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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02. 2020

그 무엇에도 맞지 않다.

단상

삶은 완만한 곡선처럼 내려갔다가도 어느새 오르막길을 타기도 한다. 그런 상승과 하강의 일들은 아무도 모른 채 슬쩍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부러 곡선을 급격하게 세울 필요도 없다. 곡선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럼틀처럼 오르락내리락거리면 그만일 뿐.


어김없이 눈이 탱탱하게 당겨지는 시간, 나는 숨을 멈춘 채 체중계 위에 몸을 얹혔다. 조금은 주춤거리고 흔들거렸으나 몸은 곧 중심을 바로 찾아갔다. 바늘이 좌우로 파르르 요동을 칠 때마다, 어제 못다 그린 삶의 궤적을 생각했다. 또 위기를 맞은 건 아니겠지. 매일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숫자들에 감격하거나 좌절하는 일도 이젠 지겹다. 완만한 그래프를 회복할 순 없을까.


옷장을 천천히 열었다. 여름이 어제부터 시작했으므로 한 철에 어울리는 옷들을 꺼낼 필요가 있었다. 바지를 허리춤에 대보곤 나는 지난여름의 무지막지한 몸집을 떠올렸다. 맞지 않았다. 주먹 서너 개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 넓은 여백만 가늠할 뿐이었다. 바지가 뱀처럼 두 혀를 내밀더니 기다랗게 숨을 토해냈다. 


도대체 맞지가 않아. 나는 들어맞지 않는 것들,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과 큰 것들이 소유하는, 불협화음을 생각했다. 그 순간 내 삶은 바지보단 상대적으로 작아졌다. 그러니까 나는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공간에 내 몸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를 받아 들고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사람처럼 흐뭇해하다가도, 무쓸모 한 물건들의 미래를 슬프게 공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작았으므로 큰 세계는 동경의 대상으로만 남았다.


나는 내 것이 아닌 존재라면 그 무엇이든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내가 가진 색은 또렷하게 읽히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굳이 색깔을 따지자면 흰색, 또는 투명한 물의 성질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물이 창조한 세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이든 내 속에서 투과되고 만다. 나는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다.


나의 본질은 누군가와 섞여야만 세상에 빛을 드러내고 투영된다고 할까? 나는 타인이 가진 어떤 분명한 색상에 한 방울 아이디어의 용액을 흘려줌으로써 그 세계에 편입되고 희석된다. 타인은 조금 덜 예민하게, 약간 완만하게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맞지 않는 세상의 존재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의 세계를 조금 떼어준다고 할까. 그런 방법으로 내가 가진 부피를 던다. 그러니까 그런 건 다이어트의 과정과 비슷하다. 지방을 덜어내기 위해 간헐적 단식과 운동을 병행하듯, 나는 튼튼하게 결집된 세계를 타인의 얼어붙은 세계를 녹이기 위해 기꺼이 투입시키고 흡수시킨다.


나는 여전히 어떤 곳에 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았다. 작년 여름 안간힘을 쓰며 좁은 구석에 다리를 집어넣던 것처럼 나는 오늘도 또다시 애를 썼다. 넉넉하게 남은 공간을 찾고 싶다면, 나는 다시 며칠 만에 몸집을 불려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존재만을 위해 나의 모양을 어디까지 변형해야 할지, 또한 끼워 맞춰야 할지, 끝은 보이지 않았다.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한숨을 부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늘어나버린 바지에게 양보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축 늘어진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선, 문득 오래된 것들은 마땅히 새것으로 갈아치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냉정한 결정이었다. 어떻게 이렇듯 쉽게 단념하고 포기한단 말인가. 고무줄놀이하듯 그들을 위해 내 용적을 자유자재로 늘이거나 줄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늘 나보다 컸다. 나는 세상의 굉장한 그릇에 맞지 않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처럼 옷장을 열어 놓고, 빗장이 풀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을 수도, 늘어난 옷가지를 붙들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삶을 오래 살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의 부피를 걱정하거나 그들의 공간을 조정하는 건 내 영역 밖의 일이었으니까, 비교적 쉬운 방법인 내 부피를 키우거나 줄이는 일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어디까지 나의 세계를 줄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계속 줄이다간 나는 평면이 되거나 점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 몸을 깎는다. 육체든 정신이든 그 무엇이라도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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