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an 16. 2016

수상한 커튼의 그녀에게

조용하게 듣는 노래

"음악을 좋아하는 나"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음악 듣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문제적 시대를 앞서간 음악 듣기를 통해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친구들보다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그들보다 앞서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가요를 듣는 다는 건, 평범함과 진부함 그리고 식상함 들로 대변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존 사고의 틀에서 머물러있는 행위라 스스로 치부하여, 가요 듣기를 막연히 거부했던 반항기의 시절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편견은 90년대가 시작되며 점차 사그라졌고, 음악적인 취향도 나이에 따라서, 감정에 따라서, 처한 환경에 따라서 시기 각각 자유롭게 변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우리 가요의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수준이 함께 높아져서 매일 TV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걸 그룹과 같은 눈으로 보는 음악이 아닌 귀가 호강하는 좋은 음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은 책읽기에 빠져서 음악 듣기에 잠시 소홀하기도 했지만, 음악은 파괴된 영혼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영양가 높은 치유제라고 생각합니다. 지쳐있을 때 즐겨 듣던 음악을 귀에 먹여주면 마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며, 그 어떤 약보다 몸에 이로움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독서와 음악"


책의 종류에 따라서 음악이 독서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몰입이 필요할 때는 잔잔하고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음악(클래식 또는 재즈와 같은)을 틀어놓게 되는데, 그럴 때는 소리가 한 귀로 흘러 들어왔다가 나도 모르게 다른 귀로 흘러나가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멜로디가 분명 귀로 쑤욱 들어오긴 했는데,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사라져버립니다. 아마도 집중 때문이겠지요.. 책에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자꾸만 음악에 더 신경을 써서 듣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읽었었는지, 방금 읽은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글들이 반대로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바고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냥 음악 하나만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서 책상에 앉기도 합니다. 제 책상에는 작은 DAC와 소박한 스피커가 있습니다. 거실에서 음악을 제대로 들으려면 플레이어를 키고, 리시버를 작동해야 하고 청취환경이 좋은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야 하는, 값비싼 수고스러움이 동반되지만 책상 앞에서는 그저 노트북의 플레이 리스트에서 원하는 곡들을 골라 더블클릭만 하면 됩니다.





"수상한 커튼의 <그녀에게>"




오늘 소개시켜 드릴 곡은 <수상한 커튼>이라고 하는 이름부터 수상한 국내 인디 레이블의 <그녀에게>라는 곡입니다. <수상한 커튼>은 여성분 혼자서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노래까지 도맡아서 하는 완벽한 싱어송라이터 그룹입니다. <수상한 커튼>의 <그녀에게>는 사색적이면서도 잔잔한 풍이라 한편으론 무척 단조로워 보일 것 같지만, 실제로 노래를 들어보면 푹 마음이 가라앉아 가사와 함께 멜로디로 쉽게 빠져드는 마력이 있는 곡입니다.



시적인 가사는 멜로디와 합쳐져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소박한 피아노 연주와 복잡하지 않은 편곡은 바쁘고 쉴틈 없는 일상을 보내는 이의 어깨에 걸친 부담을 덜어주는 듯 합니다. 피아노는 그런 면에서 인간에게 혼잣말로 속삭이는 것 같은 따뜻한 위로를 안겨주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를 통한 재즈와 클래식 연주에 마음이 진정되고 감정이 허물어지는 것도, 어쩌면 조용하게 연인이 속삭이는 것 같은 호소력 있는 감정을 숨김없이 전달하기에 더 감칠맛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녀에게"는 담백한 그녀만이 가진 목소리, 피아노 반주 등 어쿠스틱한 연주만으로도 마치, 잔잔한 바다에 몸을 뉘여 반쯤 걸친 듯한 여유로움과 편안한 자세에 빠져들게 합니다.





음악이 지닌 진정한 힘은 멜로디에 살이 붙여진 가사라 생각 됩니다. 시적인 가사는 전달하는 뜻을 청취자가 깊게 생각하도록 하며, 보다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이게 나인걸 초라해 보여도
거울 속 내게 가끔은 혼잣말
멍하니 홀로 바라보는 풍경
낯선 일 향해 조용히 혼잣말


가사를 쓴 이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며 스스로를 초라하다고 체념 섞인 투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라한 자신의 모습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분신이며, 그 분신도 자신임을 묵묵히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극복한 것인지, 아니면 지쳐 쓰러져 버릴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멀리 멍하니 지켜보며, 홀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슴에 품고 미래를 향해 사는 사람입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으로 그녀(그)의 심리상태를 감히 분석해본다면, 그녀(그)는 자신의 쓸쓸하며 누군가를 외사랑하는 아픈 심정을 우리에게 솔직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녀(그)도 이미 알지만, 노래를 듣는 모든 이들이 그녀(그)의 읆조리듯 조용히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소망과 그리하여 그 소망이 그대로 담겨있는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냈음을 이해해 달라는 뜻입니다. 사랑 받기를 원했기에 혼자만의 거울 속에 투영된 쓸쓸한 자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녀(그)는 거울 속에 투영된 또 하나의 그녀(그)와의 과제의 영역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거울 속의 그녀(그)는 더 솔직하지만, 현실 속의 그녀(그)는 더 냉정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그녀(그)를 통해서 마음을 드러내지만, 감출 수 밖에 없는 속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멀쩡한 정신으로 버틸 수 없으며 마음이 자신을 붙들지 못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음을 인식합니다.

내 앞에 나와 날 어루만져줘
상상 속에만 널 두기엔 내 맘이 아프잖아
내 곁에 서서 나를 안아줘
너의 숨결을 내가 느낄 수 있게


사랑하는 사람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현실에는 실제로 없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일수도 있고, 노래 가사 속의 가상의 인물일수도 있습니다. 촉각과 후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상상 속에서만 모습을 그려보지만, 그리움을 더 깊어지고 만남의 희망은 더 짙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옆에 있어만 달라는 것을 떠나서 나를 안아주고 같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함께 하자는 큰 소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라볼 수 있지만, 상상할 수는 있어도 실제 이 사람과 같은 공간에 머무를 수 없다는 아픔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픔은 당사자로 온전히 감정 이입이 되지 않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더군다나 그녀(그)는 자신을 어루만져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촉각은 그 무엇보다 사랑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녀(그)는 사랑을 정확하고도 솔직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그녀(그) 주위를 맴돌지 말고 바로 그녀 옆에서 지켜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숨소리까지 들릴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말입니다.

이게 나인걸 초라해 보여도
거울 속 내게 가끔은 혼잣말

내 앞에 나와 날 어루만져줘
상상 속에만 널 두기엔 내 맘이 아프잖아
내 곁에 서서 나를 안아줘
너의 숨결을 내가 느낄 수 있게

들리니 너와나 함께 숨쉬는 이 곳에서
나의 맘을 담아 부르는 노래


혼잣말을 하다 결국 가사를 쓴 이는 함께 노래함을 갈구합니다. 마음을 한 가득 담아 진심으로 전달하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공간은 서로 함께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 공간은 서로의 마음을 공존하고 나눌 수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단 방향으로만 감정을 보낼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는 담담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 솔직하고 담담히 부릅니다. 비록 목소리가 그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녀의 마음이 정갈하게 정리되었다는 얘기일지도 모릅니다. 방황에서 벗어나 목청껏 노래를 부를 만큼 감정에 자유로워 졌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내 앞에 나와 날 어루만져줘
상상 속에만 널 두기엔 내 맘이 아프잖아
내 곁에 서서 나를 안아줘
너의 숨결을 내가 느낄 수 있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