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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11. 2019

나는 네가 10년 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과거를 수술한다. 에피소드 #1

2009년 8월 10일
제목 : 무가지 신문 쟁탈전

아침 출근길에 항상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휴가철이라 하더라도 출근길에는 지하철이 거의 만원이다시피해서 자리 잡고 서있기도 곤란할 지경이 많다. 그런데 그 좁은 틈바구니속에서도 무가지 신문을 차지하려는 할아버지들을 많이 목격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모습들을 보면 서있는 사람 툭 치거나 밀쳐서 선반의 신문 꺼내기, 키가 작은 할아버지들의 반말과 함께 툭치며 신물을 꺼내달라고 부탁하기, 경쟁자들과의 심한 몸싸움과 함께 욕설 내뱉기...

물론 그러한 무례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차지하려는 누구나 쉽게 습득해서 읽게되는 보잘것 없는 무가지신문이 어느이게는 소중한 삶의 지킴이가 될수도 있다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 늙은이가 느끼는 삶의 고단함이 어쩌면 나에게도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두려움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위의 글을 쓴 지 10년이 지났다. 과거의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차라리 블로그를 날려 버릴까? 0.1초 동안 고민한다. 수치스러운 과거도 내 것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글은 고칠 수 있다. 그래, 글이라도 뜯어고치면 인생도 바뀔지 모른다. 왠지 인생을 퇴고하는 것 같다. 내가 신이라도 된 듯하다. 그래, 작가는 신이다. 글로 세계를 창조하고 인물을 탄생시키고 신화를 만든다. 하지만 나는 관대하지 못하다. 내 과거까지 가만두지 못하는 나는 광기의 신이다.


첫 문장을 수술대에 올려 보자.


아침 출근길에 항상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출근길’이라는 단어는 이미 ‘아침’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여백이 있는 글쓰기란 독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작가의 욕심이 담긴 문장을 덜어내는 거다. '이용하고 있다' 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동작 또는 상태를 나타내지만, 굳이 진행형으로 문장을 쓸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매일 반복하는 일이니 간단하게 '이용한다'로 줄이는 게 낫겠다. 문장은 될 수 있으면 간결하게 써야 한다. ‘이용한다’로 고치자. 고친 문장을 다시 리뷰하자.


출근길에 항상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 잘 읽히지 않는다. 암튼 그런 기분이 든다. 다시 뜯어고치자. ‘이용한다’라는 문장도 별로다. ‘항상’이라는 부사도 그저 그렇다. 흔하디 흔한 단어다. 네이버 사전이 옆에 펼쳐져, 아니 네이버 사전에 접속한 크롬 브라우저가 보인다. ‘항상’을 검색하니 유사한 표현이 숱하게 나온다. 마냥, 늘, 노상, 언제나, 밤낮, 항시, 마냥. 음 뭘 사용해볼까나. 고르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왠지 ‘밤낮’이 당긴다.


밤낮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음 조금 낫다. 직장에 얽매인 느낌까지 든다. 게다가 출근과 퇴근을 밤낮없이가 모두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지하철 지옥에 빠진 직장인이 연상된다.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이다.


휴가철이라 하더라도 출근길에는 지하철이 거의 만원이다시피해서 자리 잡고 서있기도 곤란할 지경이 많다. 그런데 그 좁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무가지 신문을 차지하려는 할아버지들을 많이 목격하게 되는데...


일단 맞춤법부터 엉망이다. 네이버 맞춤법을 돌려 본다. ‘지하철이 거의 만원이다시피 해서 자리 잡고 서있기도 곤란할’ 문제가 있는 문장이다. 어디가 문제일까? 당신이 알아낼 수 있다면 내일부터 글쓰기 선생 노릇을 해도 된다. ‘지하철이 거의 만원이다시피 해서’ 이 문장을 생각해 보자. 만원 지하철을 상상하자.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이고 앞사람의 백팩이 내 안면을 가격할지도 모른다. 연상만 해도 서 있기 곤란하지 않는가. ‘자리 잡고 서있기도 곤란할’은 군더더기다. 과감하게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버리자.


휴가철이라 하더라도 출근길 지하철은 만원이다시피 했다.


분량상 다음 편에서 계속한다. 끝.



다음 매거진 글은 'Mee' 작가님의 <추석특집, 글포자 탈출 가이드>입니다. 글포자인 당신이 어떻게 하면 작가로 거듭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비결을 말씀해주신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다면 지금《매일 쓰다 보니 작가》글을 추천드립니다. 꾸준하게 글을 쓰며 자신만의 무기를 단단하게 다진 작가의 노하우가 궁금한 분들은 매거진 구독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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