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문학동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걷는 듯 천천히> 중
결핍은 어떤 형태로든 에너지를 만든다고 믿는 편이다. 결핍은 무기력에 빠뜨릴 수도, 삶에 활력을 일으킬 수도 있다. 물론 선택은 개인에게 달렸다. 무서운 것은 결핍이 매너리즘으로 변질할 때다. 매너리즘은 우리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를 망각하게 만든다.
나는 20년 동안 일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조차 잊고 살았다. 질문 없이 집과 직장만을 전전했다. 그러다 출간 제안을 받은 적이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모두 IT 개발서였다. 글쓰기 전에는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안으로도 박찼고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는 멀티플레이어가 되느라 벅찼다. 이병률 시인처럼 가슴을 건드리는 문장을 쓰고 싶었고 피천득 선생의 “인연”처럼 여운이 있는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IT 개발서와 나의 두 가지 목적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지만……
출간이 꿈이라고 한들, IT 개발서는 업무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나는 ‘출간 작가’라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고 불투명한 미래만을 좇았다. 그땐 기발한 인생을 설계한다고 들떠 있었다. 인생 2 막을 위해 개발자가 아닌 시인이나, 에세이 작가를 선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고 믿었다. 두 가지 길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왠지 즐거운 일들이 펼쳐질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었다고 할까.
1. 잘하는 것 2. 좋아하는 것 3. 타인의 관심
세 가지 중에서 출간 가능성이 높은 분야는 '잘하는 것'이다. 내가 잘하는 건 물론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스타트업을 창업하며 사업 계획서 작성 스킬(테크니컬 라이팅)이 새롭게 추가되긴 했지만, 어쨌든 대학교 전공부터 20년 넘게 먹고살아왔던 주 종목이 아닌가. 책이 만들어지는 건 출간이 목적이라면 작가가 보유한 전문성이 첫 번째라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잘하는 것’이 해당된다. 그런데 난 그걸 스스로 발로 찬 셈이었다.
2015년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다. 왜 블로그를 시작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가 너무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질투였다. 사업 계획서를 쓰며 테크니컬 라이팅은 자신이 있었지만, 감성을 담은 문체는 내 영역이 아니었다. 내가 질투라고 언급한 것은 내 라이벌이던 동업자 친구의 글솜씨 때문이었다. 우연히 싸이월드에서 훔쳐본 그 녀석의 문장력은 정교하고 섬세했다. 깊은 나머지 아무리 내가 흉내 내더라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고 할까.
연습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행한다는 블로그를 하나 만들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사건들에 대한 단상을 적기 시작했다. 논리적이지도 공감을 부르지도 못하는 형태였지만, 닥치고 쓰기 시작한 거다. 물론 매일 0명의 방문자, 0명의 라이킷이 이어졌다.
방향을 약간 틀었다. 업무적인 내용을 잊기 전에 기록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직원들에게 블로그를 공유하고 궁금한 것은 블로그를 참조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블로그에 글을 꾸준하게 게시하며 점차 분야를 넓혀가다, 독후감이나 영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결론에 내 주장을 담아야 한다는 원리를 깨우쳤다. 요약만 하는 것은 재미없고 내 생각을 어떻게 멋있게 표현할까, 그게 글을 쓰는 이유였다.
결핍은 내가 글을 쓰게 만드는 촉매제다. 무기력하게 삶을 방치한 날들이 많았다. 결핍을 감추기 위해 바빴으니까. 결핍을 메우려고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도 그것은 일로는 채워지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우린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나처럼 아버지의 부재를 결핍으로 안고 사는 사람이 그것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처럼, 결핍은 때로 글을 쓰는 재료가 된다.
질문 : 여러분은 결핍으로 무엇을 만드시나요?
다음 매거진 글은 'Mee' 작가님의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 강의>입니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 강연에서 Mee작가님은 무엇을 얻었을까요? 궁금하신 분들 내일 꼭 읽어 봐요.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하고 두렵다면 지금《매일 쓰다 보니 작가》글을 추천드립니다. 꾸준하게 글을 쓰며 자신만의 무기를 단단하게 다진 작가의 노하우가 궁금한 분들은 매거진 구독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