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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4. 2019

우리가 도서관에 가야 하는 이유

가로, 세로 약 70센티 미터의 작은 공간에서 꿈을 다시 그린다.


백수 라이프의 시작


퇴사 후,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것이 백수 라이프에서 첫 번째로 뚫어야 할 관문이었다. 집중이 잘 되는 백색 소음이 흐르는 카페도 좋지만 카공족이라는 비난은 듣기 싫었고, 집은 너무나 편안하기에 글을 쓰는 일보다 잠자는 일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 앞섰다. 백수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최소한의 비용이라도 아껴야 질기게 버티지 않겠는가. 나는 최대한 돈을 적게 소모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는데, 그때 시야에 들어온 것이 도서관이었다.


과거 시청 건물을 리모델링한 서울도서관을 우연히 찾았다. 열람실에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고 책상마다 콘센트까지 있어서 장시간의 이용도 가능했다. 게다가 무료 Wi-Fi까지, 스터디족들의 천국이 아닌가. 조금만 부지런하다면 책도 읽고 업무까지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집중할만한 공간이 있을까. 며칠 동안 도서관을 출근하듯 드나들었다. 노트북으로 글을 썼고 프로그램을 짰으며 나머지 시간은 책을 읽고 메모까지 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카페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없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도서관에 가야 하는 이유


도서관은 끝도 없는 탐험이 펼쳐지는 지식의 생태계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인문, 자기 계발에 이르기까지 없는 보물이 없는 곳이 도서관이다. 하지만 보물의 가치는 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동안 현명한 사람으로 살았을까? 애석하게도 대학 졸업 후 도서관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도서관 탐험대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뒤늦게 참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걸까? 아니면 도서관에 한 번 출입해보니 신세계라도 맛본 것일까? 글쎄, 무엇이든지 필요성은 경험한 사람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는데, 난 그 경험을 글로 풀어낼 만큼 감동을 얻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막말로 그곳엔 진귀한 보물이 넘쳐난다. 내가 그토록 찾고 싶던 세상을 여는 비밀 열쇠가 가득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몇 천 년 된 철학자의 깊은 고민이, 우리는 우주의 끝을 과연 찾을 수 있는지 그 비밀을 캐내려는 과학자의 고뇌가, 아름다운 묘사란 무엇인지 그 정수를 건드리는 온갖 시적인 표현들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어떤 가혹한 책임이 뒤따르는지 그것을 꼬집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끝없는 사유의 물결을 일으키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사유의 파도에 압도당하는 곳이 도서관이다.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낯선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늘 티켓 창구 앞에서 주저하는 자신을 다시 본다고 할까? 지식의 위용 앞에서 나는 제압당하고 마는 것이다. 나의 왜소함을 탓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의 규모 앞에 나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지만 퇴사 후, 두려움은 용기로 재무장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고 특별히 갈 곳도 없다. 월 몇십만 원 투자하고 패스트 파이브나 위웍에 공간을 임대할만한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도 없으니 차라리,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다. 집에 하루 종일 기거하면서 밥이나 축내는 삼식이라는 별명을 얻느니, 머리가 허옇게 변하더라도 도서관에 거주하며 머릿속을 지식으로 가득 채우는 현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이유가 도서관에 가야 한다는 명분을 만든다.


어떤 분명한 목적


나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다. 돈을 소비하지 않고도 업무를 장시간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이 첫 번째, 모임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지식의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다. 낯선 인테리어, 낯선 사람들, 서가에 잔뜩 꽂힌 낯선 책들, 낯설고 낮은 소음들이 집중을 돕는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을까? 스타벅스가 부럽지 않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지만, 뭐 그 정도는 도서관을 탐험하는 길을 방해하지 못한다.



편리함보다 불편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몸과 마음을 반응하도록 훈련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우리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소모시키고 살지 않나? 스타벅스와 같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구매한다는 구실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있지 않는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의 감정,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때로는 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 주변 사람과 전쟁까지 불사하지 않는가. 단 돈 4천 원으로 8시간 이상을 혼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카공족간의 다툼은 흔한 일상이 되어 이제 뉴스에도 보도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내 마음, 그중에서도 욕심이 첫 번째로 비워진다. 도서관에서 창문 바깥을 바라보면 빈틈없이 꽉 찬, 여유가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 우주 먼 곳에서 바라보면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는 지구.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우린 규칙, 의무, 날 선 요구들을 짊어지고 산다. 몇십 년을 의심 없이, 기존 시스템에 길들여진 채 사는 게 과연 정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B612 소행성을 떠나 낯선 세계로 뛰어든 어린 왕자의 모험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찾는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나는 소설책 속의 상상을 넘나들며 타인의 삶을 합법적으로 도모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가끔은 시를 쓰는 시인의 생으로 빠져보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 도서관엔 아날로그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도서관의 개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하거나 빈자리에 앉아 읽다 오는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원한다면 PC가 설치된 자리에 앉아 영화를 시청할 수도 인터넷을 즐길 수도 있다. 시대가 변한다면 도서관 환경도 변하나 보다.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변할 것만 같은 공간이 빠르게 혁신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할까?



우리는 희망을 찾는다.


어느 날 즉흥적으로 퇴사를 결심한 날, 내 인생은 장밋빛으로 물들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늘어놓았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이던 날 나는 도서관을 본능적으로 찾았다. 희망도서 목록에 퇴사하면 꼭 읽고야 말 것이라며 다짐하던 목록을 끼워 넣었다. 개인에게 허용된 신청 권수는 제한되었지만, 기다리면 언젠가 그 작은 소원이 꼭 이뤄질 거라는 기대감은 소박했지만 간절했다. 희망이란 건 꼭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충족되어야 다음 희망도 꿀 수 있겠지.


내가 도서관을 찾는 이유는 수고스러움을 일부러 경험하기 위해서다. 조금 분주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의 거리를 이동하고 빈자리를 얻기 위해 눈치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자료를 찾기 위해 서가를 돌아다니는, 그 모든 수고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한자리에 안주하려는 의지를 깨부순다. 아마도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23년이라는 시간을 방치한 결과가 도서관을 찾는 결과를 만든 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평하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꼬박 5일을 일하고 나처럼 3일만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 3일이라는 시간에도 만료일은 반드시 존재한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나는 또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나야 할 것이다. 희망을 찾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는 도서관이 필요하다. 가로, 세로 약 70센티 미터의 작은 공간에서 꿈을 다시 그리는 것이다. 나는 직장인도 백수도 아닌 중간계쯤에 서 있다. 위태로운 삶은 도서관 바깥세상에서 치열하게 펼쳐지겠지만 적어도 도서관 70 센티미터의 공간 내부에서는 고요하고 안정적일 것이다. 나는 작은 공간에서 욕심을 허물어뜨리고 소박한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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