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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Feb 22. 2016

존 윌리암스 - 스토너

지극히 평범한 인생이었다.



평범한 것이란?


'평범'한 것의 참 뜻은 무엇일까? 여기까지 도착한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평범한 부모, 평범한 학교, 평범한 사람, 이보다 더 평범한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엄밀하게 얘기한다면 평범해지기 위해서 굴곡 있는 삶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는 것이 맞다. 그러다가 내리막에서 오르막으로 오르던 중 잠시 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능력자들의 틈 속에서 평화로운 안정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몸부림과 얼마나 많은 눈치, 역경들을 견뎌내야 했는지, 지저분한 밑바닥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하여 얼마나 내 마음속에 불덩어리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불을 지폈는지, 심장을 단단하게 담금질시키기 위해 하루를 강하게 버텼는지 말로는 힘들것 같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다가 살짝 불씨를 지피고 이내 사그라지는 힘없는 성냥 한 조각의 떨림처럼 짧게 태우고 흔적 없이 아득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 인생의 섭리다. 내 삶을 기억하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가족 이외에 아무도 기억 못하고 지워질 것이다.


평범함이야 말로 어쩌면 모두가 누리던 삶은 아니었을까? 바닥으로 꺼지지 않기 위해, 살짝 고개라도 평범이라는 수면 위로 쳐들고 싶은 것이 모두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이라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평범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남들보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바람직한 '욕망'이란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가져야, 얼마나 높은 위치로 남을 밟고 올라서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앞질러야 행복한 인생일까? 세상에 널린 욕망이라는 것들로 감추어진 사회의 온갖 너저분한 가치들에 무심히 관심 없이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있는 듯 없는 듯 무시하며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존 윌리암스'의 스토너


존 윌리암스?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그 존 윌리암스 옹을 말하는 것인가? <스토너>는 동명의 '존 윌리암스'가 1965년도에 미국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그의 소설은 오래도록 묻혀있다가, 50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작가로서의 인생이 너무 평범한 탓이었을까?' 그의 삶도, 그의 소설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의 소설은 그의 사후 50년 만에 어떤 이유로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럽에서부터 바람을 타고 이곳 저것을 방황하다, 비로소 조용한 비행을 멈추고 살포시 내 품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마치 타지를 떠돌던 누군가에게 그립던 유해(遺骸)가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본국, 즉 고향으로 가까스로 돌아오게 되는 슬픈 상상을 하게 되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를 픽션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영문학과 교수였던 점, 주인공인 '스토너'의 평범한 삶이 작가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들과 비교했을 때, '자전적인 그의 인생을 소설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지금부터는 소설 <스토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것도 지독히 가난하고 가진 것 이라곤 땅이 제공하는 흙이 유일하며, 그 흑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 여겨지는 보잘 것 없는 농가, 특별한 것 없이라곤 일절 없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19살의 나이에 부모를 떠나 미주리 대학, 영문과에 입학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은 스토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를 가리고 있던 그늘막 같은 부모로부터, 어쩌면 그가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를 평생 돌보며 살아야 하는 어떤 운명,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농사라는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소설을 접할 때, 그 소설 속의 척박한 현실이 내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때, 몸서리처지게도 나의 삶과 맥락이 닿아있음을 나도 모르게 인정하게 될 때, 어느 순간 소설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부인하고 싶지만,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막연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순간 나의 입장은  제삼자로 멀찍히 떨어지고 싶어도, 심연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토너의 삶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나의 이야기로, 나의 삶으로, 어제의 나의 악전고투 속의 과거로 투영을 시키고 있었다.


미주리 대학교


스토너는 그에게 단지 무미건조한 삶을 탈출하기 위해 가녀린  빛줄기와 같은 구원의 희망을 '아처 슬론' 교수의 몸짓과 언어들로부터 발견한다. 아처 슬론의 건조하고 무관심하며, 아무 의미 없는 몸짓과 언어들로부터 작은 희망을 고대하는 스토너의 모습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말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 19 


아처는 스토너에게 묻는다. 아래의 질문을 던지는 아처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이야기하는 폐쇄된 공간은 스토너가 갇혀있던 그를 오래도록 괴롭히던 관념 속의 세상일까? -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그 무엇도 되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없는...' - 아니면 미주리 대학교의 영문학과의 좁은 공간에서 어느 것도 될 수 없는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하는 스토너를 비판하려는 것일까? 


"자네는 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른바 세상이라는 곳으로 나가는 날을 고대하고 있나? - P. 30


스토너가 되려고 하는 대상의 대해서 그의 친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깐 - P. 46



참전하지 않다.


