런 암울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었을까? 나도 지금 이렇게 가슴이 너무 아픈데 말이다. 제제에게 가하는 폭력의 정당성을 위해서 “너는 악마이기 때문에 맞아야 돼”라고 말하는 가족이야 말로 진정한 악마가 아닌가? 그리고 그 폭력을 방치하는 어른들이야 말로 진짜 악마다.


 
악마 같은 그의 가족은 제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가족들은 분노를 제제에게 풀고 있었고, 결국 제제가 마음으로 기댈 대상은 새로운 집 뒷 뜰의 오렌지 나무인  밍기뉴뿐이었다. 제제는 마음의 언어로 오렌지 나무인 밍기뉴와 대화를 했고, 마음속의 숨은 이야기들을 밍기뉴와 나눌 수 있었다. 제제에게 밍기뉴라는 친구가 없었다면 유년 시절을 제대로 감당 해 낼 수 있었을까?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된 제제의 친아버지가 제제가 아파하는 이유를 밍기뉴 때문 인 줄 착각하고 다른 것을 주겠다고 하자, "내 라임 오렌지 나무는 이미 베여버렸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 부분에서 더 이상 제제는 친아버지를 아버지의 대상으로 인지하지 않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기억나는 장면의 대화들이다.


내 마음에 당신이 다시 태어날 수 있게 그렇게 죽였어요
 
진정으로 삶을 노래하는 시는 꽃이 아니라 물 위에 떨어져 바다로 떠내려가는 수많은 이파리들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죽는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 몹쓸 기차가 한번 지나가면 그만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이다지 어려운 걸까? 내가 가지 못하도록 모두들 내 다리를 붙잡고 있나 봐

생각이 자라고 커서 우리 머리와 마음을 모두 돌보게 돼. 생각은 우리 눈과 인생의 모든 것에 길들게 돼


누군가 순수하고 천사 같은 제제를 상업적인 용도로 로리타와 같은 대상으로 터부시 하여 활용하거나 그의 순수한 마음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래는 어느 가수가 제제에 대하여 느낀 감정을 가사로 붙인 것이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잎을 가져가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출판사인 동녘 측은 어느 가수의 가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동녘은 "제제는 다섯 살짜리 아이로 가족에게서도 학대를 받고 상처로 가득한 아이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들어야만 하나요?'라는 제제의 말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제제에게 밍기뉴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주는 유일한 친구이고요"라고 설명했다.



저자도 아니고, 번역자도 아닌 출판사가 이런 논평을 낸 것은 상당히 의례적인 일이다. 제제를 번역하고 출간하기 위하여 출판사와 번역가는 오랜 시간 동안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주인공인 제제를 만나기 위해 고난의 과정을 거쳤고, 긴 시간의 작업을 통해서 제제가 죽고 나서야 한국에 소개된 우여곡절이 많은 책이다.

 


이 책을 읽었다면 제제가 겪었을 하위 층 계급의 아동학대 현실을 모를 리 없다. 제제는 암울한 가정에서 소중한 사랑을 이끌어낸 존재가 아닌가? 그가 성적인 대상으로 평가받았다는 거 자체가 유쾌하지는 않다. 다양성의 관점을 떠나서 학대받는 제제에게 망사 스타킹을 신겨놓고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봐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제는 에드문드 아저씨가 얘기했던 것처럼, “넌 큰 인물이 될 거다. 요 녀석 네 이름을 주제라고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니 깐, 넌 태양이 될 거야. 별들이 네 주변에서 빛나게 될 거다. 현실이 되었다. 브라질의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불쌍한 제제는 그렇게 브라질을 떠나 전 세계에서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내 마음속에도 제제는 영원한 별로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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