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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정이 Apr 05. 2020

미용실 유목민이 되다

어서 빨리 정착하고 싶어요... 제발...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3년여를 다녀왔던 단골 미용실에서 문자가 왔다.

지난번 커트할 때 원장님이 다른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매장 근무를 하신다기에 그러면 그 날짜만 잘 맞춰서 미리 예약해서 다니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새로운 사업에 전념하기로 하셨나 보다. 영업 종료를 하신다는 문자를 받고 나니 그제야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문제는 이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랜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가 이곳에 정착한 지 어느새 3년여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 또다시 미용실 유목민 신세가 되어버렸다니. 물론 이곳도 처음부터 끝까지 100% 완벽하진 않았었다. 가끔 원장님의 새로운 시도들로 인해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근래에는 이제야 정말 내가 원하는 모습을 찾았구나 싶을 정도로 펌과 커트를 병행해가며 만족스러운 미용 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런 즐거움과도 이별할 때가 와버린 것이다.


미용실에 가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냥 별로 따지지 않고 아무 데나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머리 하러 가는 일에 매우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란다고 하지만, 그 고통의 시간을 홀로 감내하고 있기엔 뭔가 너무 억울한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용실은 1인 미용실이다.

프랜차이즈 미용실도 다녀보았지만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가운데 말 그대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한가운데 앉아있자면 마치 컨테이너 벨트에 올라앉아 만들어지는 공산품이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공간 안에서도 실력 있는 사람을 만난다거나 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단순히 그 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싫을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조용한 공간 안에서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며 머리를 다듬는 시간은 내겐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비록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지만 서로 간의 짧은 안부를 묻고, 그럼에도 오랜 기간 이어져온 시간 속에 신뢰가 쌓여있는 유대관계는 매번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원하는 포인트를 짚어주는 것 같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 길어지고 부스스해진 머리카락들을 정리하며 이리저리 엉킨듯한 마음도 정리하고, 때론 변화를 꿈꾸며 스스로 하지 못하는 큰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기에 그 안에서 만큼은 다른 누군가와 섞여 이리저리 치이거나 조연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이 되어 대우받고 싶었고 그 과정을 마침 후엔 고통을 인내하는 시간이 아닌 만족의 시간을 영위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쓰긴 했지만 결국 이제 난 새로운 미용실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 신세가 되어버렸다.


말아보고도 싶고 꼬아보고도 싶었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기분만 우울하고 하소연해 볼 곳 없고
이거 정말 미칠 노릇야
- 미용실에서 (이승환 5집 CY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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