절친의 군 입대를 두고 스토너는 비겁할지도 모를 결정을 한다. 스토너는 전쟁에 무심했다. 아니 애국심이란 것에 관심 조차 없었고, 애국심이라는 허울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무심히 던지는 것도 포기했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농부의 아들만 아니라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 따위는 스토너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스토너는 자신의 육신과 정신에 솔직했다. 허상 같은 애국심 따위는 일찌감치 그의 인생에서 배고픔과 같은 생존의 목적들과 비교될 수 없었다.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었다. - P. 53


스토너가 전쟁에 참전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죽음까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이슈에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미래를 묵묵히 만들었으면 하는 이유, 그 꿈이라는 것들이 아주 원대한 것이 아닌, 잔잔한 물결 같은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그것이 그가 그리고 싶던, 조용히 삶을 마치고 싶었던 투박한 이유였다.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


스토너는 그가 한 때 동경했던, '아처 슬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깡마르며, 구부정한 모습 말이다. 스토너는 아처 슬론의 모습으로 '이디스'를 만난다. 첫 눈에 이디스에게 반한 스토너는 그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사랑이라 착각하며 이디스와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난 이디스의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과연 그들의 앞날이 순탄할지 의문이 들었다. 


이디스는 스토너를 만날 때부터 결혼으로  이어지기까지 줄기차게 경계를 놓지 않았고, 모든 결정에는 마치 인생을 포기한듯한 체념을 마음속에 가득 담갔다. 그런 체념과 결혼의 굴레 속에 그녀의 마음들을 가두고 싶지 않은 것이 스토너의 양보란 것들이었다. 불가피한 선택 때문에 시작된, 악몽과 같은 결혼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스토너는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악몽마저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는 성인군자였던 것일까? 나와 같은 일반인이라면 그녀의 히스테리와 역겨운 경멸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고, 분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토너는 그저 욕망이라는 가면 앞에 자신의 미래를 무심히 던져두고 싶을 만큼 이디스를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어둠 속을 뻔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왠지 낯설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 P. 98


그녀가 스토너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부모라는 굴레에서 탈출하고 싶은 단순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스토너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남자면 된다는 사실 하나였다. 누구든지 그녀가 부모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면, 그녀를 일상의 고통과 모든 형식적인 상징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면, 스토너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사람이라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 이유 때문에 스토너를 선택했고, 스토너의 인생 속에서 끝없이 그를 괴롭히고, 경멸하고, 무시하며 그의 자리를 그녀로부터 지우려 했다.  스토너는 불쌍했다.


결혼식 전의 이디스의 이미지가 창백함, 차가움, 건조함, 예민 함이었다면, 결혼 후의 이디스는 실패함, 무력함, 히스테리, 경멸감, 모멸감, 수치심, 자포자기와 같은 감정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의 대상은 스토너였다. 작가는 스토너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 하나하나에 인물들이 가진 복잡한 감정의 특성들을 면밀하게 담아냈다. 특히 이디스의 감정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들과 사물의 모습들에 그것들이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사실 스토너가 택한 결혼이 실패라는 것은 일찌감치 작가의 고백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 P. 107


아처의 사망


아처 슬론은 그의 연구실에서 앉은 채로 사망을 하게 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스토너는 자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서글픈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 127


계속되는 이디스와의 불행


이디스는 이제 대놓고 스토너를 멸시한다.


"난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이런 아파트라니. 집 안 어디서든 당신 소리와 아기 소리가 들려요. 게다가... 냄새는 또 어떻고요? 나는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기저귀 냄새... 참을 수 없다고요. 그런데 도망칠 수도 없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 P. 135


그녀는 대놓고 스토너를 무시,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 그와의 합작품인 그녀의 '딸'이란 존재까지도 맡기 싫은 냄새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나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디스의 멸시와 스토너에 대한 경멸의 수치가 상승할수록 나의 분노 게이지도 함께 올라갔다. 아마 이 부분부터 읽힘의 박자가 몇 박자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심장은 불같은 흥분으로, 주먹에는 자연스러운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사건이  진행될지 스토너가 계속 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모두 잃어갈까 걱정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사실 나의 읽힘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스토너의 괴로운 모습을 빨리 지나처 버렸으면 하는 연민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맥스와 찰리 워커


또 다른 악인 두 명을 만난다. '로맥스' 교수는 아마도 고의로 스토너를 곤경에 빠지게 하려는 것 같다. '찰리 워커'라는 반 사회적이며, 교수가 될 자질이 없는 학생을 스토너의 주변으로 불러들여 악행을 저지르며, 그 사건의 결과를 통해 스토너를 파괴시키려 한다.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악의적인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른 어느 때보다 강의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로맥스는 자신의 경쟁자일지도 모를 스토너를 시기하며, 그를 제거하기 위한 수렁에 빠뜨리기 위하여 '찰리 워커'라는 인물을 등장시켰다. 스토너의 인생에 두 번째 악인이 등장한다. 이디스와 로맥스... 스토너를 파괴시키는 것이 주목적인 그들, 나는 스토너가 분노에 충실하길 바랬다. 멋지게 그들에게 복수하고 크게 한 방을 먹일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스토너는 공정했다. 찰리 워커와 같은 정신의 불구자에게 공정했다.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깐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은 것뿐일세. - P. 235



캐서린과의 불륜


결혼 생활에서 행복을 찾지 못했던, 스토너는 무의식적으로 캐서린이라는 인물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떤 형식적인 것, 겉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허울뿐인 사랑이 아닌, 서로 진심을 전하는 사랑을 처음으로 느낀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는 두 사람을 걷잡을 수 없는 불과 같은 사랑으로 안내한다. 스토너는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에서 따스한 친밀감이나 인간으로서 서로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어떤 끈끈한 연이라는 것들 조차 없었다. 캐서린이라는 불륜의 대상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스토너에게는 차분한 행복이 찾아온다. 불륜 때문에 그의 가정에 역설적이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캐서린을 통해 이디스를 깔끔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소녀와 같은 순수한 사랑을 나눴다.


딸의 임신과 그의 마지막 열정


그레이스는 이디스로부터, 이디스가 어렸을 적 그녀의 부모에게 당한 수모와 굴레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었다. 이디스는 그레이스를 속박했고, 모든 것을 제한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레이스를 만들어나갔다. 그레이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방법은 임신이었으며, 그 유일한 방법을 통하여 이디스를 벗어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스토너는 자신의 마지막 열정일지도 모를 '교육자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를 캠퍼스의 전설로 만들고자 한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캐서린도 포기했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도 포기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건,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바로 가르침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싶었던 영문학 강의를 하기 위하여 로맥스와의 마지막 전쟁에서 희미한 승리를 거둔다.


동료들, 특히 젊은 동료들은 흔히 그를 '헌신적인' 교육자라고 불렀다. 부러움과 경멸이 반반씩 석인 이 호칭은 그가 지나친 헌신으로 인해 강의실 밖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 적어도 대학의 건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눈이 멀어버렸다는 뜻이었다. - P. 308


그는 녹초가 될 때까지 즐겁게 온몸을 바쳐 일하면서 이 시절이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나 미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실망이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에 쏟으면서, 이제는 학자로서 자신이 해온 일을 통해 알려지기를 바랐다. - P. 351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의 죽음 직전 스스로에게 잦아드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던진 질문이다. 스토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까? 무엇을 이루기 위해 그는 인생을 단지 살아왔을까? 그가 마지막에 생각했을 때 그의 인생은 의미가 있었을까?


그는 진정 평범한 사람이었을까? 그 평범한 인생이 끝난지 50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어떤 것을 기대했기에 이 책을 집어 든 것일까? 무엇이 우리들을 그의 소설로, 그의 삶으로 온전히 빠져들게 했을까? 내가 감히 그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단지 영속적으로 이어나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조명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건, 지나치게 평범한 사람이건, 한 사람의 일생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숭고함을 상징한다.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에게 언제나 의미있는 것이다.


스토너는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자신에게 솔직했으며, 진정한 사랑을 했다. 그 사랑의 성공이라는 기준 자체가 파국이라는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에게만 아름다운 끈적한 것들이었지만, 스토너는 사랑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과로 발생할 모든 일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의 삶이 독자에게는 비록 애잔하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스토너 자신에게는 실패자가 아닌 만족스러운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평범한 우리들에게 묻는다! 네가 앞으로 기대할 건 무엇이며, 그것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말이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단편이 떠올랐다. 한 치 앞조차  분간할 수 없이 사는 나약한 인간, 그 인간이 되려고 하는 지평선 너머 존재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도 모르는 대상에 얽매이고 산다. 인생의 성공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재산과 명예, 사회적인 지위... 그런 것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에게 묻고 싶어 졌다. 그리고 쓸데없는 욕심들일랑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다.


한없이 정적이고, 일렁임조차 없었던 그의 잔잔한 삶, 그러나 단숨에 읽을  수밖에 없었던 스토너의 삶, 그리고 숨길 수 없는 작가 '존 윌리암스'의 자신의 이야기들을 스토너라는 인물로 투영시킨 솔직한 이야기들에 경외감을 남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싶었던, 스토너가 견딘 모든 것들, 버틴 것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나의 삶과 스토너의 삶을 번갈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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